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한국 전쟁과 노비 신분 해방
역사학자들은 한국에서 신분제가 완전히 사라진 시기를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보고 있다. 1950년 6.25 전란(戰亂) 중에 다들 피난가고 난리였다. 양반. 양민. 노비 전부 피난 갔다. 그리고, 전쟁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노비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신분제 자체가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다. 최초의 신분제 폐지는 1894년 동학(東學) 혁명을 통해 이뤄졌다. 1894년 갑오 개혁 이후,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일반 사회와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로 바뀌진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이러한 신분제를 통치에 이용했다. 그 시절 양반들 중에는 노비를 사람 취급도 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평 운동이 괜히 일어났던 것이 아니다. 어차피 노비들은 돈이 없으니 갈 곳도 없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은 갈 길이 없기 때문에 계속 양반들의 머슴살이로 많이 남아 있었다. 마을의 폐쇄성 때문에 신분제 폐지는 명목에 불과했다. 배우지도 못하고 조상 대대로 노비로 살던 사람들이 국가에서 '이제 노비 없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 리가 전혀 없었다.
신분제 잔재가 아예 송두리째 싹 날아가는 것은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신분을 해방해 놓아도 어차피 약자의 인생은 힘든 경제 상황의 연속이었다. 미국 흑인도 노예 해방해도 당장 나아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분제 폐지했다고 무슨 세상이 확 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법제가 바뀌었을 뿐이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심했고, 양반들 보다는 오히려 일반 양민들이 분노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갑자기 천민들과 같아졌다는 느낌 때문이다. 땅 없이 소작농으로 사는 양민의 경우, 법적으로는 양인이어도 부잣집 노비 보다 못한 처지였다. 양반들은 녀전히 돈이 많았고, 실질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이 매우 막강했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을 건드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신분은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사회적 인식은 여전했고, 무엇보다 노비였던 사람들 역시 경제적으로 양반 지주들에게 종속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특별히 크게 성공하거나 재산을 축적한 노비 출신이 아닌 이상, 재산을 가진 양반 지주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잔재는 일제(日帝) 시대 때까지 계속 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양반 지주 밑에서 종속 상태에 놓인 노비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후, 1950년 6.25 한국 전쟁으로 터지면서 한반도 전체가 뒤엎어졌다. 그러자, 그토록 뿌리 깊었던 신분 제도의 잔재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1950년 6.25 전란(戰亂) 중에 다들 피난가고 난리였다. 양반. 노비 전부 피난 갔다. 피난길에서 본인의 출신은 이제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노비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비들은 피난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 2017년 12월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이란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2010년대 들어서 다시 쓴 한국전쟁 서적이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했고,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약3만 6천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체계적인 억압과 검열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빠져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움에 떨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위험이 뒤따랐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소련의 핵개발로 인하여 미국 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국전쟁에 큰 장애물 없이 참전할 수 있었다. 매카시즘 덕분에 미국은 한국전쟁 반대ㅊ세력을 크게 형성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 사람들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서 미국의 벌인 만행과 1945년 남조선에 들어온 미군정이 저지른 만행이 미국 내에서 크게 논쟁 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북한 초기 내각 거두들의 항일 무장 투쟁을 잘 재조명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주류 정치 세력들은 만주 항일 무장 투쟁 세력들로 구성된 반면 남한의 주류 정치 세력들은 대체로 친일파들이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친 북한은 친일파들을 어느 정도 처벌했던 데에 비해 남한은 친일파들을 하나도 청산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은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문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의 미군정은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킨 후, 친일파들을 앞세워 각종 노동자 농민 투쟁을 피로 물들이고, 대구. 제주도. 여수 순천을 피바다로 물들였다. 그 후, 발생한 한국 전쟁은 민간인 학살로 얼룩져 있다. 한국 전쟁 초기 남한 이승만 정부에서 벌인 최악이 민간인 학살인 보도 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학살됐다.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람이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숫자를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한국 전쟁 시기에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은 한 몇 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다만, 인민군의 학살은 국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어느 정도 기준이 있었다. 2000년대 만들어진 진실 화해 위원해의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고 한다. 예를들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하여 전부 1100명을 살해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 회원들이었다. 반면, 진실 화해 위원회에서 조사한 국군 학살에 의한 시신을 수천구 찾아냈는데, 이중 10살 미만의 어린이 시신도 수십 구씩이나 발견되었다.
미군은 한국군의 노골적인 학살을 방치했고,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대상을 포로로 잡아 학살을 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무차별 폭격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50만 3000톤이었다. 이중 20만 톤은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그러나, 1950-1953년까지 미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면서 퍼부은 폭탄의 량은 63만 5000톤이다. 북한에 쏟아 부은 네이팜 폭탄은 3만 2000톤이고, 이것들을 모두 다 합치면 66만 7000톤이 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 보다 북한에서 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북한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된 반면, 북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된 정도는 90퍼센트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미국은 북한을 폭격하며 북한이라는 땅을 ‘달의 표면과 같은 땅’으로 만들었다. 책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서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와 같이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나 견해에 반대하여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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