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박정희의 성폭행과 비운의 여배우

마도러스 2018. 3. 22. 02:13


박정희의 성폭행과 비운의 여배우

 

[서울의 소리서울의 소리가 "박정희의 상습 성폭력에 한맺인 영화 배우 김삼화"라는 기사와 함께 2014년 월 12일 유튜브에 올린, ‘미국 거주 김현철 전 기자의 국회 언론 탄압 공대위 토론회 증언’ 유튜브 동영상이 2016년 06월 400만 조회를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2016년 06월 30일 팟빵 "새가 날아든다녹음실에서 화상을 통해 400만 조회 돌파 기념 인터뷰를 가진 김현철 기자는 "김삼화 씨가 발설하면 박정희가 나를 죽인다고 두려워해 취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취재 내용도 30년 세월이 흐른 후김삼화 씨 사망 후공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1980년대 미국 플로리다 한인회 행사에서 만난 김삼화를 직접 취재를 한 김현철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박정희의 상습적인 성탐욕의 희생물이 된 천재 무용가이자 영화 배우 김삼화씨는 평생을 '박정희가 무섭다"고 두려움에 떨며노이로제로 인해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현철 기자는 "영화 배우 김삼화의 기구한 사연 증언 영상이 400만 조회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박정희의 디테일한 여자 관계가 공개 되기는 최초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서 이기도 하지만박근혜가 이를 막으려고 이 내용을 퍼나른 네티즌들을 사법 처리 하는 과정에서 더 많이 알려진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철 기자는 MBC 서울 본사 기자 생활을 하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해 한국일보 시카고 주재 기자중앙일보 마이아미 지국장한겨레 마이아미 지국장 등을 지내다 은퇴 후미주 한겨레 저널을 창간해 언론 활동을 해오다 암 투병으로 활동을 접고 있다김현철 기자는 김영랑 항일 저항 시인 3남이기도 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가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 생활로 동료 선후배 배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운명의 여신은 이 여인의 행복에 샘이 났던지 행복한 이 가정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어느 날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採紅使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치한 분이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잠간 청와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하는 게 아닌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워낙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하고 애원했다.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남편과 만날 때 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순진한 여성이었으니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허나 각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이 통했겠는가!


잠간 다녀온다는데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 제작 스탭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궁정동 안가)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했다해쓱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였다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에 한 번씩 계속 채홍사가 찾아 왔다한 달이 지났다그간 체념 속에서 살아 온 남편은 이날따라 울상을 하면서 여보놀라지 마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어쩌지? ”하며 울먹였다.


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울고 또 울었다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고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그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따라가야 해날 찾지 마그게 당신도 사는 길이야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먼 훗날 다시 만나사랑해 여보!”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해 줄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목을 앞뒤로 흔들었지만내심은 각하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섞인 기쁨도 자리했다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그 노인은 결혼 후,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현재 75)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 시절을 회상하며현재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미국인 남편의 두 아들 등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그 후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최근유네스코 (UNESCO)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 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자기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일회 용품 내지 소모품으로 쓰던 2백여 명의 여성 (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여 명)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지 궁금하다이 점에서는 단연 박정희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할텐데 말이다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사살 당하던 1979박정희와 청와대에서 함께 살았던 장녀 박근혜의 나이는 27세였다아버지의 몹쓸 짓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박근혜 역시 아버지처럼 2백여 피해자들이 한낱 소모품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왜냐면, 40 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여자들을 한 분이라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사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아버지 박정희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던가박근혜가 사과할 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박정희에게 불려갔던 모든 여성들이 영광스러워 기뻐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의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어느 임금님 보다도 잔인했던 독재자의 딸이 어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언제쯤이면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대통령 될 자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서울의 소리입력: 2018년 03월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