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宗敎) 개혁

신(神)은 왜 방관자(傍觀者)인가?

마도러스 2015. 12. 30. 17:25


■ 신(神)은 왜 방관자(傍觀者)인가?

 

2009년 미국 영화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ong of Lying)은 너무 솔직해서 웃긴 영화이다. 그 영화에 나오는 단편 내용을 참고로 고찰해 본다.

 

신(神)은 현실적인 역사 현장에서는 왜 방관자(傍觀者)인가? 신(神)은 신화(神話) 혹은 우화(寓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가 신(神)에게 뭔가를 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신(神)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저 방관자(傍觀者)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스스로 책임지게 만든다. 그리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도약하는 기초가 된다. 신(神)에 대한 간절한 기도(祈禱)에는 그 어떤 치열함이 동반된다. 그리고 긴장감이 감돈다. 우리들의 기도(祈禱)는 하늘에 대한 공허한 외침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기나긴 역사(歷史)가 만들어 놓은 기성 종교(宗敎)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우리는 거기에 타성적으로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宗敎)에 대해 중독과 같은 애착(愛着)을 갖곤 한다. 하지만, 이내 곧 역설적으로 그 만큼의 허무함을 남긴다. 그러한 허무감은 인간에게 죽고 탄생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의문점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의식주(衣食住)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있어서 매일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매우 엄중한 자세로 신성한 종교(宗敎)에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심리적인 위안을 얻는 것에 이내 만족한다. 그러한 공허한 습관은 계속 반복된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뭔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생기면, 아주 다급한 심정으로 기도(祈禱)할 따름이다. 하지만, 신(神)은 영원한 방관자(傍觀者)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긴장과 조바심을 풀어주는 것에는 큰 은혜를 받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에 의존해서 크게 기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