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공갈

마음을 훔쳐서 도둑질하는 로맨스 편지

마도러스 2019. 9. 3. 09:06


■ 마음을 훔쳐서 도둑질하는 로맨스 편지

 

● 파병 끝나면 한국서 결혼”, 마음 앗아간 금발 여군의 연애 편지

 

미끼에 낚이는 순간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신이 나를 지켜줬어요우리 부대에서 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내 부상은 크지 않아요당신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예요당신이 나를 사랑해줘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었어요.”

 

3년 전의 편지이지만, A씨는 아직도 그녀의 이메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A씨 심경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분하기도 하지만한편으론 부끄러운 듯 했다이야기를 이어가다 중간 중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창피스러워서 지금껏 어디에도 말을 못했다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이다그런데아직도 뉴스를 보니나처럼 당하는 사람이 있더라그래서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A씨는 로맨스 편지의 피해자다연애를 뜻하는 로맨스(romance)’와 신종 사기를 뜻하는 스캠(scam)’의 합성어가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연애 편지를 위장한 펜팔 연애를 하다가 나중에 돈을 뜯어내는 사기 수법이다. ‘신종이라기엔 꽤 오래된 수법이지만, ‘보이스 피싱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아 여전히 피해자가 양산되는 범죄이다영어 이메일로 이뤄지는 범죄의 특성상 영어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40대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주로 걸려든다이메일 몇 통 주고받았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거액을 보낼 수 있을까? A씨는 그 얘기를 들려줬다.

 

● 기댈 곳이 당신뿐이에요” 전쟁터에서 날아온 연애 편지

 

A씨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2016년 여름 채팅 앱 바두를 통해서였다멋진 서구 여성 사진이 프로필에 걸려 있어 혹시나 말을 걸었는데답장이 왔다이름은 아만다 엠버였다유엔 평화 유지군 소속 영국 간호 장교라고 했다아버지는 미군어머니는 나토군 소속 간호 장교라 자연스럽게 군인이 됐다고 했다.

 

화려한 미인이었지만사고 방식은 외모와 전혀 달랐다신앙심 깊은 기독교 신자로 자랐고아픔도 있었다그녀는 아버지는 내가 겨우 12살 때 이라크 전쟁에서어머니는 2019년 초 돌아가셨다고 했다그 때문에 좋은 남편 만나서 의지하고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A씨는 그녀에게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다하루에 여러 통의 메일을 주고 받았다그녀는 자신의 신분증이나 군부대에서 찍은 사진도 종종 보내왔다그녀는 당신 없는 세상은 색깔 없는 무지개라거나 영혼을 다 바쳐 사랑하겠다” 같은 말을 곧잘 했다유치하지만, A씨에게는 달콤했다원래 달콤한 말은 유치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군인이란 직업은 더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냈다어느 날그녀는 영국 런던 주둔지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파병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그 뒤, “낯선 중동의 전쟁터에서 기댈 곳이 당신뿐이란 메일을 매일 보냈다. “작전 중에 발생할 사망에 대비해 상속자 이름을 적는데, ‘미래의 남편’ 당신 이름을 적어냈다고도 했다. “이번 파병만 끝나면 전역하고한국에서 당신과 살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부상병들을 앰뷸런스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방탄복이 나를 살렸다혹시라도 내가 연락을 못해도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달라고까지 했다. A씨는 훈련작전 중인 군인이라 직접적인 연락이 어렵다고만 생각했는데상속자 이름에 나를 올렸다는 것에 감동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 용돈 좀으로 시작해 거액의 블랙머니 배송료 요구

 

그녀가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20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뒤였다처음엔 작전 지역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적당히 돈을 찾을 곳이 없다고 했다이런저런 경비 명목으로 1,000달러 정도를 보냈다그것도 별도 계좌 없이 받은 사람 이름과 비밀 번호를 매개로 이뤄지는 개인 대 개인 송금 시스템 유니온을 통해서였다명분은 내전 중인 시리아 상황이었다은행 등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니유니온으로 받는 것이 제일 편하다 했다.

 

액수가 조금씩 불더니한 번은 긴급 메일로 이색 제안이 들어왔다시리아에서 수색 작전을 하다가 동굴에서 숨겨둔 무기와 함께 달러 뭉치를 발견했는데그 가운데 일부를 대원들끼리 몰래 나눠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그러면서 내 몫은 500만달러(한화 60억원)”라고 했다.

 

이 때부터 독촉을 더 급하게 해 왔다. 500만달러를 일단 런던 보안 업체의 개인 금고로 빼돌리고영국에서 외교 행낭을 통해 다시 주한 미군 기지로 옮길 수 있다 했다그 비용을 요구했다망설이는 A씨에게 그녀는 런던 개인 금고를 당신 명의로 하겠다” “그 돈이 한국으로 옮겨지면당신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그 와중에 영국계 배송 회사 등에서 작성한 서류도 날아왔다. A씨는 통관비항공 수송비 등을 모아서 그녀에게 보냈다. ‘알베르라던 배송 회사 직원에게 따로 6,000달러도 보냈다돈 욕심도 났다. A씨는 솔직히 수십억이라 하니머리가 핑 돌더라고 말했다.

 

달러 가방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서울 중구 힐튼 호텔에서 자신을 외교관이라 소개하는 에릭 존슨을 만났다존슨도 돈 타령부터 했다그녀가 보낸 돈 가방이 미군 기지에 있는데그걸 빼내려면 1만달러가 더 필요하다 했다이 때만큼은 A씨도 거절했다그녀에게 사기 아니냐” 따지자, “나를 믿어달라한국에서 행복하게 살자는 답장을 받았다. A씨는 다시 존슨을 만나 1만달러를 건넸다그리고여행용 가방을 넘겨받았다.

 

● 잡고 보니 카메룬 난민, “그럴 리 없다는 피해자들

 

가방을 열어보니호텔 객실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소형 금고가 들어 있었다비밀 번호를 물어보자존슨은 또 말을 둘러대며 항공료를 추가로 요구했다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한 A씨는 그냥 금고를 통째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작업용 그라인더로 갈랐다금고 안에는 검은색 종이만 가득했다다시 연락한 이번에 존슨은 화학 약품 처리가 된 블랙머니라 특수 약물로 씻어내면검은 색이 벗겨지면서 달러가 된다세척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씨는 금고를 들고경찰서로 갔다국립 과학수사 연구원 감정 결과검은 종이는 그냥 검은 종이였을 뿐이다.

 

사건을 접수한 부산 경찰청은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경찰과 A씨는 다시 연락해온 존슨에게 블랙머니를 달러로 바꾸는 시범을 보여주면세척 비용을 내겠다고 역제안을 했다그러면서 사업 때문에 요즘 부산에 있으니부산으로 내려와달라고 유인했다담당 형사는 A씨의 친구인 척 약속 장소에 함께 나간 후외교관 존슨을 긴급 체포했다.

 

존슨은 외교관이 아니었다카메룬 국적의 난민모안지마마(48)였다. 2015년 08월 관광 비자로 입국한 뒤, “동성애자라서 본국으로 귀국하면 탄압받는다며 난민 신청을 해서 2017년 02월까지 국내 체류 자격을 부여 받은 상태였다모안지마마는 처음 경찰 조사에서도 동성애자라 A씨와 연애하기 위해 만났다는 소리를 해댔다하지만경찰이 수사를 진행시켜나가자 결국 혐의를 인정했다.

 

경찰은 A씨 외에도 피해자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녀 이름이 A씨에게 아만다 엠버였다면, B씨에겐 케이티 브라운이었고, C씨에겐 살라 엘레나라는 식이었다이름은 달라도 줄거리는 비슷했다모두 미모의 서구 여성 사진을 프로필로 썼고부모를 잃었고직업은 간호 장교였으며결혼하고 싶다고 했다유엔 평화 유지군으로 시리아에 파병됐으며거기서 의문을 돈다발을 구했다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군인’ ‘시리아 파병’ 등은 직접 연락 없이 돈을 뜯어대기 위한 설정이었다.

 

A씨 등 피해자들은 1억 3,000여만원을 잃었다이 돈은 나이지리아베넹영국미국 등으로 흘러갔다경찰은 서아프리카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로맨스 스캠’ (romance scam) 국제 사기단의 조직적 범행이라 결론 지었다검거된 모안지마마는 사기 및 사기 미수 혐의로 2017년 07월 징역 1년 6월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국제 사기 조직에 연루됐지만일선 수금책이라 형량은 그리 높지 않았다모안지마마는 만기 출소 뒤카메룬으로 추방됐다.

 

피해자들은 돈을 찾지 못했다. A씨는 잃어버린 돈 때문에 그리고 돈 보다 더 큰 자괴감 때문에 괴로워했다순간 넋이 나가 바보처럼 당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직업까지 바꿨다. A씨는 그저 나 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