6.25 한국 전쟁

■ 한국 전쟁 (6.25 전쟁)과 세계 이념 대결

마도러스 2016. 10. 27. 22:51


 한국 전쟁 (6.25 전쟁)과 세계 이념 대결


★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새롭게 태동된 세계질서의 중심은 한반도의 3.8선으로 집중되고 있었다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세계 4대 강국이 되어 남한과 북한의 3.8선을 중심으로 포진(布陣)하게 되었다한반도의 3.8선은 미국과 소련을 대신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싸움터였다. 1949년 북한 김일성(金一成)은 소련 스탈린(Stalin)과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의 지원을 확인한 후에전쟁 계획을 그대로 착수하였다. 1950년 6월 25북한군이 총대를 메고 먼저 남한을 침공했고남한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그러나남한의 후원자인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유엔군이 결성되어 함께 참전해 주었다이 때 일본은 전쟁 물자를 조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회복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았으나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 내려와 3.8선에서 서로 휴전(休戰)하고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한국 전쟁 (6.25 전쟁)의 발발

 

2차 세계대전 이후중국은 1946년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은 서로 결별하여 내전(內戰)을 개시하였고처음에는 국민당 정부군이 우세하였으나, 1948년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군이 승리했으며, 1949년 1월 31일 중국 공산군은 북경에 무혈 입성하였으며1949년 12월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군은 완전히 패퇴하여 본토로부터 대만(臺灣)으로 정부를 옮겨갔다이로써 본토는 중국 공산군에 의해 완전 통일되었다한편북한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6만명의 정규군 병력으로 이루어진 북한군을 정식 발족시켰으며, 1948년 9월 정식으로 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1949년 01월의 중국 통일에 자극받은 북한 김일성(金一成)은 1949년 3월 남침 계획서를 가지고 먼저 소련의 스탈린(Stalin)을 찾아갔다그러나스탈린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며더 세밀한 계획을 세워 가지고 오라고 했다김일성은 새로운 계획서를 가지고 다시 찾아 갔다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의식했던 스탈린은 분명 미국이 개입할 것이다그러니지금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다그러나김일성은 만약 전쟁을 신속히 끝낸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그러자스탈린은 그러면 중국의 모택동의 의견을 물어보라고 했다김일성은 곧바로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을 찾아 갔고중국의 모택동은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으니까절대 개입 안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전쟁에 찬성했다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전쟁이 확정지어 졌다.

 

당시 중국의 중국군에는 약 3만 명의 조선족 중국인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김일성은 이들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모택동은 그것을 승인해 주었다그래서, 3개 사단의 병력에 해당하는 3만 조선족 장병들은 1949년 말부터 비밀리에 북한으로 이동하였다북한 정권은 이들을 받아들여 당적을 중국 공산당에서 조선 노동당으로 바꾸고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1950년 1월 12미국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은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 (일명 Acheson line)을 밝혔다. 남한은 이 방위선 내에 들어 있지 않았다이것은 미국이 유사시에 한국을 방어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해석되어 북한 지도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1950년 3월 10미군 극동 사령부는 1950년 6월 25-28일에 남침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또한1950년 6월 1미국 트루만(Truman) 대통령은 의회교서에서 한국에서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위험성을 환기시켰다. 1950년 6월 15일 전후부터 북한 인민군은 훈련을 위장하여 38선으로 남진하기 시작하여 38선 이북 10-30km 부근에 집결하였다이들은 6월 22일과 23일에는 38선 후방 5m에 전개하여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 1950년 6월 25새벽 4시경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여단 및 특수부대를 포함총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기습 남침하였다.1950년 6월 26유엔 안보리에서 북한군의 침공 중지를 결의하였다. 1950년 6월 27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미국의 극동 해군과 공군에게 한국으로 향하도록 명령하였다. 1950년 6월 27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삽시간에 쳐들어왔고육군 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였다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다하지만허황성세(虛荒聲勢)에 불과했다그의 북진 통일론은 실제로 전투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북한 위협으로부터 국민들의 동요를 막고 반공(反共정신과 안보 의지를 다잡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1950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편승해서 명령만 내리면점심은 평양에서 먹고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라고 했다국민들은 꼼짝없이 그들의 주댕이 국방을 믿었다하지만그들은 허풍장이었고 거짓말쟁이었다.

 

1950년 06월 25국민 전체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새벽부터 전쟁 발발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1950년 06월 26일 아침 8 신성모 국방장관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다라는 라고 거짓 선전을 해서 서울 시민을 속였다. 1950년 06월 27일 새벽비상 국무회의가 열렸지만이승만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열차편으로 이미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승만 대통령은 장관국회의원육군 본부에게 통보하지 않고 대전(大田)으로 도망갔다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곧 특별 담화를 녹음했다. ‘서울 시민은 안심하십시오남침을 감행한 북한 괴뢰군은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38선 너머로 쫓겨나고 있으며 국군은 38선을 굳세게 지키고 있습니다국군을 믿고 자리를 지키십시오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마십시오대통령인 나 역시 서울을 떠나지 않고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 방송은 서울 방송국이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행해졌다대전(大田)에서 녹화된 라다오 방송은 06월 27일 밤 9시부터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전국민에게 전달되었다06월 28일 새벽 230 이승만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하나 밖에 없던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수많은 시민들이 다리 위에 있었음에도 사전 통보나 어떤 통제도 없었다다리 위의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그 다리를 건너가던 시민 500여명이 폭사(爆死)당했다군사 전략적으로 볼 때도 이것은 터무니없는 실수였다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던 우리 국군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희생된 것이다. 06월 28일 서울은 북한 괴뢰군에게 함락되어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50년 07월 01이승만은 대전(大田)에서 또다시 도망갈 때도 목포(木浦)로 이동한 후부산(釜山)으로 배를 타고 갔다경부가도(京釜街道)가 이미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이승만은 서울 시민을 서울에 가두어놓고 자기 혼자만 살 생각을 했다그리고나중에 서울 수복을 했을 때 서울에 남아 고생한 뭇 시민들은 북한 괴뢰군에 부역(賦役)했다고 고문(拷問)해서 죽이고연좌제(緣坐制)로 묶어 놓았다. 1950년 06월 28북한 인민군은 대낮에 서울에 진입하였다★ 한국 전쟁은 3일만에 남한 수도 서울이 함락된 3일 전쟁이었다그 다음, 1950년 06월 29일부터는 미군(美軍)이 상륙하여미군과 북한군이 주로 싸우는 지루하고 치열했던 전쟁이었다.


★ 1950년 06월 28, UN은 즉각 국제 연합군 파병을 결정하였다1950년 06월 29맥아더(MacArthur) 장군은 일본에서 항공편으로 수원에 미리 도착하여한강 방어선의 한국군과 전선의 상황을 시찰하였다그는 이 자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으며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국에 지상군을 투입할 것을 본국에 건의하였다. 1950년 06월 26일부터 한반도 상공에 최신예 미국 공군 제트 전투기들이 출동하기 시작했고, 1950년 06월 27일에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그리고한국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한반도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미국 7함대 해군 역시 신속하게 한반도 주변 해역으로 이동하였고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친 항모 함대의 함재기들은 북한의 수도 평양과 주요 군사 목표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북한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공습의 시작이었고북한의 전쟁 예상 시나리오가 최악으로 변했음을 알려주는 징조였다그러나미국 공군해군의 맹활약에 비해서 미국 육군은 계속되는 패전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미국 극동군 사령부는 세계 최강 미군이 출현만으로도 북한 인민군이 꽁무니를 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50 06 30,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지상군 투입 결정에 따라 일본 큐슈에 주둔했던 보병 24사단의 스미스(Smith) 대대 1개 대대가 195007월 01 부산에 신속하게 상륙했다하지만1950년 07월 05경기도 오산 북방 죽미령 첫 전투에서 540명의 스미스 부대는 반나절도 버티지 못했다. 150명의 전사자와 30여명의 실종자를 내고대부분의 중화기와 공용 화기를 상실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미군 바주카포로는 인민군의 T34 전차에 흠집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다스미스 특임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지게 되는 부대였지만소속된 대부분의 병사들은 달랑 8주간의 기본 훈련만 받았을 뿐전투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의 병사들이었다이들에게 약1,200발의 포탄이 있었지만전차를 관통할 수 있는 대전차 철갑탄은 달랑 6발이 전부였다대부분 소풍나들이 가듯이 전장에 나가서 미군의 존재만 보여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미군 선발대는 매우 처참하게 패배했다미군은 소련군 전차의 무서움을 한반도에 와서야 상당한 수업료를 치루고 배우게 되었다그 지불 액수가 예상외로 비싸고 클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예상을 뒤엎고 스미스(Smith) 선발대가 오산 죽미령 첫 전투에서 저지는커녕 공황 상태에 빠져 퇴각하자인민군에 대한 공포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 1950년 07월 06선발대의 궤멸과 도주로 인해 미군 24사단은 도미노처럼 연쇄 붕괴되었다그 후1950년 07월 07천안 방어선을 구축하고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북한 탱크에서 발사된 포탄에 미군 34연대 연대장 마틴(Martin) 대령이 현장에서 전사하는 골때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지휘관의 전사와 막대한 병력 손실로 지휘 체계가 흔들린 미군은 또다시 후퇴하였다1950년 7월 15유엔군이 결성되어 한국에 투입되었다유엔군이 한국에 투입되자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였다1950년 7월 20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미군 제24 사단은 대전(大田)에서 방어작전을 전개하였으나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결국, 1950년 07월 20 대전도 함락되었다. 24사단 4천여 연대 병력 중 1,150여명이 전사 혹은 포로가 되었으며나머지 병력 대부분도 중화기와 군수품을 잃고 패주했다설상가상으로 사단장인 (Dean) 소장은 길을 잃고 36일을 헤매다가 결국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동양의 미개한 원주민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임했던 전투에서 미군은 2차 대전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참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전투에서 사단장이 포로가 될 정도의 참패는 미국 육군 역사상 처음 있는 굴욕적인 일이었다이 사건 이후미국 백악관은 맥아더에게 움직이는 것은 무었이든지 쏴라!”고 지시한다결국한국 전은 전투원 보다 민간인의 사상자가 전투원 보다 더 높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전쟁이 되었다예상치 못한 연이은 참패로 인한 미군의 신경질적인 대응은 다른 곳에서의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진격을 계속하였다대전이 함락된 후 군산영덕광주등 주요 도시들이 속속 함락되어 졌고이러다가는 전 국토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듯 했다.

 

1950년 8월 1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설정하였다일단 모든 전력을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전열을 정비하고 이 지역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만일 여기서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면 제공권을 장악한 UN의 항공전력이 북한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줄 시간을 벌 수 있게 되고 부산항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전쟁 물자가 비축되면전황의 역전까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낙동강 방어전의 근간이었다그래서미군 제 8군 사령관 워커(Walker) 중장은 전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1950년 8월 5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창녕영산마산포항안강 등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1950년 8년 16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퍼붇기 시작하였다이것은 6.25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적인 폭격도 1950년 8월 중순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실시되고 있었다오끼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출동하는 B-29 폭격기들의 일부는 낙동강 전선의 아군을 지원하고 나머지는 북한으로 날아가 산업시설을 연일 맹폭하였다.

 

당시 남한 지역은 주로 농업 위주로 발달되어 있었고북한 지역은 공업시설 위주로 발달되어 있었는데이런 북한의 공업시설들이 목표가 되었다북한의 제철소철도 조차장유류 저장소항만 시설등이 일제히 목표물 리스트에 올랐으며 연일 B-29 폭격기들의 융단 폭격을 받았다결국 8월말이 되자 북한 산업 시설의 90%가 지도상에서 사라져 폐허가 되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B-29 폭격기들은 북폭을 중단하고 다시 낙동강 지역으로 몰려와 북한군을 다시 맹폭했던 것이다.

 

1950년 8월 31-9월 8,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의 왜관다부동창녕영산마산포항 등을 공격하였다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북한군을 물리쳤으며이후 이곳 낙동강에서 다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공군의 폭격기들은 인천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광범위한 공습을 시행하여 인천으로 공산군의 전력이 보강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우선 정찰기들의 사진들을 분석하였으며북한군의 주요 포대가 포진중인 것으로 보이는 월미도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고이후에는 인천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신속하게 중부 내륙으로 진입한 후 3일 이내에 곧장 서울 부근까지 진격하며무엇보다 김포 비행장을 우선적으로 탈환하여 항공작전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었다이런 목적이 달성되면 즉시 서울로 입성하여 북한군을 몰아내고 낙동강 지역에서 발이 묶인 북한군의 배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었다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한국은 제주도까지 철수해서 제2의 대만이 되거나 망명 정부를 수립해야 할 최대의 위기에서 결사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2)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탈환

 

조수(潮水간만(干滿)의 차가 큰 인천(仁川앞바다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하려면 밀물(密勿)이 해안으로 가장 많이 밀려드는 9월 15일과 10월 11일이 최적기였다이때는 상륙정들이 인천의 내항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만조(滿朝)시부터 34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에작전은 최소한 3시간 이내에 신속하게 수행되어야 했다맥아더는 9월 15일을 공격 시점으로 정했다작전일이 1950년 9월 15로 정해지자 미군 정찰기들이 쉴새없이 서울과 인천 상공을 날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서울과 인천 사이에 배치된 북한군의 병력 상황을 파악한 미공군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이 인천쪽으로 보강되지 못하도록 서울과 인천사이의 도로와 철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시작했다. 9월 9일부터 13일 사이에 미공군 B-29 폭격기 편대가 이 지역을 연일 맹폭했으며모든 철로나 도로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못했다상륙함대가 일본을 떠나 서해안으로 향해 접어들고 있을 때늦여름의 불청객인 태풍(颱風)이 찾아온 것이다미군은 기상 정보에 촉각을 기울이고 조심스럽게 상륙함대를 서해로 전진시켰다상륙함대의 261척의 함선들과 약 1,000대의 비행기 그리고 7만여 병력이 태풍 하나 때문에 온통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다행히 태풍은 하루만에 세력이 약해진 상태로 멀어져 갔으며 작전 결행 36시간 전에는 모든 기상 상태가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오전 6시 33분 새벽의 여명과 함께 공격 명령이 떨어졌으며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하늘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새벽 하늘을 가르는 불덩어리들이 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면서 인천 해안으로 날아갔으며 곧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붉은 섬광과 검은 연기가 마치 인천 전체를 불태워 버리려는 듯한 기세로 퍼져 나갔다최우선 공격 목표였던 월미도의 북한군 포대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보고 잠들어 버렸고(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여 별 저항없이 순조롭게 점령할 수 있었다. 1950년 9월 15오후 5시가 되면서 밀물이 절정에 달하자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한국군 해병대와 미(해병대 병력을 실은 상륙정들이 선봉에 서서 벌떼처럼 병력을 해안으로 쏟아냈으며해안에 도달한 해병대원들은 산발적인 북한군의 저항을 쉽게 제압하고 목표로 했던 교두보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하였다맥아더의 도박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UN군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서 전진했다이중 김포 비행장 탈환을 목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미 해병대는 북한군의 잔존 병력을 소탕하면서 순조롭게 전진하여 9월 17일 김포비행장을 근처까지 전진했다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과 낙동강에서의 UN군의 공세로 인해서 남한으로 침공했던 북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이미 북한군은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이제는 낙동강을 건너 밀고 올라오는 미군과 한국군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더구나 하늘에서는 UN군의 전폭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들어 머리를 들지도 못할 정도로 맹렬하게 공습을 계속하고 있었다결국 남쪽으로 치고 내려왔던 북한군은 변변히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UN군의 포위망을 피해서 북으로 후퇴하거나 지리산과 같은 남한의 산악지대로 숨어야 했다.

 

1950년 9월 28인천에서 상륙한 미군 제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실시한 미군 제8군단이 북한군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1950년 9월 30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드디어 38선에 도달하여 대망(大望)의 북진(北進)을 기다렸다한편북한군이 예상외로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북쪽으로 후퇴하자, UN군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만약미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해 들어갈 경우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해서 확전(擴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결정은 잠시 망설여졌다그러나맥아더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국을 통일하자는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리고지금의 추세라면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을 결정하기도 전에 완전히 북한을 점령해서 한국을 통일할 자신이 있다는 주장이었다결국미국 정부는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1950년 9월 27일 맥아더는 UN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즉각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한국군(韓國軍부대여야 하며중국과 소련과의 국경지대로는 오직 한국군(韓國軍)만이 전개하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어졌다한편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설 움직임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외교경로를 통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올 경우중국군이 이 전쟁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다그러나 맥아더는 중국군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위협에 대해서 다분히 말뿐인 위협정도로만 여기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3) 38선 돌파와 평양 진입 및 압록강 접근

 

1950년 10월 1유엔군 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 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 선두부대가 먼저 동부 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서부전선에서는 미(8군이 10월 9일부터 일제히 38선을 돌파하였다맥아더의 북진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대대적인 예비 폭격이 시작되었다정찰기들이 쉴새 없이 북한 상공을 날아다녔으며 북한군 부대나 진격에 방해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물들이 발견되면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 폭격을 퍼부었고이후에는 F-80이나 F-51D 같은 전폭기들이 또다시 날아들어 쑥대밭을 만들었다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퇴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야음을 틈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해야 했다. 1950년 10월 9미군이 개성에 입성했으며제 기갑사단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한국군과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면서 김일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그는 자신의 꿈이 속절없이 날아가 버린 것을 실감해야 했다더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남아있는 북한군에게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신속하게 중국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그리고 자신도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중국으로 도망길에 올랐다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들어간 김일성은 즉시 모택동을 찾아가 북한군을 도와달라고 애원했고모택동이 참전을 망설이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건너갔다한편이때 맥아더는 또 하나의 상륙 작전을 계획했는데그 곳은 원산이었다맥아더는 이 지역에 다시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북한군을 또 한번 고립시키고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이 입안되고 실행되기 바로 직전에 원산 지역과 해안에는 대규모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그리고지상군의 진격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져서 굳이 위험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그러나맥아더는 지뢰를 모두 제거한 후 드디어 원산에 상륙하였다그런데지뢰를 제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전격적인 기습은 할 수 없었다미 해병대가 원산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한국군이 육로(陸路)를 통하여 원산을 점령한 뒤였던 것이다결국 맥아더 장군의 원산 상륙 작전은 큰 소득이 없는 결과가 되었다.

 

1950년 10월 10북진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국군 제1군단은 이날 원산을 점령하였으며이로써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공격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1950년 10월 19서부전선의 국군 제1사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으로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으며곧이어 미군 제기병사단국군 제7사단의 선두부대도 평양에 진입하였다이무렵북한군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되었으므로곧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북한공군의 주요 비행장이던 평양 비행장은 북한공군이 황급히 퇴각하면서 활주로나 시설물에 대해서 제대로 폭파작업을 하지 않아 상태가 양호했다따라서 대부분 쉽게 F-51D와 같은 미 공군기들의 작전 기지로 변하였고여기서 날아오른 F-51D 전폭기들은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퇴각 중인 북한군을 공격했다이 무렵 미 공군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조종사들에게 절대로 압록강을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는데 이것은 종종 조종사들의 비행착오나 항법 실수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다몇몇 F-51D 조종사들이 압록강 이북의 중국지역으로 날아가서 공습을 가하고 돌아오곤 하였다심지어는 신의주를 폭격하러 출격했던 B-29 몇대가 항법착오로 압록강 접경의 중국 안뚱의 철도역을 폭격한 일까지 있었다물론 모든 것은 조종사들의 과실로 드러났지만 중국군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1950년 10월 초에 한국군을 선두로 미군이 주도하는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하자, 김일성은 재빨리 중국으로 도망갔으며 이 전쟁에 중국과 소련이 참전해 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절박하게 소련과 중국을 오갔다모택동(毛澤東)과 스탈린(Stalin)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였다중국은 자국과 국경을 맞대는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고 있었으며소련도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접경인 두만강 지역에 미국의 최전선 교두보가 설치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이 무렵 중국은 대만으로 도주한 장개석(蔣介石정부를 분쇄하고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적인 움직임을 추진하고 있었는데미군이 북한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사사건건 중국의 행보에 방해를 놓을 것이 분명했다.

 

중국은 이미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대규모 병력을 만주지역으로 이동시켜 배치한 상태였다그리고북한이 성공적으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다 다시 유엔군의 반격으로 쫓겨서 38선까지 밀려나자중국은 1950년 10월 1일부터 만일 한국군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대가 38선을 넘어서 북진한다면 이것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로 간주할 것이며 즉시 중국군을 파견해서 저지하겠다는 내용의 외교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그러나 중국의 이런 발언은 중국을 크게 얕보고 있었던 맥아더에게 가볍게 무시당하고 있었다사실 중국군에게는 미군에게 대항할만한 항공 전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군부에서도 중국의 공군력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고그래서 군부장성들은 모택동에게 공군력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을 진언했다모택동(毛澤東)도 이 의견에 영향을 받아 즉각적인 중국군의 투입을 주저하고 있었다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즉시 소련으로 향했다소련의 스탈린과 만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미군의 항공 전력이 실로 막강하며 북한군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거의 다 이긴 전쟁을 미군의 군사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며미국과 대적할 만큼의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군이 반드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거의 애걸하다시피했다그러나 스탈린도 고민거리가 있었다물론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한국을 통일시켜 소련의 목 앞에 칼날을 세우게 하는 것만은 허용 할 수가 없었지만소련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남한을 무력 침공했던 북한군은 UN에서 침략군으로 규정된 상태였고 소련은 공공연하게 이 전쟁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온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이 이런 북한군을 전면적으로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한다면 아무래도 명분이 없었다1950년 10월 초부터 소련과 중국 사이에는 바쁘게 비밀 통신이 오고갔다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소련군이 전면에 나서서 참전하기에는 아무래도 명분이 없어 곤란하니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북한 지역에서 미군을 몰아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모택동은 소련군이 최신 제트 전투기를 포함한 전쟁물자의 공급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소련 조종사들을 파견해서 상공을 책임져 준다면 중국군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중국은 이 기회에 소련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물자를 얻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스탈린(Stalin)은 망설이다가 결국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것에 동의했다스탈린으로서는 소련 지상군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 좋았고현재 개발이 완료된 최신 미그 제트 전투기를 실전에서 운용해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소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2차대전 후부터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최신예 미그-15 제트 전투기를 신속하게 소련 공군의 실전 부대로 배치하여 실험했었으며조종사들은 즉시 이 신형 제트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이미 훈련 받았었다소련 공군이 한국전쟁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었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일체 비밀로 규정하고 있었고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으므로 베일에 가려진 상태였다. 1950년 10월 중국에 도착한 미그-15 전투기의 동체와 날개들은 즉시 소련 기술자들에 의해서 현장에서 조립되었으며 대부분은 소련 조종사들이 운용했고 일부는 중국 공군에게 넘겨졌다그리고 이러한 미그-15의 공급은 전쟁기간 동안 계속 증가하게 되는데이들 미그-15 전투기에게는 대부분 북한 국적 마크가 그려졌고일부는 중국 국적 마크가 그려졌다.

 

이 무렵 UN은 함경남도의 요지 함흥을 점령했으며 이로써 북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950년 10월 19부터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들어오자스탈린(Stalin)은 중국에 파견된 조종사들에게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이 무렵까지 중국 공군기지에는 소련공군의 3개 항공사단이 파견되어 있었다이들은 제28 , 50, 151 항공사단으로서 각각 압록강 근처의 주요 항공기지인 센양안산안뚱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후 계속 증강되는 소련 항공전력의 근간을 이루었다이제 소련의 비밀 무기 미그-15 제트 전투기들은 출동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채로 출격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상의 중국군도 한국군과 미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 언제라도 발진할 수 있도록 준비에 들어갔다이제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들이 또다시 혈전을 벌이는 무대가 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및 서울의 재탈환

 

1950년 10월 19, 비밀리에 30만여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군과 연합하면서 전세는 다시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1950년 10월 19부터 중국군은 은밀하게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이들은 북한지역에 들어온 후 주간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은신했으므로 UN군의 정찰기로부터 탐지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25 압록강 근처에까지 다다른 미군 선발대가 갑작스레 나타난 적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미군 병사들은 이들이 북한군 복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이 때만해도 미군은 이들을 북한군의 잔존 게릴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그러나 다음날 미군 수색대가 적의 병사 몇 명을 생포해서 돌아왔는데 이들은 북한병사들이 아니라 중국군 병사들이었다이미 중국군은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더구나 미군이 발견한 중국군 병력은 이미 북한으로 진입한 중국군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다이미 30만에 가까운 대규모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한편, 1950년 10월 하순경, UN군의 항공작전은 점점 강도가 약해지고 있었다이미 B-29 공군부대는 폭격 목표가 없어져버려 폭격임무를 대폭 줄인 상태로 날개를 쉬고 있었으며 다른 전폭기들도 압록강 근처에서 순찰 비행 정도만 시행하고 있었다미군 병사들 사이에 이제 전쟁은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끝날 것이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흐르고 있었으며 한국민들도 연일 계속되는 승전보를 접하면서 이제 조국이 통일되리라는 것에 대해서 들떠 있었다이제 통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 들여졌다그러나 이것은 얼마 뒤 몰아칠 엄청난 폭풍전의 작은 고요에 불과했다점점 차가워지는 10월말의 날씨와 함께 한국전의 양상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국군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사실 이무렵 중국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25유엔군의 항공 정찰을 피하기 위해 야간 행군으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 지역의 산악 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이 제1차 공세(攻勢)를 해왔1950년 10월 25,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미국 본토에서는 경천동지할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바로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카드였다한편, 1950년 10년 26압록강으로의 공격 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사단 제7연대의 선봉 부대가 최초로 압록강에 도달하였다. 1차 공세를 실시한 중공군이 곧 흔적도 없이 잠적하여 버렸으므로유엔군 사령부에서는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목표로 최종 공세를 펼쳤다.


1950년 11월 2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되었다국군 및 유엔군은 중공군 30만 대군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1950년 11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신의주 아래 온정리 라는 곳에서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 부근으로 물러나게 한 후방어를 위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청천강 일대에 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이로써 국경선까지 도달하여 통일을 달성하려던 꿈은 사라지고 다시 후퇴로 돌아서게 되었다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맥아더 장군은 만주폭격과 중국연안 봉쇄대만의 국부군(國府軍)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는 결과를 빚어냈다1950년 11년 24미군 제8군단과 국군은 역시 청천강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중국군의 인해(人海전술과 북부지방의 겨울철 혹한에 부딪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청천강 서부 지역에는 한국군 1사단미군 24사단1기갑 사단 등을 배치하고청천강 상류인 덕천군영원군에는 한국군 제2군단(6사단. 7사단. 8사단)을 배치했다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위와 같은 병력 배치를 파악하고전혀 주저함 없이 1950년 11월 24,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군과 영원군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으로 공격을 지시했다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참전 이래 한국군을 오합지졸(烏合之卒)로 평가했다그래서주로 한국군 방어지역을 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1950년 11청천강 전투에서한국군 제2군단은 완전히 궤멸되었다전 병력의 60%가 사망실종포로가 되었다심지어는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하였다그런데더욱 가관인 것은 6사단을 이끌고 있던 한국군 2군 단장 (유재흥 중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의 예하 사단인 7사단, 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위와 같이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짐에 따라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미 8군 워커 중장은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소식을 접하고연합군 및 미군에게 평양까지 후퇴를 지시하게 되는데퇴각을 명할 시점에 이미 중공군 38사단은 미군의 퇴로 차단에 나서고 있었다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 확보에 나섰고터키군이 용감하게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미군은 겨우 평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에는 연합군은 임진강한탄강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14-24동부 지역에서 북진한 미군 제10 군단의 주력 부대들도 서부 전선의 붕괴로 공산군이 원산을 점령하였으므로육로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국군 및 유엔군은 흥남항에서 193척의 함선으로 약 105,000명의 병력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 17,500대의 차량, 35만 톤의 화물을 실어 나르는 대대적인 흥남 철수작전을 실시하였다. 1950년 12월 중순서부 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미군 제군단과 국군 제 1군단은 청천강으로부터 신속히 철수하여 38선까지 후퇴하였다. 1950년 1222, 미국 합동 참모 본부는 유엔군이 금강까지 밀리면 약 200만의 한국인을 제주도로 옮기고 대만처럼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반격을 도모하거나 최악의 경우에 미군은 전쟁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검토했다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1951년 1월 4중공군의 신정 공세를 맞아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함으로써 서울이 다시 한번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수많은 국민들도 함께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고이것을 1.4 후퇴라고 부른다.

 

1951년 1월 14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추락하듯이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서쪽으로는 평택동쪽으로는 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25일에는 수원까지도 빼았기게 되었다중국군은 야음을 틈타 이동하면서 공격해왔고 엄청난 병력으로 미군과 한국군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뿔피리를 불면서 공격해왔다이들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는 은신하고 외곽에서 교란을 하다가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대규모 병력을 총동원하여 물밀듯이 밀어붙이는 전술을 구사했다이것이 이른바 중국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었다그리고 하늘에서는 소련의 비밀 무기 미그-15 제트 전투기가 드디어 그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중공군의 4차 공세가 시작되면금강까지 후퇴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한국 전쟁 최대의 위기 순간이었다전의를 상실했던 순간갑자기 중공군이 진격을 멈췄다

 

1951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더 중요한 요인은 1951년부터 전쟁 중에 갑자기 중공군에게서 수천 명의 괴질병(怪疾病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UN군도 마찬가지로 괴질병(怪疾病)이 발생했다UN군 중 3천 2백여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중공군 병영 내에 갑자기 괴질병이 돌아 한강 이남을 넘어오지 못했다. 괴질병이 한강 북쪽의 한탄강(漢灘江유역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그 괴질병(怪疾病)이 바로 한탄 바이러스(Hantaan virus)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이다피해가 심했던 나머지 UN군과 중공군 모두 이 유행성 출혈열을 상대방이 만든 생물학 무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중공군은 갑자기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1951년 03 15일 본격적으로 퇴각했다한국 전쟁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이렇게 뜻밖의 괴질병(怪疾病) 유행 사건으로 해결되었다.


한편미군 제8군 사령관으로 리지웨이(Ridgway)가 워커 장군의 뒤를 이어 새로 임명되었다리지웨이(Ridgway)는 위력수색 작전을 구사하여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였다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영토 확보를 위주로 했던 과거의 작전과는 달리 우세한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의 병력을 최대한 살상하고 물자를 소진시킴으로써 적의 군사적 능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작전을 새로 구사했다1951년 03월 14일유엔군과 국군은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려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그리고 여세를 몰아 38선까지 진격한 후 재차 북진하였다. 1951년 4월 12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해임하고그 후임으로 미군 제8군 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트루먼 대통령은 북진의사를 굽히지 않는 현지 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하고 휴전협상을 모색하였다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Van Fleet) 중장(워커 중장의 후임)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 (보병 3사단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오마치 고개 지역에 배치했다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 지역 공격을 선택했다. 1951년 05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 지역인 강원도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차단한 후공세를 시작함으로써한국군 제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다이때 중공군 100여명은 강원도 인제군 현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그런데놀라운 것은 그 당시 한국군은 2만 5천명이었다상황을 정리하면, 2만 5천명의 한국군이 100여명의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3군 단장 (유재흥 중장)이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부하들은 남겨 둔 채경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당연히 제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되었고병력의 60%는 사망실종포로가 되었다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지리멸렬되어 3일 동안 무려 70km를 퇴각했다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 정도만 살아 남았다나머지는 사망실종포로가 되었다중공군의 포위망이 거의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도 싸울 힘이 충분히 남은 상황에서 지휘관이 먼저 도망감으로써 부대 전체를 와해시키는 믿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이 패전이 계기가 되어 전시 작전 통제권은 완전 상실하게 되었다2차 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했던 백전노장 밴플리트(Van Fleet)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다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및 지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으니지휘권을 연합군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이승만은 장군의 요구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이 사건이 바로 전시 한국군 전시 작전 통제권 상실의 사건이었다. 이 시점 이후한국군은 자기 부대만 통솔할 뿐작전 및 작전 지휘권은 금지되었다전시 작전 통제권은 한미 연합 사령부에 이양되었다.



5) 휴전 회담 개최 및 포로 송환

 

1951년 6월 23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한편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함으로써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쌍방의 휴전 회담 의사를 확인한 미국은 협상을 양측 정부 수준이 아닌 야전사령관 수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회담장소를 원산항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덴마크 병원선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공산측의 반대에 부딪혀 그들의 주장대로 개성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1951년 7월 10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의 반대 속에 휴전회담은 미국 중국 북한의 대표들이 우선 만나 진행하고 있었다양측 실무진의 회합을 거쳐 마침내 개성에서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개최되었다휴전회담이 개최되자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그러나 협상은 사소한 절차상의 문제와 공산군 측의 협상 방해 책동에 밀려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특히 공산군측이 무력행사로써 회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유엔군측이 이에 강력히 항의하였다1951년 7-8협상이 계속 지연되는 가운데 미국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게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폭격은 쉴사이 없이 계속 이어졌으며 미국은 북한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시행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다.

 

1951년 10월 25드디어 휴전 회담 장소를 중립지대인 판문점으로 옮겼다이후 이곳은 6.25전쟁의 휴전회담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분단국가의 접촉점자유진영과 공산 진영이 만나는 장소로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1951년 10월 28협상의 과제 중에서 휴전시 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큰 논쟁거리로 떠올랐다공산군 측은 38선을 주장하였고유엔군 측은 현재의 접촉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오랜 설전을 거듭한 끝에 군사 분계선을 현재의 접촉선으로 하고그 양측으로 각각 2km씩 물러서 비무장 지대를 설정한다는 데 합의하였다휴전선을 휴전 당시의 전선으로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자 단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따라서 이 시기에 전선에서의 인적 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1951년 12월 18휴전회담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소비한 의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이 문제는 쌍방이 수용하고 있는 포로 명단을 교환하면서 논쟁이 불붙기 시작하였다이때 유엔군측이 제시한 공산군 포로의 숫자는 132,474명이었던 데 반해공산군 측이 제시한 유엔군 포로의 숫자는 11,559명뿐이었으므로 유엔군 측은 공산 군측이 포로를 숨겨두고 진실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공격하였고공산군 측도 이를 반박하였다이후 포로송환 방법에서도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포로 문제를 합의하는데 20개월이 소요되었으며이 때문에 휴전도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다.

 

휴전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38선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경기도 철원 평야의 백마 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이 곳에 대한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 동안에 무려 30만발의 포탄이 낙하됐으며피아(彼我)간에 주인이 10일 동안 24이나 바뀌었던 곳이다한편1952년 11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쟁의 조기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Eisenhower)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3년 소련에서는 몰로토프가 스탈린의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이들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원하였다.

 

1953년 4월 20-5월 3휴전 회담이 포로 송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자 유엔군 측은 부상 포로 및 환자 포로를 우선적으로 송환하자는 방안을 공산군 측에 제의하였고공산군 측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부상병 포로가 교환되었다이때 유엔군 측은 6,670명을공산군 측은 684명을 각각 상대편에게 인계하였다. 1953년 5협상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의 북한 도시들에 대한 폭격은 계속 되었고특히평양근교의 5개 댐을 폭파함으로써 막대한 홍수 피해를 입도록 하였다. 1953년 6월 8포로송환 문제가 유엔군 측의 지원 송환 원칙과 공산군 측의 전체 송환 원칙이 절충하는 방식으로 타결을 보았다이로써 공산군 측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반공포로는 자유세계에 남거나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그러나공산군 측이 그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억류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는 아군 포로를 송환 받는 일은 성공하지 못 하였다한국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적인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휴전회담 자체를 거부하였고국민들은 격심한 휴전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3년 6월 18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밀명(密命)을 내려유엔군이 관장하고 있으나 한국군 및 한국 헌병이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포로 수용소를 기습적으로 개방하여 반공 포로를 탈출케 하는 작전을 감행하였다그 결과 8개 수용소에서 27,000 여명이 탈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전세계는 깜짝 놀랐다그래서유엔군 측은 휴전협상이 결렬될 것을 걱정하였다그러나항의하던 공산군 측도 협정 체결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1953년 7월 27판문점의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측 대표 헤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은 모두 18통으로 된 협정문서에 서명하였다이 협정문서는 문산의 유엔군 전방 사령부로 보내져서 오후 1시에 클라크 대장이 서명하였고다시 판문점을 통해 평양으로 보내져서 북한 김일성이 서명하였고중공군을 대표하여 팽덕회가 각각 서명하였다그러나한국의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하였다계속적인 북진(北進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얼마 후휴전을 묵인하는 댓가로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얻어냈다그럼으로써이승만은 한국이 미국의 후원 아래 반공(反共)의 최전선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그리고,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선에서의 모든 전투행위가 종료됨으로써 6.25전쟁은 휴전(休戰)하게 되었다.

 

6) 한국 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최초의 교전이었다.

 

한국 전쟁은 최초의 이념전쟁이었다과거의 전쟁들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이나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것에 불과한 초라한 전쟁이었다한국 전쟁은 자본주의 이념을 위하여 혹은 공산주의 이념을 위하여 싸우는 대국적인 전쟁이었다그리고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공격이라는 것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여기에는 특히 혁명과 반혁명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갈등의 점진적 고조 등이 들어 있는 것이다한국 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최초의 교전이었고한국 전쟁에 의해 세계적인 냉전 구조가 완성되었다특히한국 전쟁은 2차 대전의 종결 이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세계적 차원의 냉전 구조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간의 대립을 가속화시켰다미국의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 체제로서의 남한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북한은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결하는 냉전 구조의 표본이 되었다한국 전쟁에 의해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긴장이 더욱 강화되었고 고착화되었다미국은 사회주의권의 확산을 막고 미국중심의 시장 경제권을 확고히 하고자 반공(反共)의 기틀을 적극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남한은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반공(反共)이 자유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가치가 되었다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북한 동포들을 공산(共産도배(徒輩)의 폭정에서 해방시킨다는 주장이었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남한 동포들을 친일파민족반역자 미제(美帝)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주장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경우, 43만여 발의 폭탄이 투하된 평양은 전쟁 후 건물이 단 두 채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산업 기반은 거의 초토화되었다그 이후북한은 미군의 폭격과 공습을 가장 무서워 했다. 1973년에 개통된 평양 지하철 승강장이 지하 100m-150m에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한국 전쟁은 사망과 실종 부상을 포함해서 600만명(남한 200북한 300중국군과 유엔군 100)의 인명 피해를 내었다. 당시 남북한 총인구 3천만명 중 대략 7명당 1 꼴로 죽거나 다쳤다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를 내었던 것은 한편으로 미국의 공습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이념 전쟁이었기에 서로에게 잔혹할 수 있었고 쌍방의 잔혹성에 대해서 비난할 뿐 자신들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다몇 차례에 걸친 전황의 반전과 2년여에 걸친 휴전회담의 장기화도 인명의 피해를 키웠던 중요 원인이 되었다남한의 경우개전 이후 15개월 동안의 재산 손실액은 20억 달러로 1949년도 남한의 국민 총생산액을 능가하는 것이었다한국 전쟁은 일본이 후방 보급기지의 역할을 하게 하여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게 하였고이는 일본 경제를 회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 한반도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백마(白馬)고지

 

지난 50년 전의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곳이 바로 백마(白馬)고지이다백마고지는 6.25 전쟁 전에는 흔히 395고지라고 불리던 무명고지였다그러나, 6.25때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백마(白馬)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이 고지는 ()이 엎드려 있는 모습과 같고전투 중에 극심한 포화(砲火)로 인해 민둥머리가 되어 하얗게 보였기 때문이다백마(白馬)고지는 철원평야의 중심에 있는 전술적 요충지로서피아(彼我쌍방간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 동안에 무려 30만발의 포탄이 낙하됐던 곳이며피아(彼我)간에 주인이 10일 동안 24이나 바뀌었다주로 낮에는 국군이 고지를 차지했다가 밤에는 다시 중공군이 고지를 차지했다이렇게 번갈아 무려 12번 즉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중공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과 우리 국군 9사단은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매우 치열한 사투(死鬪)를 벌였다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3개 사단 중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으며우리측 국군 제9사단은 3천 4백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를 사수했다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백마 고지 전투는 단기간의 지역 전투로서는 세계 전쟁사 중 유례가 없는 가장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국군은 이 고지에서의 승리로 넓은 철원평야의 요충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휴전회담에서 UN군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한편북한 김일성은 이 백마고지를 빼앗기고 나서 3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백마고지는 경기도 철원군 대마리(大馬里)에 위치해 있다대마(大馬)란 보통 바둑판에서 많은 점으로 자리를 널리 잡은 말을 일컫는다대마(大馬)가 잡히면 바둑판에서 지는 것이며 대마를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그런데 한반도를 바둑판으로 해서 시작했던 싸움의 최대 격전지가 다름 아닌 바로 대마리(大馬里)의 백마(白馬)고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