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 환생幻生

아들로 태어난 한국전쟁 때의 부관

마도러스 2016. 1. 26. 17:59


아들로 태어난 한국전쟁 때의 부관


1971년 여름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제2군 사령부 장교(將校)들 모임에 가서 1시간씩 1주일 동안 법문(法問)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법문을 듣는 사람 중, 2군 사령관의 불심(佛心)은 특히 깊었습니다. 그는 2군 사령부 안에 무열사(武烈寺)라는 군(軍) 법당을 짓고 종각(鐘閣)도 세우고 탱화도 봉안하는 등 많은 불사(佛事)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회를 마치는 날, 사령관의 집안에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불어 닥쳤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사령관의 외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경북 경주시 감포 앞바다로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 사고로 제2군 사령부 전체는 초상집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사령관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었으며,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진 부인은 엎친대 덮친 격으로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이윽고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서 아들의 49재(齋)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바쁜 일정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뒤늦게 그 날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의 독경과 염불을 들으며 아들의 명복을 빌던 사령관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패를 모신 영단(靈壇)을 향해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이 놈의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 이놈!" 감히 보통 사람으로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붓고는 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법당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독경하던 스님과 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소동에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1시경 2군 사령부 헌병 대장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낮에 있었던 소동도 소동이지만, 통행 금지 시간이 넘는 야밤 중에 헌병 대장을 시켜서 나를 데려 오라고 한 데에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짐작하여 사령관 공관(公館)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 헌병 대장은 사령관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소상히 일러 주었습니다.

 

"이번에 죽은 아들은 저희 사령관님의 금쪽같은 외동 아들입니다. 친구 2명과 감포 해수욕장에 갔다가 사람들이 많은 해수욕장을 피하여 주위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서 다이빙을 하였는데, 친구 2명은 금방 물 위로 나왔으나 사령관의 아들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황급히 수색해 보니, 그 아들은 뽀족한 바윗돌에 명치를 찔려 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말을 잘 듣고 착했던 외아들이 그렇게 죽었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잠시 후, 나는 사령관이 기거하는 내실로 안내 되었습니다. 방안에 촛불을 밝혀 놓고 따로 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령관은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까지 불교를 믿었어도 헛 껍데기를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불교를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의아해 하는 나에게 자리를 권한 사령관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었습니다.


1950년 6.25 사변(한국 전쟁) 당시 저는 30여 단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늘 자신감이 넘처 흘렀던 나는 백두산 꼭대기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꼽기 위해 선두에 서서 부대원을 지휘하며 북진(北進)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승만 대통령으로 부터 전문(電文)이 날라 왔습니다. '지휘관 회의가 있으니, 급히 경무대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경무대를 향해 출발하면서 평소 아끼고 신임하던 부관(副官)에게 거듭 거듭 당부하였습니다.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 수십 만 명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하면 부관(副官)이 내 대신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아라!”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 이라더니, 그날 저녁 중공군 30만 명이 몰려와서 산을 둘러싸고 숨 쉴틈 없이 박격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우리 부대원 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살당하였습니다. 뒤늦게 급보를 받고 달려가 보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 이었습니다.

 

'부관은 어디 있는가?' 얼마동안 찾다가 '어찌 그 와중에 부관이라고 한들 무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 가닥 희망조차 포기한채 허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여겼던 부관(副官)이 쫓아 들어 왔습니다.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너는 살아 남을 수 있었느냐?”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웃 온천에 있었습니다.” “온천? 누구와?” “기생들과 함께.....,” “너 같은 놈은 군사 재판에 회부할 깜도 되지 못한다. 내 손에 죽어라!” 어찌나 화가 치미는지 그 자리에서 권총 세발을 쏘았고, 부관은 피를 쏟으며, 나의 책상 앞에 꼬꾸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21년 전의 일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 낮에 아들의 위패(位牌)를 놓은 시식장(施食場) 앞에 그 부관(副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였으므로 엉겁결에 일어나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그날 죽은 부관이 죽은 아들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관이 죽은 날과 아들이 태어난 날짜를 따져보아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밤 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모셔오게 한 것입니다. 당시의 제2군 사령관 이었던 육군 중장 박은용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를 매듭지었습니다. 부관(副官)은 자기의 가슴에 구멍을 내어 죽인 상관(上官)의 가장 사랑하는 외동 아들로 태어났고, 가슴을 다처 죽음으로서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 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前生)은 금생(今生)의 과거요. 내생(來生)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前生)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며 금생(今生)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왜 어제는 돌아볼 줄 알면서 전생은 묵살하고 내일을 기약 하면서도 내생(來生)은 잊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이 순간에 너무나 집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이상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의 삼세윤회(三世輪廻)는 반드시 있다. 왜냐하면 삼세윤회는 필연적 연기(緣起)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과(因果)와 윤회(輪廻)를 철저히 믿고 내가 지은 업(業)을 기꺼이 내가 받겠다는 자세로 살아서 한시바삐 생사의 미몽(迷夢)을 깨닫게 하는 경종이 되고,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길 하는 바랄 뿐이다. [일타 스님의 윤회와 인과응보(因果應報)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