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 음악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연극과 영화

마도러스 2015. 7. 21. 11:12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연극과 영화

 

일제(日帝)시대, 홍도는 오빠를 출세시켜 주기 위해 스스로 자청하여 기생(妓生)이 되었다. 화류계(花柳界) 생활에서 갖은 고생으로 학비를 모아 오빠를 졸업시켰다. 여동생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오빠는 순사(巡使)가 되었다. 한편, 홍도는 오빠의 친구인 영호와 사랑에 빠진다. 영호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홍도와 결혼하지만 곧 외국 유학을 떠나고, 홍도의 과거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결국 홍도를 집에서 쫓아낸다. 유학에서 돌아온 영호는 부모의 뜻에 따라 부잣집 딸과 약혼을 하고, 이를 알게 된 홍도는 약혼식장에서 약혼녀를 칼로 찌른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관은 다름 아닌 홍도의 오빠였지만, 그는 준엄한 법에 따라 홍도를 체포해야만 했다. ‘오!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리오,’ 통곡하는 홍도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때, 오빠는 홍도를 위로하며 노래 한곡을 부른다. 그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울지마라(1939)였는데, 이 장면에서 관중석은 온통 눈물 바다가 되었다.

 

★ 연극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6년 07월 동양 극장(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처음 공연하였다. 일제(日帝) 강점기에 큰 인기를 모은 신파극(新派劇)이다. 흔히 홍도야 울지마라(1939)로도 불린다. 이 작품으로 폐결핵 투병 중이던 작가 임선규는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고, 주인공 남매역을 맡은 황철(홍도 오빠役)과 차홍녀(홍도役)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 극장이었던 동양 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으며, 광복(光復) 이전 우리 연극사(演劇史)에서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동양 극장 앞은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경관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 기간 내내 서울 시내의 기생(妓生)들이 떼로 몰려왔는데 홍도와 자신을 동일시 한 기생(妓生)들의 눈물로 동양 극장은 연일 울음 바다가 됐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려 극장을 찾은 한량들도 많았다. 이 연극을 본 어느 기생(妓生)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이 너무 비관이 되어 마침내 한강에 투신 자살을 했는데, 이 사연이 신문에 보도되어 연극과 노래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동양 극장 앞과 주변은 온통 화류계(花柳界)의 슬픈 사연을 다룬 이 연극을 보러온 기생들로 넘쳐났다. 어느 날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500여명의 기생이 손수건을 준비하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 연극을 보며 흐느꼈는데, 이 때문에 그날 밤은 서울 장안 권번이 온통 텅텅 비었다고 한다. 왜 이 연극이 특히 기생(妓生)들에게 그토록 화제가 되었을까? 그 까닭은 이 노래가 기생들의 박복한 삶, 고달픈 처지를 마치 그림처럼 생생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한국 연극사에서 최고의 장기 공연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된다. 훗날 이 연극은 일컬어 '여성 수난극의 전형, 한국형 최루극(催淚劇)의 원조'라 불린다.

 

★ 영화 : 1939년 3월 17일, 영화로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 극장(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처음 상영하였다. 영화로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녹음이 실패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평단과 관객의 시선은 싸늘했다. 영화 배우이자 극작가인 김태진은 주저 없이 이 작품을 1939년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 무대 위에서의 과장된 연기에 익숙한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기 또한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조선 일보’ 역시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혹평했다. 동양 극장에서 3년간 찬사만을 받아왔던 차홍녀(홍도役)에게 영화에 출연한 후 실패한 경험은 나중에 좋은 큰 약(藥)이 되었다. 하지만, 제작자인 동양 극장은 4000원이라는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 극단 아랑(阿郞) : 동양 극장이 재정적 손실을 입은 후, 흥행의 귀재라고 불리던 동양 극장 지배인 홍순언이 죽었다. 최독견이 그 뒤를 이어 지배인이 되었으나 경영은 날로 어려워졌다.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던 최독견은 중국으로 도망가고 동양 극장 주인이었던 홍순언의 아내 배구자는 채권자들에게 동양 극장을 넘겼다. 동양 극장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 소속 유명 배우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배우들이 극장의 채무 관계 때문에 소유권이 바뀌듯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황철(홍도 오빠役)을 중심으로 동양 극장을 탈퇴한 이들은 아랑(정절을 지키려다 대숲에 버려져 죽음)의 정절(貞節)의 마음을 기리는 뜻에서 1939년 8월 새로운 극단의 이름을 ‘아랑’으로 정했다. 극단 아랑(阿郞)의 주요 무대는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 극장이었으며 연출가 박진과 극작가 임선규를 비롯하여 황철(홍도 오빠役), 차홍녀(홍도役) 등 동양 극장의 유명 배우들이 망라되었다. 극단 아랑은 배우들이 만든 극단이기에 동양 극장 시절처럼 느긋하게 연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 순회 공연도 많이 다녀야 했다. 특히 차홍녀가 출연하지 않는 공연은 표가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연극에 주역으로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강행군이었다. 1940년 겨울, 극단 아랑은 함경도, 평안도로 순회 공연을 떠났다. 마지막은 강원도 철원의 철원 극장에서 공연된 ‘청춘 극장’이었다. ‘청춘 극장’의 주인공을 맡은 차홍녀는 1년여 동안 강행군으로 지칠 데로 지쳤다. 1940년 12월, 철원 극장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순회 공연을 마친 극단 ‘아랑(阿郞)’의 단원들은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철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원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옷깃을 여몄다. 여배우 차홍녀(홍도役)는 거적을 쓰고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1원을 적선했다. 기차에 올랐다. 열이 나기 시작한 차홍녀는 서울에 도착 할 때쯤 헛소리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온몸에 발진(發疹)이 돋았다. ‘마마’라고 불리던 천연두(天然痘 Smallpox)에 걸린 것이다. 순회 공연으로 지친 상태에서 병에 걸린 거지와의 접촉으로 불치의 병이 옮아 온 것이었다. 며칠 뒤, 차홍녀는 불과 22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1940년 12월 24일 오전이었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6년 07월 연극으로 3년간 성공하였지만, 1939년 3월 영화는 실패하였고 대신 노래가 성공하였다. 리갈(Legal) 레코드사에서 남일연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를 주제곡으로 선정하였고,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마라(1939)를 부(副)주제곡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이 큰 인기를 끌게 되자 부랴부랴 주제곡을 홍도야 울지마라(1939)로 바꿨다.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라는 이서구(작사)의 노랫말은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95년 경기도 시흥 방산리에 '홍도야 울지마라' 가요비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이 고장 출신 문화인 이서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뜻으로 만들어졌다.

 

★ 노래 ‘홍도야 울지마라’ (김영춘)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이 몰아쳐도

너만은 지켜야 할 순정의 등불을. 홍도야!)

 

(오빠! 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죽기보다 괴로워요. 오빠!)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널 비웃어도.

나만은 알고 있다. 네 마음. 네 참 뜻을!)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 간 주 .......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내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 노래 동영상 : www.youtube.com/watch?v=uEUf-ox4qAs

 

★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 가수

 

★ 김영춘 : 191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김종재이다. 대표곡으로 홍도야 울지마라(1939) 등이 있다. 1938년 김영춘의 나이 불과 20살에 콜럼비아 레코드사 주최 전국 가요 콩쿠르에 출전하여 입상하고 1938년 11월에 발표한 '항구의 처녀설' 노래로 데뷔했다. 홍도야 울지마라(1939) 노래는 1950년대 박재홍, 1960년대 오기택 가수가 다시 취입하여 크게 히트시켰다.

 

★ 남일연 : 191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서 울금향(鬱金香)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으며, 1937년 ‘눈물의 경부선’으로 데뷔했다. 대표곡으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 사랑도 팔자라오(1939) 등이 있다. 1937년 태평 레코드의 오디션을 통해서 전속 가수가 되었고, 1938년 콜럼비아 레코드로 소속을 옮겨서 활동을 했다. 주로 사랑에 처절했던 여인의 심정이 담긴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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