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 부인의 불륜 탓에 가려진 순수 열정
퀴리 부인으로 널리 알려진 마리 퀴리(Marie Curie)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867년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강제 점령 아래 있었고, 물리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러시아의 탄압으로 교수직을 얻지 못해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16세에 러시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과는 달리 성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교사로 일해야 했다. 그리고 1891년 비로소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다. 여성 과학도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 곱지 못했던 시절, 마리(Marie)는 대학에 입학한 지 3년 만인 1894년 물리학 및 수학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동반자인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만났다.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는 프랑스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홀로 자유롭게 공부를 했다. 19살 때 연인을 잃은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사랑은 벼락같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5살의 늦은 나이에 마리 퀴리(Marie Curie)와 사랑에 빠졌다. 마리 퀴리(Marie Curie)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이민자였고, 1894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 물리학과 분야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여성이었다. 그들은 1년간의 열애 끝에 1895년 결혼했다.
마리 퀴리(Marie Curie)는 우라늄 보다 강한 방사능을 배출하는 방사능 물질을 1898년 발견했고, 이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Po)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902년에는 또 다른 방사능 원소 '라듐'(Ra)을 발견했다. 1903년 마리 퀴리(Marie Curie)와 그녀의 남편은 라듐(Radium)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4년 남편은 소르본 대학 이학부 교수가 됐고, 마리 퀴리(Marie Curie)는 실험실 주임으로 취임했다. 마리(Marie)도 교수가 될 수 있었지만, 당시 과학계에서는 여성을 교수로 임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는 3년 뒤인 1906년 04월 19일 저녁, 연구 주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마차를 보지 못해 그만 47세 젊은 나이에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말았다. 남편을 잃고 난 후, 마리 퀴리(Marie Curie)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이다"
마리 퀴리(Marie Curie)는 남편이 죽은 후,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프랑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0년, 마리는 혼자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 라듐(Radium) 물질 분리에 성공하고, 이 공을 인정받아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 화학상을 가슴에 안았다. 마리는 두 번에 걸쳐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여성 과학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마리(Marie)는 딸과 함께 'X선 사진'을 실용화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녀는 X선 사진 촬영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갔다. 의사인 언니와 함께 이동 차량에 X선 촬영기를 싣고, 이동 방사선 의료반을 조직해 활동했다. 병사들의 뼈 사이에 깊숙이 박혀 있는 파편도 X선으로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전쟁터의 포화를 뚫고 X선 장비를 실어온 용감한 과학자 마리(Marie)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전쟁의 희생자는 훨씬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Marie)는 곧 전쟁터의 작은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된 방사능 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 후유증 때문에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그녀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도 연구를 쉬지 않았지만, 끝내 백혈병으로 1934년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딸과 사위는 인공 방사능을 발견하여 1935년 부부가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다.
마리 퀴리(Marie Curie)가 발견한 라듐(Radium)은 오늘날 암의 방사선 치료에 쓰이며,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하지만, 마리(Marie)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훗날 떠들썩했던 불륜설로 인해 그녀의 순수했던 열정은 여러 차례 희석되었다. 마리 퀴리가 노벨 화학상을 받은 1911년, 한 신문에서는 그녀와 프랑스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이 연인 관계라고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남편 사후 혼자였지만, 랑주뱅은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게다가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가 아끼던 제자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랑주뱅(Langevin)에게 아내와 어떻게 헤어질 것인지에 대해 상담하는 마리(Marie)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가정 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녀는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라듐(Radium) 제조 방법을 개발했으나, 특허를 내지 않았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학자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이며, 그 누구도 이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마리 퀴리는 지속적인 방사능 노출로 인해 1934년 백혈병으로 숨졌다. 이 때, 아인슈타인(Einstein)은 이렇게 애도했다. "유명한 사람들 중에서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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