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역사.문화

민족 반역자 처단의 모범 사례

마도러스 2015. 8. 21. 16:14


민족 반역자 처단의 모범 사례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줘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은 36년간 식민 지배를 당했어도 단 한명의 민족 반역자도 처형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드골(de Gaulle) 정부는 민족 반역에 참여한 수많은 언론인을 처형했다. 그들은 처형당하며, “난 아무 일도 안 했다” 라고 항변했다.

 

프랑스를 역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반역자 패탱을 재판하는 재판정에서 검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15만여명의 프랑스인 인질이 나치에 의해 총살당했고, 75만 여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독일 군수 공장에서 노동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돼 갔다. 11만여명의 프랑스인이 정치적 이유로 나차 집단 수용소에 유배됐다. 12만여명은 인종 차별 정책에 의해 나치 강제 수용소에 이송됐다. 피고는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조국에 귀환했는지 아는가? 단, 1500여명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숙청 위원회가 출판계의 숙청 방향을 바로 잡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 독일과 흥정해 얼마나 많은 돈을 불법적으로 벌였고 부당 이익을 취했냐에 관한 재정 문제 보다 출판한 단행본이 얼마나 애국적이며 얼마나 나치 독일에 협력하고 봉사했는가 등을 기준으로 숙청 대상 출판사를 색출하기로 결정했다. “민족 반역 행위를 법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멘트나 가죽을 적에게 팔아 단순히 돈 버는 것 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프랑스는 1944년 해방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민족 반역자의 처리부터 서둘렀다. 그 일이야말로 민족 부흥과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50여년 간을 그들은 일관되게 당시의 민족 반역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처벌할 수 있었던 근거는 1964년 12월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전쟁 범죄에 관한 시효 제거를 규정한 법률'이라는 소급 입법에 의한 것이다. 해방 후 20년이라는 세월로도 모자라서 아예 시효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게 처형 당한 반민족 행위자 수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만 무려 11,200명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처형된 숫자이며, 비공식적으로 즉결 처분이나 약식 재판을 통해 처형된 사람이 무려 12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약 1만명에게는 강제 노역, 약 3천명에게는 중노동 무기형, 약 4만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각각 선고했다. 총인구의 3-5%가 나치 협력의 죄값으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

 

특히 언론에 대한 조치는 더욱 엄격했는데,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4년 동안 나치에 협력한 신문은 즉각 폐간 조치를 하고 신문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언론에 대해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은 이들이 신문을 통하여 독일의 정책 수행을 도왔고, 대중의 여론을 오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벌을 면한 신문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지 등 3개 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 점령 기간 중 자진 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다. 언론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언론인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했는데, 독일에 협력하였던 수많은 언론인들이 처형당했다.

 

드골(de Gaulle) 총리는 프랑스 해방 직후, 파리 숙청 재판소에서 나치 협력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 반역자의 심판대에 올림으로써 반역자 대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간단하게 잠재웠다. 전쟁 전에 기회주의적으로 반 나치였다가 독일이 점령군이라는 강자로 등장하자 나치 독일의 선전원으로 전락한 ‘매춘 언론인’은 더욱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드골이 주도하는 나치 협력 반역자 대숙청은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을 모두 지배 세력에서 뿌리 뽑았고, 악질적인 나치 협력자들을 사형과 무기 강제 노동형에 처함으로써 다시는 지배 세력으로 군림할 수 없도록 영원히 매장해 버리는 데 성공한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드골은 나치 협력 반역자 숙청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 애국 시민만으로 조직하려는 정치적 비전을 실현했다. 대숙청 이후, 프랑스 사회는 급속도로 민주화되었고, 도덕성과 윤리 및 민주적 법질서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