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제사(祭祀) 전통 풍습의 역사 및 유래

마도러스 2014. 11. 11. 15:01

 

■ 제사(祭祀) 전통 풍습의 역사 및 유래

 

우리나라는 제사(祭祀) 문화의 본 고향이다. 제사(祭祀) 문화는 본래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 중 한 갈래였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8-2,333)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배달(倍達 BCE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 시대부터 주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봉행해 오다가 열국(列國,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시대로 이어지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四國) 시대로 이어진다.

 

그런 후, 고려(高麗) 말 공민왕 시대 정몽주 선생이 제정한 제례 규범이 최초로 나오면서 제사(祭祀) 풍습이 본격적으로 규범화 되었다. 그 내용에 의하면, 3품관 이상은 증조부모까지, 6품관 이상은 조부모까지, 7품관 이하 서인들은 부모까지 제사지내라는 제사(祭祀) 규범이었다. 조선(朝鮮) 시대에 와서는 유교적 제사의식이 도입되었는데, 경국대전(성종.1470년 완성)에 3품관이상은 고조부모(4대조)까지, 6품관이상은 증조부모(3대조)까지, 7품관이하 양반은 조부모(2대조)까지만 제사지내라는 신분상의 차이를 두었었다. 이런 신분에 의한 제사를 조선말까지 유지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분 제도가 없어지면서 신분상의 구별없이 고조부모(4대조)까지 제사 지내고 있는 것이다.

 

옛 기록을 보면, '예(禮)를 잃어버렸다면, 동이(東夷) 풍습에게서 구한다.' 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동이(東夷) 민족인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예(禮)를 중시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었다. 우리나라는 제사(祭祀) 문화의 본 고향이며, 제사(祭祀) 문화는 본래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 중 한 갈래였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8-2,333)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환국(桓國 BCE 3,898-2,333), 배달(倍達 BCE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을 건국하였고, 제사(祭祀) 풍습은 열국(列國,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시대로 이어지고,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四國)시대로 이어진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는 중국 동부 지역에 (堯), (舜), 하(夏), 은(殷). 주(周)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이들 나라에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중국 지역에서는 (堯), (舜) 시대에 천신(天神), 지기(地祇), 5악(嶽), 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있고, 조상 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夏), (殷).(周) 나라에 걸쳐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주周나라)도 역시 동이족(東夷族)이었는데, 중국의 역사 서적인 서경(書經), 예기(禮記), 사기(史記)에 보면, 이들은 일상생활이나 대사(大事)를 집행할 때 언제나 삼신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지내며 생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 말기와 고조선(古朝鮮) 초기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된 것인데 이런 흔적과 기록들은 훗날 중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삭제되었다.

 

참고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태호(太昊) 복희(伏羲)는 배달국(倍達國)의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 3,512년 즉위)의 12번째 아들이며, 주역(周易)의 처음 창시자이다.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아버지는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었으며, 강수(姜水)의 감병관으로 임명받고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 정착한 사람이다.

 

황제(黃帝) 헌원(軒轅)은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서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던 신농(神農) 아버지의 후손이 공손인데, 바로 공손의 후손이 황제헌원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은 배달국 시대에 산동 반도 지역에서 고도의 문명 국가를 통치했던 사람인데, 중국의 고사변(古史辯)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라고 하여 동이족(東夷族)임을 밝히고 있다. 전욱고양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이다.

 

요(堯) 임금은 황제헌원 및 제곡고신의 후손이다. 순(舜) 임금은 고조선(古朝鮮) 단군 1세때, 고시(高矢)의 친형인 고수의 아들이다.

우리나라 열국(列國,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시대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동예(東濊) 무천(舞天), 마한(馬韓)의 소도(蘇塗) 등등이다. 특히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에게 제사 지냈고,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은 추수 감사절의 행사였고, 신라(新羅)에서는 남해왕(南解王) 때에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廟)의 제도를 정했으며 산천에도 제사 지냈다.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받들어 복(福)을 빌고자 하는 의례로서 자연 숭배와 삼신 상제님에 대한 제천 의식에서 비롯된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성신(星辰)을 비롯하여 산천(山川)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 신(神) 그리고 선조(先祖)와 선사(先師)의 가호로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제사(祭祀)의 기원이다. 삼국(三國)시대부터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신의 조상(祖上)에 대한 제사(祭祀) 의례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는 삼국시대에 들어선 후에야 자신의 조상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는 의례가 기초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高麗) 시대에는 원구(窩丘). 방택(方澤). 사직(社稷). 종묘(宗廟). 능침(陵寢).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문선왕묘(文宣王廟). 마조단(馬祖壇). 사한단(司寒壇) 등을 설치하고 예를 갖추어 제사 지냈고, 명산. 대천.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등에도 제사 지냈다.

 

참고로, 고려 시대에 '고려장(高麗葬)'이란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제(日帝)에 의해서 날조된 사실이다. 부모가 늙고 병들면 자식들이 지게에 엎고 갖다 버리고 매장했다는 고려장의 단어는 옛날 자료 그 어디에도 없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불효죄를 반역죄와 더불어 매우 엄하게 처벌하던 시대였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려장이란 말은 일제 시대부터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데, 일제(日帝)가 전국을 뒤져 문화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반출하더니, 급기야는 무덤의 부장품까지 노리게 되었다. 그들의 논리는 "고려 시대부터 고려장이란 게 있었고,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못된 풍습에 의해 여기 묻힌 사람은 자기 부모를 생으로 고려장시킨 놈이므로, 그런 무덤들은 파헤쳐도 괜찮다." 라는 근거를 만들에 내어 팔도강산의 무덤을 파헤치게 된 것이다.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시대부터 내려오던 자연신에 대한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상류 집권층을 중심으로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 의례로 점점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그리고, 유교적 형태의 제사 의식이 도입된 것은 고려(高麗) 말엽부터였고, 신흥 사대부들의 등장과 조선 초기에 상류 집권층의 통치 이념으로써 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었다. 하지만, 일반 민중에게는 보급되지 않았다.

 

 

조선(朝鮮) 초기의 제사(祭祀) 의식 역시 주로 집권 왕가나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먼저 행해졌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불교 의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와 같은 유교 의례가 사회 전반에 쉽게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의 커다란 국란과 무수한 수탈을 겪으면서, 사회 민심이 흐트러지자, 국가적으로 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적 성리학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유교적 규범과 틀이 일반 민초들까지 파고들었다.

 

조선(朝鮮) 초기 적어도 성종(1457-1494) 때까지만 해도 제사를 딸, 아들 구별 없이 돌아가며 윤회봉사(輪廻奉祀)를 했으며, 제사에 드는 경비도 분담하는 분할제를 택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상을 받드는 정신은 딸, 아들이 다를 수 없으며, 맏이나 그 외의 자녀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례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朝鮮) 후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조상의 제사를 주관한다는 명분으로 장자 중심으로 재산이 상속되었다. 또한 남존 여비, 재가 금지, 서얼 차별 등의 윤리적 조치들이 가부장 체제의 부산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계 친족 중심의 문중은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지배하여 갔다.

 

중국(中國)의 문화는 매우 호전적이고 침략적 기질이 강해서, 중국의 가족 문화는 부계(父系) 중심의 가부장적 차별적 가족문화였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문화는 일단 모계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왔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해야 했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 하는게 전통적인 결혼 문화였다.

 

한국(韓國)의 문화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材)를 잘 받들고 사람을 존중하는 기질이 강했다. 한국인은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 문화로서 특히 여자를 존중하는 모계(母系) 문화를 지켜왔다. 그러한 전통은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 이념이 확고하게 보급되면서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사림세력에 의해 성리학적 중국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부계 줌심(친가중심. 외가.처가 차별), 장자.아들 중심(자녀간 차별) 문화로 변화해 간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8-2,333) 민족이다. 배달국(倍達國 BCE 3,898-2,333)의 전통을 이어 받아 고조선(古朝鮮)의 단군은 신선도(神仙道)의 나라를 세우고,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이라는 제천단을 쌓도록 했으며,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거나 매년 5월 단오제와 10월 상달제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원에 예를 올렸다. 고조선(古朝鮮)의 10월 상달제는추수 감사절의 의미로서 삼한(상달제), 고구려(동맹, 10월), 동예(무천, 10월)로 이어져 왔다. 10월 상달은 1년 중 가장 높은 달이라는 뜻이다. 초순에 술과 떡을 장만하여 삼신 상제님, 성주신, 조상신 등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한해 농사에 대한 풍년을 기원하는 5월(단오)제, 가을 추수를 감사하는 10월(상달)제 형태로 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5월은 풍년의 기대를 안고, 10월은 추수와 조상(祖上)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정성껏 상제님과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제사를 올린 것이다. [글 :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환국(桓國)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다.' 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 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요(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