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宗敎) 개혁

우리 아버지는 대체 뭘 한 거예요?

마도러스 2015. 4. 27. 15:10

 

우리 아버지는 대체 뭘 한 거예요?

 

어느 날, 들판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예수(Jesus)가 엄마 마리아(Maria)에게 물었다.

예수 : 엄마! 난 어떻게 태어난 거예요?

마리아 : 응! 그것은 하느님이 너를 나에게 주신 거란다.

예수 : 그럼, 하느님이 엄마에게 선물로 주셨단 말이예요?

마리아 : 암! 그렇고 말고!    

예수 : “나 참!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요셉 Joseph)는 도대체 뭘 한 거예요?”

마리아 : “믿어야 천국(天國)에 갈 수 있느니라!”

 

 예수 탄생과 하느님 아들 조작 사건의 비밀

 

1) 요셉(Joseph) 둘째 부인 성모 마리아(Maria)와 6월에 약혼(約婚)했다. 요셉은 이스라엘 다윗 왕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그의 부인이 될 사람은 제사장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약혼(約婚)이 확정된 다음 3개월 후인 9월에 1차 혼인 선언을 하고, 12월 첫 보름 동안만 두 사람의 동침이 허락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해 9월에 아이를 출산하기 위함이며, 9월은 성스러운 기름 부음의 달이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요셉(Joseph)은 제사장이 명령한 12월 초순까지 기다리지 않고 6월에 약혼(約婚)을 하자 마자 곧바로 둘째 부인 마리아(Maria)와 동침을 한 것이다. 율법을 어긴 임신(姙娠)을 하게 되자 요셉은 몹시 난처했다. 쉽게 말해서 속도 위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뿐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제사장을 찾아갔고, 제사장은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를 특별히 취급하도록 했다. 즉 하느님에 의해 잉태하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Jesus)는 하느님의 잉태에 의해 태어났다고 발표하게 된 것이다.

 

3) 2세기나 그 이전에 씌여진 것으로 알려진 ‘유아(幼兒) 복음서’는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의 예수(Jesus)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어린 예수가 아주 영리했지만 난폭하고 버릇이 없고 신경질이 대단히 심한 어린이였음이 묘사되고 있다. 그 중에는 자기 심기를 건드린 다른 아이를 죽인 일도 있었고, 자기의 가정 교사를 죽도록 두들겨 팬 적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성경을 만드는 목적을 예수의 신격화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혈통 관계는 성경의 기록에서 고의적으로 제외시켰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4) 신약 성서는 여러 차례 공의회를 거치면서 주교와 장로들에 의해 기록이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정경(正經)이고, 교회 이익을 크게 해치는 내용은 외경(外經)이라고 하여 구분하여 처리하였다.

 

 영국 법원, 예수 부활은 거짓이었다! 판정

 

 

[동아일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년 간의 조사 끝에 1982년 ‘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Jesus)는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었다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 요셉(Joseph of Arimathea)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Pilatus)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演劇)을 하고는 그 뒤, 부활(復活) 연극(演劇)을 한 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Jesus)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Jesus)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Lazarus)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 교회를 세워 주교(主敎)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Jesus)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Merovinger)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8개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Jesus) 혈족들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인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많은 예수(Jesus)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 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시대 성당 기사단의 지방 지부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재산을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영국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들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예수와 관련된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3년간 현지 답사하여 무덤까지 확인하고는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정의 주심 판사는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일부 기독교인들이 목을 매고 자살(自殺)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영국 기독교인들의 약 80%가 타종교로 개종(改宗)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부 언론에서 보도를 하였고,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한국의 기독교는 엉뚱하게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동아일보, 입력: 1982.02.20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토리노 성의(聖衣)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세마포(細麻布)’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졌다.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聖衣)는 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공개 전시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聖衣)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Torino)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알로에 추출물)을 100근(40kg)이나 준비한 것(요한 복음 19:40)도 반증(反證)하는 자료이다. 피. 땀 등에 의해 그대로 적셔져 있던 토리노 성의(聖衣)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감싼 세마포(細麻布)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聖衣)가 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09월 05일에는 토리노 성의(聖衣)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였고,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었다. 토리노 성의(聖衣)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라는 것을 오히려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