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누가 조선(朝鮮)을 해방시켰는가?

마도러스 2016. 5. 8. 17:06


■ 누가 조선(朝鮮)을 해방시켰는가?

 

● 미군(美軍)과 연합군이 조선을 해방 시킨 것이 아니다.

 

누가 식민지 조선(朝鮮)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준 것일까일본의 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했을까미군(美軍)과 연합군이 일본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히 많다하지만실제의 진실은 무엇일까?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일본 패전 후의 한반도는 그저 일본의 영토로 남아있게 하려하였다조선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고독일이 패전을 거듭할 때일본의 패전 처리를 하기위한 카이로 선언에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하나 들어 있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을 위해 미국의 루스벨트(Roosevelt) 대통령영국의 처칠(Churchill) 수상중국의 장개석(蔣介石총통이렇게 3강의 지도자가 모였다미국이나 영국은 한국을 독립시킬 생각이 아예 없었다한국을 일본의 한 부속 국가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회담 중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갑자기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켰다왜 그랬을까중국 상하이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의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 호소를 받아들인 것이다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임시 정부가 중국내에 있어서 골치 아팠기 때문에 김구 주석의 만남 요청을 항상 회피했고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세계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당시 가장 놀란 사람은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었다. 1932년 0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대한 독립을 위해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장개석 총통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라고 칭송하며김구 주석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김구 주석은 당연히 대한 독립이라고 말했다이에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보호하고 광복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됐다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인정하고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에서 회담이 있기 전에 김구 주석은 장개석 총통을 만나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중국이 지지해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이에 장개석 총통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노력 끝에, 1943년 카이로 선언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특별 조항이 마련되었다.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단지, 2차 세계 대전의 일본 패전 처리를 위해서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을 뿐인데한국의 독립이 발표된 것이다더군다나 그때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의 독립을 희망하는 수백의 민족이 있었는데굳이 딱 꼬집어 한국의 독립만을 하나 추가하여 발표한 것이다결국, 1943년 카이로 선언의 특별 조항에 의거해서 대한민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김구 선생의 업적과 윤봉길 의사의 공로가 그래서 빛나는 것이다.

 

● 광복군(光復軍)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완전 탈환하려하였다.

 

중국 상하이에 설치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김구(金九)는 1934년 낙양(洛陽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하였다그리고중국의 중앙 육군 군관 학교에서도 조선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40년 09월 17일 김구 주석은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광복군(光復軍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지대장에 이준식지대장에 김학규지대장에 공진원지대장에 나월환이 임명되었다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설치하여중국의 산서성(山西省). 수원성(綏遠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招募工作)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08일 미·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對日선전포고를 선언하였다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그래서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설치공군(空軍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광복군(光復軍)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 전략 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 훈련을 실시하였다곧바로 1945년 0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들이 배출되었다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미국의 미국 전략 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공동 작전을 실시하고특무 공작원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 진공 작전을 수립하였다중국 산동 반도에서 특수 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국내에 상륙시켜서 조선 국토를 독자적으로 완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그러나국내 진공 작전은 1945년 0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일본의 항복을 개탄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현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전후(前後)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擴軍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미군정(美軍政당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결국광복군(光復軍)은 1946년 06월 해체되었다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 통한(痛恨)의 세월남북으로 분단된 조국


1910년 일제(日帝)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36년간 모진 수탈과 압박을 받다가 1945년 0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하지만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당시 미국(美國)과 러시아(Rusia)에 의해 남북(南北)으로 강제 분할 통치되었다그리하여 수많은 독립 운동의 뜨거운 열망과 수많은 독립 투사들의 조국(祖國)에 대한 자주 독립의 꿈들은 미국(美國)과 러시아(Rusia)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결국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함에 따라 조국(祖國분단의 비극(悲劇)은 영구 고착화되었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분단 체제는 남북한의 사회 발전을 저해하였을 뿐만 아니라동북 아시아의 평화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해 왔다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 상황이 빚어 낸 냉전(cold war) 구도가 동북 아시아에서의 냉전 질서를 만들었고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또한역으로 한반도의 분단이 동북 아시아의 냉전 체제와 세계 냉전 구도를 지속시켜 왔다.


남북한은 모두 국제 무대에서의 대립과 민주주의의 퇴보라는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겪었고특히 북한은 그 과정에서 권위주의적이고 사회 동원을 강조하는 정치 문화를 공고히 하였다이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워 왔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다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은 남북한 모두 적대적인 체제와 이념 경쟁에 의해 상호간의 불신과 대립 관계를 지속해 왔다.


결국미국(美國)과 러시아(Rusia)에 의해 강제 분할되어 남북(南北)으로 분단된 조국(祖國)은 민족적 차원에서 번영과 발전을 저해하였을 뿐만 아니라개인적 차원에서도 많은 고통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일천만 이산 가족들에게 혈육과 헤어지는 아픔과 망향의 한을 안겨 주었고민족 구성원 모두에게는 갖가지 생활의 불편을 가져다주었으며자유로운 활동을 저해하였다뿐만 아니라분단은 불필요한 경쟁과 군사적 대치자원의 분할 사용 등과 같은 막대한 민족 역량의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였다더구나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아래에서 장기화된 분단은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훼손하고나아가 민족사의 방향을 왜곡변질시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