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이순신 장군의 충의(忠義)와 절개(節槪)

마도러스 2016. 4. 28. 23:13


이순신 장군의 충의(忠義)와 절개(節槪) 

 

★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지극한 충성과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위인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웅(聖雄)이며, 임진왜란(1592-1598)년 중에 국가의 운명을 홀로 붙들었던 민족적 은인이다. 어떻게 이순신의 생애를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충의(忠義)와 절개(節槪)를 잃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으니, 그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 분의 업적은 더욱 더 높아만 보인다. 그는 제아무리 혹한 운명에도 굴복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꿈을 향해 씩씩하게 꾸준히 나아가면, 비로소 하늘이 손을 내밀게 된다는 강한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그는 할 수 있다는 신념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투철한 사명감으로 오직 나라와 조국을 위해 23번 싸워 23번 이겼다. 감히 누구도 쉽게 해 낼 수 없는 위업(偉業)임에 틀림없다.

 

★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전쟁 중 제2차 세계대전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과 그 가족들은 불만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일어나지도 않을전쟁을 대비해서 훈련을 너무 열심히 하고, 거북선(船)을 제조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1592-1598)은 물론 병자호란(1636-1937) 그리고 구한말(1897-1910)에 전라도 지역에는 유독 의병(義兵) 활동들이 많았다. 그런 분위기는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전라도 지역에 흐르는 ‘의리(義理)의 정신’일 것이다.

 

★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명량대첩(鳴梁大捷) 바로 전날인 1597년 10월 25일 내용을 보면,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라고 일러 주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1597년 10월 26일, 조선 수군 13척이 일본 수군 133척 대파. 아군 피해는 사망 2명 부상 3명, 적군은 1만2000여명 사상에 31척 격침, 92척 대파 기록을 세웠다. 세계 해전(海戰)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량대첩(鳴梁大捷)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치밀했고 철저한 준비와 점검을 통해 신기한 전략을 구사했지만, 그 이면에는 신조(神助)를 얻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전공을 세운 것이다.

 

★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1545년 3월 8일 서울시 중구 건천동 (현재,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의 삼남으로 탄생(誕生)했다. 태어날 때 어머니 변씨(卞氏)의 꿈에 시아버지(이백록)가 와서,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아이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이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남편에게 이 말을 고하고 이름을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忠武),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이해에 인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어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미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에 잔혹한 사화(士禍)가 중앙 정치 무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개혁과 수구, 훈구와 사림은 공존 못할 적대관계로 부딪혔다. 김종직, 조광조의 문하는 모두 도륙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산천을 유랑했다. 이순신이 태어나던 1545년에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있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 정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의 유년 시절은 가난했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주거를 옮겼다. 아산은 이순신의 외가 마을이었다. 이주 동기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서울에서의 생활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순신은 어려서 이웃 어린이들과 노는 데도 언제나 전쟁 놀이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반드시 대장이 되어 다른 아이들을 지휘했다. ★ 이순신은 22세 무렵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 28세 때에 훈련원이 주관하는 무과(武科) 별과 시험에서 낙방했다. 달리는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졌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으나, 곧 버드나무 껍질로 상처를 싸매고 태연해 했다.

 

★ 1576년, 이순신의 나이가 32세가 되었다. 이해 2월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무(武)의 길은 그의 청춘 시절을 일관되게 지배했던 꿈이었다.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에 권관(종팔품)으로 부임한다. 이순신의 최초의 공직생활은 육군 초급 장교로서 국경(國境)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동북면의 보(堡)는 여진족(女眞族)과 대치하면서 국경을 방어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이순신은 “함경도 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겼다. 초서체로 쓰여진 이 책은 지금 아산 현충사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매일 매일 진중일기를 쓰는 그의 기록 정신은 말년의 “난중일기”까지 이어진다.

 

★ 1580년, 이순신의 나이가 36세가 되었다. 전라도 고흥 발포진(鉢浦鎭)의 수군 만호(종팔품)로 부임했다. 최초로 수군(水軍)의 초급 지휘관이 되었다. 발포진(鉢浦鎭)은 전남 여수의 전라 좌수영 휘하 다섯 개 해안 기지 중의 하나였다. 1583년, 함경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이 되어 여진족(女眞族) 울지내 (鬱只乃)의 침입을 막아내어 공을 세웠다. 1586년,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로 전근했다.

 

★ 1587년, 이순신은 43세의 나이로 함경도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을 겸했다. 녹둔도는 함경도 경성군의 북쪽 끝 두만강 어귀의 작은 섬이다. 여기는 여진족(女眞族)과 대치했던 요새였다. 이 해 가을, 여진족은 대거 남침해 왔고 많은 피해를 당했다. 그러던 끝에 이순신은 혼자 싸워서 포로 60여명을 되찾아 왔고, 적장 율지내와 그의 무리들을 유인 작전으로 생포해 왔다. 그런데 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에 의해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전가(轉嫁)했고, 결국 이순신은 직위에서 해임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을 걷게 된다. 이 해(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큐슈의 시마즈 일가를 타도했다. 일본의 모든 무력과 영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인 권력 밑으로 집결했다. 1589년 연말에 이순신은 다시 전북 정읍 현감(종육품)에 임명되었다.

 

★ 1590년, 이순신의 나이가 46세가 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인사 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였다. 1590년 7월에 조정은 이순신을 함경도 고사리진(高沙里鎭)의 병마 첨절제사에 임명하였다. 사간원은 이 임명에 반대했고,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한 달 후에 이순신은 정삼품으로 승진되어 만포진 수군 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사간원은 다시 반대했고, 이순신은 또 부임하지 못했다.

 

★ 1591년, 이순신의 나이가 47세가 되었다. 이 해 2월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전라도 진도 군수로 임명했다. 사간원은 또 반대했다.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가리포 수군 첨절제사로 변경 발령했다. 사간원은 또 반대했다.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했다. 이 혼란스러운 인사파행은 조정 대신들간의 권력 투쟁과 당쟁의 여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정삼품)에 임명되었고, 전남 여수 좌수영에 부임했다. 좌수사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역 사령관이었다. 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이순신의 실력을 인정 받은 까닭도 있었지만 당시 중신(重臣)이었던 유성룡(柳成龍)의 천거가 많은 작용을 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부임한 뒤 많은 배를 새로 만들었고, 또한 거북선(船)을 제조하기도 했다. 이 해에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의 기미를 감지하고 있었다. 대마도주가 일본 정권 핵심부의 조선 정벌 계획을 조선 조정에 전했기 때문이다. 정보와 사실은 당파성의 입장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고 평가되었다. 1590년 3월에 보낸 통신사 3명이 파견되어 1591년 3월에 복귀했다. 황윤길이 정사였고, 김성일이 부사였고, 허성은 서장관이었다. 보고의 내용은 엇갈렸다. 황윤길은 일본이 곧 쳐들어 올 것이니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같은 대전쟁을 수행할 위인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었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었는데, 조정은 동인(東人)인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다.

 

★ 1592년, 이순신의 나이가 48세가 되었다. 4월 12일 여수 좌수영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실용화하여 완성했다. 이순신은 거북선(船)에 올라 총통을 시험 발사했다. 이 날은 날씨가 맑았다. 1592년 04월 13일에 전쟁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한 것이다. 이날 오후 5시께 일본 전함 7백여 척이 부산포에 내습했다. 04월 14일 왜군은 부산(釜山)에 상륙했다. 04월 15일 부산에서 2번째 전투인 동래성(東萊城)은 2시간만에 함락되었고, 동래 부사 송상현은 그 자리에서 순절했다. 04월 19일 김해가 무너졌다. 04월 28일 신립은 충주 남한강에서 대패했다. 조선군의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04월 30일 선조(宣祖)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향했다. 백성들의 야유를 받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비가 오는 캄캄한 밤, 임진강 앞에 도착하여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에 불을 질러 그 불빛 덕분에 선조(宣祖) 일행은 나룻배 5척을 찾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임진강을 건넌 후, 배를 불태웠다. 처음에 한양을 버리고 도망 갈 때에 수많은 관직에는 수많은 관료들이 호위 동행하였으나, 임진강을 지나면서 부터 슬슬 다 도망 가버리고, 나중에는 밥해 주는 사람 등의 몇 사람만 남았다.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떠나고 한성 수비군도 도망가자 백성들은 분노했다. 분노의 불길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은 경북궁창덕궁창경궁을 불을 질렀다. 노비 문서를 관리하던 장예원에도 불을 질렀다.


사실, 왜군(倭軍)은 이순신에게 해상 보급로가 차단당했기 때문에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았고 지쳐 있었다. 서울은 한양(漢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그리고 당시 서울에는 화약이 2만7천 근이나 저장되어 있었다. 한강의 대형 수송배들과 지형 지물을 잘 활용하고, 한강 북쪽에 군사를 배치하여 대처했더라면, 왜군의 한강을 쉽사리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고, 결국, 05월 02일 조선의 서울 한양(漢陽)이 함락되었다.

 

1592년 5월 4일, 전남 여수의 이순신 전라 좌수영 함대는 처음으로 제 1차 출정을 했다. 좌수영 함대는 동진했다. 5월 7일 경남 거제 옥포만에서 적선 26척을 전멸시켰다. 5월 8일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격파했다. 옥포만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었고 최초의 승전이었다. 대체로 이순신 함대는 적의 기지에 상륙하지 않았다. 또 상륙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치고 빠졌다. 육군의 지원이 없었고 적의 육군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진년을 일관한 이순신 함대의 기본 전술이다.

 

1592년 5월 29일, 새벽에 제 2차 출정을 했다. 이 출정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이 되었다. 경상 해안 쪽으로 출정한 이순신 함대는 경남 사천, 경남 통영 당포, 경남 고성 당황포, 전남 보성율포를 차례로 돌며 적선 70여 척을 부수었다. 이 적선은 그 포구에 정박해 있던 적의 거의 전부였다. 이 싸움의 공로로 이순신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이품)로 승품되었다. 5월 29일 사천 선창에서 교전 중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적진의 조총 탄환이 박혔다. 총알은 관통되다가 등쪽으로 박혀 버렸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렸다. 이순신은 활을 놓지 않고 계속 독전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칼 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내었다. 깊이가 두어 치였다. 사람들은 이순신의 상처를 보고 놀랐다. 이순신은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해 했다. 전쟁을 치루는 동안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상처가 곪아서 진물이 나왔다. 바닷물로 씻어내고 항상 뽕나무 잿물을 바르고 했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1592년 7월 6일, 제 3차 출정을 했다. 전라 좌수영, 우수영의 수군을 합친 전함 49척으로 발진했다. 노량해역에서 원균(元均)의 경상도 수군 7척이 가세했다. 이 싸움이 세계 전쟁사의 한 절정을 이루는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이다. 한산도 대첩은 견내량 싸움과 안골포 싸움으로 승리했다. 견내량은 경난 거제도 북쪽 하청면 앞바다이다. 안골포는 지금의 경남 진해시 안골동이다. 적의 함대는 견내량과 안골포에 숨어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적 앞으로 소수의 전선을 보내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며 도주하다가 한산도 앞바다에서 돌연 방향을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서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며 적선 47척을 포위하고 마침내 격침시켰다.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담대함이 작전의 성공을 담보해 낼 수 있었다. 안골포의 적들은 내항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는 종렬진으로 내항을 깊숙히 찔러 들어갔다. 여러 번의 파상 공격 끝에 안골포의 적선 42척도 모두 부수었다.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은 남해안의 두 물목에서 벌어졌던 국지전이었으나 그 전과는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을 통한 보급이 끊어졌고 퇴로가 막혔다. 적의 남해를 통한 서해 진입을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도충청도. 서해 바다를 지켜냈다. 반격의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서해를 통한 지휘 계통이 회복되었다. 7월 13일 싸움을 마친 이순신 함대는 여수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7박 8일의 전투였다. 이 싸움의 공로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

 

한편, 1592년 7월에 제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평안도 평양(平壤)을 점령하고 늘어 붙어 있었다. 선조 임금은 6월 22일부터 신의주에 있었다. 선조(宣祖) 임금은 신의주에서 가을, 겨울을 보냈다.


★ 1592년 04월 13일, 왜군(倭軍)은 일본 전함 7백여 척으로 부산포에 내습했고, 04월 14일 부산(釜山)에 상륙했다. 04월 15일 동래성(東萊城)이 무너졌고, 05월 03일 수도 한양(漢陽)이 함락되었으며, 06월 15일 평양(平壤)이 점령되었다. 하지만, 호남(湖南)에는 왜적이 들어오지 못 했다. 웅치(전북 완주 소양면과 진안 부귀면 사이의 모래재)와 이치(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호남의 의병(義兵)들이 중심이 되어 잘 막아냈으며, 바닷길은 이순신 장군이 지켜냈다. 전라도의 의병(義兵)과 관군(官軍)은 일본군의 진입 예상로로 확실시되는 웅치(熊峙)와 이치(梨峙) 두 관문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조선군은 목책을 세우는 등 수많은 장애물을 설치하고, 적의 예상 진입로의 좌우에 매복하였다. 전주성(全州城)을 이정란이 수호해 웅치를 넘어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냈다.


1592년 07월 07일, 웅치(전북 완주 소양면과 진안 부귀면 사이의 모래재)에서 결사항전을 결의한 의병과 관군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고 많은 적을 물리쳤다. 진안의 웅치 전투, 임실 관촌의 슬치 전투에서 잘 싸웠고 수적인 열세 때문에 수비는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왜군 역시 많은 병력을 손실했기 때문에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였고, 전주성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물러갔다. 그래서, 결국 전주성(全州城)을 잘 방어할 수 있었다.


1592년 07월 08일, 이치(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전투에서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과 동복 현감황진(黃進) 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 1500명은 왜군 2만여명의 격퇴하고 진입해 오는 일본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그 후, 왜군은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 이치 대첩은 군량미(軍糧米)의 현지 보급을 꾀하고자 했던 왜적의 전략을 차단하고 조선의 곡창지(穀倉地) 호남(湖南)을 방어해 낸 전투였으며, 조선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정면 충돌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 첫번째 전투였다. 이치(梨峙)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閑山島) 대첩, 권율의 행주(幸州)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다. 남원 출생의 황진(黃進) 장군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1590년 통신사인 황윤길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으며,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언동을 보고 장차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1592년 07월 이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1593년 06월 충청병마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9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장렬히 전사했다.

 

★ 1593년 01월 18일, 선조(宣祖) 임금은 의주를 출발하여 8월 18일 해주, 8월 27일 개성을 거쳐 10월 1일 서울 한양(漢陽)에 도착했고, 선조 임금의 환도(還都)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10개월이 걸렸다. 환도 행차는 전선의 진퇴를 따라 이동했으므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피난길에서 임금은 지방 관아나 지방 관리들의 집에 기거했다.


1593년 02월, 경기 고양시 행주(幸州) 산성의 권율(權慄) 장군은 크게 이겼다. 왜군(倭軍)은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에게 패배했었고, 북쪽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지원군으로 내려오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한편, 조선군(朝鮮軍)은 수도 한양(漢陽)을 탈환하고자 했다. 한양 탈환을 위해 행주산에 진출하여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조선군은 왜군 3만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그 결전지가 행주 산성이었다. 성(城) 안의 조선군(朝鮮軍)은 화차. 석포. 진천뢰(震天雷). 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군관민(軍官民) 및 남녀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며, 군사들을 도왔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3만 군사 가운데 2만 4천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조선군의 사상은 130명에 불과했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소식은 이순신 수영에 전해졌다.


1593년 07월 14일 이순신은 수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한산도는 적 수군의 서진(西進)을 막는 요충지였다. 한산 수영에서 이순신의 수영은 참혹한 식량난(食糧難)을 겪는다. 전쟁 중에 흉년(凶年)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흩어져서 군사를 모을 수가 없고 징집한 군사들도 제대로 먹이기가 어려웠다. 명(明)나라 군대는 싸우지 않고 행패만 부렸다. 명나라 군대가 마을을 드나들며 재물을 빼앗고 들판의 곡식을 빼앗아 가서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고을마다 백성들이 통분하고 있었다. 8월 1일 조정은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삼도(三道)의 수군을 총괄하게 하는 한편 전라 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했다. 그런데, 이 임명은 그해 10월 9일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전시에 최고 지휘관에 대한 인사 발령이 이처럼 늦게 전달되는 배경은 난해하다. 아마도 조정 내부의 당쟁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1593년에서 1594년에 이르는 2년 동안은 전쟁이 소강(小康)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2년 동안 흉년(凶年)이 들었다. 이 무렵은 너무도 참혹했다. “난중잡록”에는 그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 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 박고 빨아 먹었다. 힘이 없는 자들은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경남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었다. 참혹한 날들이 더 오래 계속되었다.

 

★ 1593년(선조 26년) 07월 16일, 사헌부(司憲府)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는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절상호남(竊想湖南) 국가지보장(國家之保障). 호남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라를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이 진중(陣中)에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호남 예찬론도 아니며, 단지 그것은 호남을 사수하지 않으면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순신은 군수 물자의 기지가 되는 전라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라도 해안은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다도해와 바다 물길을 품고 있다.

 

★ 1596년 왜군(倭軍)과의 화의(和議)가 깨졌다. 이듬해인 1597년, 정유년(丁酉年)에 그들은 다시 침략을 감행해 왔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 1592-1598)이다.

 

★ 1597년, 이순신의 나이가 53세가 되었다.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원균(元均)의 모함(謀陷)과 일본의 이간책에 의해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후임으로 원균(元均)이 임명되었다. 원균(元均)은 충무공이 애써 닦아 놓은 모든 기초를 엎어버리고 주야로 주색에 빠졌다. 이순신은 서울로압송(押送)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왜군 선봉장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하옥(下獄)된 후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다행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간곡한 반대로 사형을 면했고, 한 차례 고문을 받은 후, 아무런 혐의가 없어 석방(釋放)됐다. 4월 1일 출옥해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죽을 때까지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04월 13일 백의종군의 남행 길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했다. 이 때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남쪽 길이 바쁘니 다만 부르짖으며 울을 뿐이었다. 어서 죽기를 바랐다." 7월 16일, 원균(元均)의 함대는 칠천량(漆川梁) 해전(海戰)에서 참패했다. 조선 전함 3백척 이상이 깨어졌고 삼도 수군은 전멸되었다. 원균(元均)도 전사했다. 한산 통제영은 궤멸되었다. 칠천량 해전은 바다에서는 원균(元均)이 지휘했지만, 작전을 기획하고 강행한 사람은 도원수 권율(權慄)이었다. 이 참패의 전술적 책임은 원균(元均)에게 있고, 전략적 책임은 권율(權慄)에게 있고, 정치적 책임은 병조판서와 임금에게 있을 것이다. 7월 23일 조정은 모친상 중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해군을 소생시키는 길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임명 교서는 8월 3일 남해안을 정찰 중인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이순신이 다시 부임했을 때 남아있는 배는 겨우 12척뿐이었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저하되어 있었다. 수군의 상황은 이제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임금과 조정에서는 배 12척 가지고서는 도저히 적의 수군과 대항하기 힘들다라고 판단하여 이순신에게 육군(陸軍)에 합류하라고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남았으니, 잘하면 적의 진입을 막을 수 있다.” 라며 임금을 설득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왜군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임금과 조정을 설득했다.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를 표하며 다가오는 전투를 기다렸다.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鳴梁) 해전(海戰)에서 ‘울돌목’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잘 이용하여 크게 이겼다. 적들은 명량 해로를 지나서 서해안으로 진공하는 수륙 합동군이었다. 이 싸움에서 적선 33척이 깨어졌고, 나머지 170여척은 도주했다. 명량해전이 있기 바로 하루 전날 밤, 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라고 병법을 미리 알려 주었다. 이 싸움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의 국면 전체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적들은 서해를 우회할 수 없게 되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군사도 꼼짝을 못한다.“ 라고 말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인해 이순신은 해상권(海上權)을 다시 장악하게 됐다. 10월 14일,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李葂)이 충남 아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戰死)했다. 난중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간담(肝膽)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천지(天地)가 어둡고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禍)가 네 몸에 이른 것이 아니냐?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었을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 오직 통곡할 뿐이다. 어두운 밤을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이날 밤 9시경에 비가 내렸다. 10월 29일 수군 진영 본부를 다시 전남 목포 앞 고하도로 옮겼다.

 

★ 정유재란(丁酉再亂 1592-1598) 때에 칠천량(漆川梁) 해전(海戰)에서 원균(元均)이 패배함으로써 다시 일본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왜군은 경상도를 점령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북도 남원(南原)으로 향했다. 남원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 오는 관문이었는데, 1597년 08월 13일 전투가 시작되어 4일간 지속됐다. 4,000여명의 병사가 왜군 5만 6,000여명의 군사를 막아내야 했다. 이 싸움에서 남원성을 지키던 군관민 1만여명이 남원성과 운명을 같이했다. 전라북도 남원(南原)의 만인의총(萬人義塚)은 이렇게 정유재란 때에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1만여명의 유해를 봉안한 곳이다. 남원은 춘향(春香)의 순결의 정신만 있는 곳이 아니다. 1만여명의 충절(忠節)이 살아 있는 곳이다.

 

★ 1598년, 이순신의 나이가 54세가 되었다. 왜군(倭軍)은 점점 곤궁에 빠졌고, 명(明)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 화의(和議)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2월 17일 수군 진영 본부를 다시 전남 완도 고금도로 옮겼다. 7월 16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이끄는 수군 5백여척이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11월 19일, 이순신은 경남 하동 노량(露梁) 해전(海戰)에서 철수하는 적의 주력 함대와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고, 부하 장수들은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했고,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후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 날로써 드디어 전쟁은 끝났다. 이순신은 6년 후인 1604년, 선무 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 부원군에 추봉됨과 동시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년 후인 1613년,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43년 (인조 21년) 3월28일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졌다.

 

★ (明)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이순신을 평하면서 “하늘을 날로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로를 가졌다.” 라고 평했다. 또한 적국인 (倭)의 학자 도쿠토미(德富)는 이순신의 전사(戰死)를 평하면서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조선 전쟁의 전후 7년 사이에 조선에 책사(策士), 변사(辯士), 문사(文士)의 부류는 많았지만, 전쟁에 있어서 오직 한사람 이순신을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전쟁에 있어서 비단 조선의 영웅일 뿐아니라 3국(조선, 중국, 일본)을 통틀어 실로 제일의 영웅이었다.” 라고 평했다.


★ 이순신(李舜臣장군은 23번 싸워 23번 이겼다그 비결은 바로 침착(沈着)이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한 왜장(倭將) 와키자카(ワキザカ)는 한산도(閑山島) 대첩 패배의 충격으로 6일 굶으며, 이렇게 말했다.나는 성급(性急)했고, 적장(敵將)은 침착(沈着)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單純)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緻密)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순신(李舜臣)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전혀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승리를 거둔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와 비슷할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한산도 해전의 이순신은 여느 조선의 장수와 사뭇 달랐다. 나는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몇 날 며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전쟁에 계속 임해야하는 나는 앞으로 장수로서 본연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또한그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자도가장 미운 자도 이순신이다가장 좋아하는 자도흠모하고 숭상하는 자도 이순신이다가장 죽이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며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 또한 이순신이다


★ 이순신은 죽어서도 영웅이었다. 일본 해군(海軍)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해전에서의 병법을 연구했다. 그래서 먼 훗날 청.일 전쟁(1894-1895)과 러.일 전쟁(1904-1905)에서 승리를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함대의 함장은 러시아 발틱 함대와 싸우러 출정할 때, 먼저 이순신 영혼에게 도움을 청하고 승리를 안겨줄 것을 빌었다고 한다.  

 

★ 임진왜란(1592-1598)년 중에 1594년은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흉년이 들어 군량미도 떨어져 매우 참혹했다. 그 당시, 이순신이 수영 한산도(閑山島)에서 부른 “한산도의 노래”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적혀 전해진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呼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임진왜란 및 교회 역사의 불편한 진실

 

▶ 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k1gbWRhTV34

 

임진왜란(壬辰倭亂), 1952년 04월 13일, 기독교 군대가 처음으로 조선(朝鮮) 땅을 침략하던 날이다.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25만 왜군(倭軍)의 10%, 일본군 총수의 대부분은 기독교 원정대 즉 기리시단(吉利支丹)이었다. 조선인의 와 를 베고, 살 가죽을 벗기고, 인육을 먹던기리시단(吉利支丹)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조선 땅을 행군했다. 7년간의 임진왜란 전쟁은 (神)의 이름을 가장한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기독교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신학 교수 김인규. 성결 교신 학교 논문). “임란(壬辰倭亂)은 주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일본 기독교(基督敎)를 지켜낸 승리의 역사이다.” (일본 관구장 고메즈의 비서 프란시스코 파시오. 1598 일본보).

 

유럽의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1,096-1,272)은 유럽 전역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여호와 주님을 믿지 않는 자, 모두 처형하라!” 십자군에게 지급된 면죄부는 천국(天國) 보장권과 경제적 보상이었다. 무차별 살상에 대한 그들의 죄의식은 오직 주님만이 용서하셨다. 이 후, 로마 제국의 역사는 기독교 선교를 구실삼아 각 지역의 민족 전통 말살과 횡포폭압강간살인 등을 일삼는다. 이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아편 시장 확보를 목적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朝鮮) 상륙을 시도하였다. 1846년 식민지 개척의 도구로 프랑스 선교사 함대가 진입했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에서 총칼을 들고 행패를 부리던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로 둔갑되었다. 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부친 남연군 묘지 도굴 사건에 선교사들이 앞장섰다.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미일 협약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에 기독교 선교 자유를 보장하는 열강의 국제적 음모였다.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 보호를 받으며 친일 제국의 기독교는 번성의 꽃을 피웠다.

 

1985년 서울시 단군(檀君) 성전 건립을 기독교 목사들이 반대했다. 1980년 이후에는 단군(檀君) 동상의 을 자르고 장승 파괴 및 불상 파손의 만행을 저질렀다. 2007년 보수 기독교 뉴라이트는 민족 역사를 말살한 역사 교과서를 발간했다. 2008년 기독교 목사와 그 신도들은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을 파손했다. 그들이 말하는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거주하며 당신의 모든 행동을 매일 낱낱이 지켜 보고 있습니다. 이 투명 인간은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특별한 죄의식 목록을 갖고 있죠. 만약, 당신이 10가지 중 한가지라도 지키지 않으면 고통과 고뇌로 가득찬 아주 무서운 지옥(地獄)에 당신을 떨어뜨려 숨막힘. 화형 등으로 비명과 눈물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시며 항상 돈(Money)이 필요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신 그분도 (Money)은 어찌 못하십니다.” (조지 칼린의 기독교 풍자).

 

기독교는 종교 장사(壯士)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세금도 내지 않지만,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사상 최고의 공공연한 끝내주는 거짓말입니다. “설교 시간 처음부터 졸기 시작해서 축도할 때 정신이 드는 성도! 헌금은 준비 않고 지갑 속에서 천원짜리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자! 이런 믿음은 주님이 원하지 않죠. 예수님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헌금 천원짜리 믿음은 주님이 원하지 않죠!” 그렇다면, 그들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땅 가운데 있는 모든 불교 사찰이 무너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2007년 6월 4일 부산 기독교 청년 연합회). “믿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의 자식이라 하는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네들의 신(神)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법정 스님). 잔인한 역사. 거대한 음모. 이 땅의 기독교! 그 불편한 진실.

 

■ 이순신과 독실한 크리스챤(christian)

 

★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왜군(倭軍) 제1군 대장 고니시(こにし) 장군은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小西 行長)는 조선 땅을 밟은 후, 종군 신부(神父)를 데리고 행군했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서울시 절두산 순교(殉敎) 성지에 오다 쥴리아(Ota Julia)의 묘지가 있는데, 그녀는 조선(朝鮮) 왕족(王族)의 왕가 딸로 태어나 왜군(倭軍) 고니시(こにし) 장군에게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일본 천주교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바꾸었다. 그녀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605-1637년에 걸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천주교 박해 시대에 고오즈시마(神律島)섬에 유배당했고 그곳에서 절명했다.

 

일본은 천주교가 1549년부터 도입되었는데, 임진왜란(1592-1598) 전(前)인 158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 갔던조선인 포로(捕虜)는 약 5만 명 정도였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가정의 노비(奴婢)가 되거나 노예(奴隸)로 팔려갔으며, 멀리는 마카오. 마닐라. 인도 및 이태리에까지 끌려갔다. 임진왜란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잡혀 간 많은 조선인 포로(捕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즉 기리시단(吉利支丹) 개종자가 나왔으며, 조선인 포로 중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가 7천여 명이나 나왔다. 뒷날 포로 중의 일부가 귀국하였을 때 그 일부는 조선에 돌아와서도 은밀히 신앙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순교(殉敎)에 이른 사람도 있다.

 

★ 다음은 “독실한 크리스챤(christian)”의 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순신하면 무조건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믿는 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합니다. 과연, 이순신이 고니시 장군(왜군 1군 대장) 보다 주님 앞에 떳떳할까요? 고니시(こにし) 장군은 왜군 중에서도 독실한 크리스챤(christian)이었습니다. 그의 수하 군대는 늘 십자가 군기(軍旗)를 높이 들고, 조선의 전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조선군과 맞섰습니다. 이순신은 어떠했나요? 이순신(李舜臣)은 우리 주님의 군대 입장에서 보면 불신자요, 적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이순신(李舜臣)하면 무조건 영웅으로 존경합니다. 그가 과연 주님을 알았을까요? 믿음이 있었을까요? 그는 불신자(不信者)였으며, 주님 주자도 모른 지옥(地獄) 권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솔직해야합니다. 우리 나라 장군이라고 무조건 존경합니까?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용감하게 조선(朝鮮) 전장(戰場)에서 고귀한 희생을 무릅쓰고 피흘려 싸우신, 비록 왜군이셨지만, 참 주님의 종이셨던 고니시(こにし) 장군이 어떤 분이셨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고니시가 비록 왜장이지만, 순교(殉敎)로써 피를 흘리러 왔는데, 저희 조상들이 그에게 칼을 들이댄 것은 잘못한 것이죠!”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과연 그랬을까? 항상 주님 이름으로 전투에 임한고니시(こにし) 장군은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한번도 주님을 찾지 않은 이순신은 항상 승리했다.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지옥(地獄) 갔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웃기다. 이순신 장군은 정말 지옥 갔을까요? 어이가 없다. 그러면, 왜군(倭軍) 1군 대장 고니시(こにし) 장군은 예수를 잘 믿어서 천당(天堂)에 갔을까?

 

★ 유럽 기독교인의 십자군(十字軍) 원정 때에는 인육을 먹었다. 산 사람을 불구덩이에 던져서 구워먹고, 어린 아이 시체를 나무 꼬챙이에 꽂아서 구워 먹었다. 그런 악마(惡魔)가 없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 카톨릭 교회는 사회 불안이나 종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12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마녀(魔女) 사냥을 했다. 교회 신앙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녀 취급했다. 900만 명 이상을 고문했고, 교수형에 처한 다음, 불에 태워 죽였다. 마녀는 대개 여성이었으나 남성인 경우도 많았다.

 

★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은 1801년 청(淸)나라 북경 주교에게 밀서(密書)를 보냈는데, 그들이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해 수백 척의 군함과 군사 5-6만 명을 조선(朝鮮)에 파병하여 조선을 정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조선 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


■ 중국 장웨이린 교수의 이순신에 관한 평가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일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장웨이린 교수는 어느 날강의실에서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패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위인이 만약에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다제갈공명손자관우여러분들이 생하는 그 어떤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


나는 이순신(李舜臣)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알고 나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나라에 이순신과 같은 장수가 있었더라면중국은 일본 제국과 서양 열강에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었다모두들 의아해 했다. “400여년전 조선과 일본의 전쟁 때에 조선을 구한 이순신(李舜臣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웅이다!” 라고 나는 감히 여러분께 말할 수 있다.

 

여기 저기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조선 수군(水軍장수 이순신(李舜臣)은 5천명도 안 되는 군사와 50척도 안 되는 함대를 이끌고40만 왜군과 1,300대의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23번 싸워 23번 모두 승리했고결국 조선을 구했다당시 일본군은 100년의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싸움의 고수들이었고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조선(朝鮮수군은 물고기나 잡고 농사나 짓던 나약한 병사들이었으나이순신(李舜臣)은 단 1년만에 강하게 훈련시켜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만일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당시 (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의해서 이토록 역사의 큰 줄기가 뒤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여기 거북선을 보라누가 이 배가 400여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여러분들은 눈을 떠야한다


그는 1시간 정도 더 이순신(李舜臣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쳤다강의가 끝났을 때학생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했다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그가 처음 이순신(李舜臣)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감정을 그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2002년부터 중국 동북쪽 변경 지역의 국경 변방에서 전개된 모든 고대(古代)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바로 그 때, 장웨이린 교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으로 고구려(高句麗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 시키는 일을 맡았다가 '이순신(李舜臣학술회를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 편입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그리고그는 말했다역사 학자가 후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2가지 부끄러움이 있다하나는 히틀러(Hitler)가 200만 유대인을 죽인 것 보다 그 역사를 감추며 숨기는 것이고또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위인(偉人)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이 당신에게 주는 11가지 충고

 

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32살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奧地)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4)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47살에 해군 제독이 되었다.

7)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23번 싸워 23번 이겼다.

8)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빼앗기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9)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12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

     나는 20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전쟁터로 나섰다.

11)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적(敵)은 사각사각 엄습하고, 선조(宣祖) 임금은 보채고,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은 의심하고, 세월은 차갑고, 군사력은 빈한하고, 백성은 울며 자맥질할 때, 이순신(李舜臣)은 밤새워 뒤채이며 전전반측했다. 선조(宣祖) 임금의 끝없는 의심에도 힘겨워했다. 당쟁과 문약에 빠진 조정(朝廷)이 남쪽으로 보내는 얄팍한 술수를 그는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그는 남해 밤 바다에 오롯이 서있었다. 가슴속 칼날이 쉴 새 없이 징징 울어댔다. 몸에 와 닿는 전쟁의 채찍질에 온 몸의 상처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푸르스름한 그의 눈빛은 서늘했고, 그의 조국(祖國)은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그는 역사상 유례없는 '일기 쓰는 남자'였다. 솔직하고 꼼꼼한 필체는 망국(亡國)의 위기에 처한 소용돌이를 꾸밈없이 증언했다.


구국(救國)의 영웅이 가슴속에 간직한 속내가 가감 없이 일기에 실려 있다. 상급자 권율(權慄) 장군과 갈등하고 경쟁자 원균(元均)에게는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주도 면밀의 군인(軍人) 정신은 단 한번의 전투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다. 그는 결국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나라와 왕조(王祖)가 침몰할 위기를 수습해 놓고 자신의 죽음을 정치적 완결 행위로 마무리 짓는다. 사신(死神)이 오가는 거친 길목에 일부러 자신을 노출시켰다. 살아남은 자신이 남해 바다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닥치게 될 정쟁의 소용돌이를 예견했다. 장군은 애당초 그 싹을 잘라 버리는 결단을 내렸고, 죽음으로 결행했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의 가슴을 관통하는 무(武)의 정신은 수백 년이 흘러도 지금 남해 바다에 절절하다. (김훈 '칼의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