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마도러스 2013. 2. 14. 14:23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우리의 역사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고 농락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얽힌 내용이다.  다음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신화(檀君神話)와 그것을 정밀 분석해 놓은 것이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백두산)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도장)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때의 배달(倍達)을 신시(神市) 배달(倍達)이라 한다. 환웅(桓雄)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은 몸을 삼간 지 21일만에 여자(熊女)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갖기를 축원했다. 환웅(桓雄)은 이에 마음이 동()하여 그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 하였다. 단군(檀君)은 요()임금(BC 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송화강 아사달(하얼빈哈爾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 아침 해가 비치는 곳)로 옮겼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 아사달로 옮겼다. 후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980세였다.”

 

 단군신화(檀君神話) 다음의 네가지 측면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졸렬한 필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중국의 눈치를 보며, 억지(抑止) 춘향(春香) 격으로 중국(中國)에게 절하고 있는 모습이 후세(後世)에 이르러 부끄럽게 드러난다.

 

 첫 번째, 환인(桓仁, BC 7,199년 제위)과 환웅(桓雄, BC 3,898년 제위) 및 단군(檀君, BC 2,333년 제위)의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의 기록은 고려(高麗)의 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 고종 때의 이승휴(李承休, 1224-1301)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이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단군신화의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기록은 각각 고기운(古記云)”, “본기왈(本紀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고기(古記)”가 전하는 내용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했던 고기(古記)”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어떠한 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제왕운기가 쓰여졌던 고려(高麗)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국조(國祖)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에 입각해서 기자(箕子) 조선(朝鮮)의 기자를 국조(國祖)로 인정했던 때이다. 단군 왕검이 정식 국조(國祖)로 인정된 때는 조선(朝鮮) 시대에 이르러서 였다. 이것은 신라(新羅)가 중국 당()나라의 군대를 끌여들여 축소(縮小)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한 댓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 고려(高麗)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당대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라는 것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수입하고, 답습하며 조공을 바치는 입장에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보다 높게 서술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중국의 입장에서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신화 기록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 역사의 잣대에 맞추다 보니까, 환인(桓仁),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역사 시간대를 크게 압축해서 중국의 요임금 시대의 인물로 갖다 맞추어 놓았다. 단군 신화는 배달민족(倍達民族) 삼성조(三聖祖)  환인(桓仁, BC 7,199년 제위), 환웅(桓雄, BC 3,898년 제위), 단군(檀君, BC 2,333년 제위)”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아무리 설화적 구성을 통해 표현해 냈다 하더라도, 환인(桓仁)의 아들이 3,301년 후의 환웅(桓雄)이 되고, 환웅(桓雄)의 아들이 1,565년 후의 단군(檀君)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환국(桓國, BC 7,199-3,898),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장구한 고대의 역사가 단군신화에서는 몇 마디 구절에 의해 짧달막하게 축소되고 왜곡되어진 것이다.

 

 두 번째,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웅족(雄族)과 호족(虎族)과의 민족 연합에 관한 엄연한 사실이 외래 종교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찌들어 있던 당대의 역사 기록자에 의해 곰과 호랑이의 인간으로 환생 하기?” 라는 유치하고 우매한 신화로 전락(轉落)되고 말았다. 더욱 엉뚱한 내용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초대 배달 환웅이 웅족(熊族)의 웅녀와 결혼하여,  1,500년 후의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초대 단군 왕검을 낳았다는 차마 웃지 못할 내용이다. 어떻게 BC 3,898년에 제위에 오른 배달국 환웅(桓雄)이 약 1,500년 후의 고조선 단군(檀君, BC 2,333년 제위)을 아들로 둘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절복통(腰折腹痛)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사대주의(事大主義) 때문에 생긴 일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해야만 했던 약소국(弱小國)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를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쉽게 왜곡된다. 그러나, 왜곡되는 역사를 바로 바로잡는 일은 마치 홍수가 나서 강물이 넘쳐 흐를 때 둑(embankment)을 쌓고 제방(dike)을 쌓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세 번째, 단군신화의 끝부분에 나오는 단군(檀君)은 요()임금(B.C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되던 해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부분을 보면, 역사의 시간이 잘못 계산되어져 있다. 단군(檀君) BC 2,333년에 제위에 올랐고, 중국의 요()임금은 BC 2,357년에 제위에 올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되던 해에 단군(檀君) 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의 제위에 오른 것이다.

 

 네 번째, 단군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BC 1,134)에 기자(箕子)를 조선(고조선)에 책봉했다.” 라는 부분은 시간대도 맞지 않을뿐더러, 사실을 거꾸로 뒤바꾸어 왜곡해 놓았다. ()의 무왕(武王)은 중국 주()나라의 2대 임금이며, BC 1,134년에서 BC 1,116년까지 통치했던 인물이다. 기자(箕子) 조선(BC 323-194)은 서부 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세워진 고조선의 속국(屬國)이며, B.C 323년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의 무왕(武王, BC 1,134-BC 1,116년 재위)과 기자(箕子) 조선(BC 323-194)의 기자(箕子)는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기자(箕子) 조선의 제후는 주()의 무왕(武王)이 책봉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 왕검이 서부 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책봉한 것이다.

 

기자(箕子) 동래설 BC 300-200년경에 중국인들이 중화(中華) 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다. 실제로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 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하는데, 동북아시아의 청동기 문화는 비파형(琵琶形) 동검 문화로 특징되고, 중국 황하 유역의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기후()”라는 사람은 BC 323년 기자 조선(BC 323-194)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인데, 그는 BC 342년부터 이미 서부 변방에 있는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번한(番韓)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된 후, BC 323, 수유족의 무력을 이용하여 번한(番韓)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기후()는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으로 자칭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에게는 예를 갖추어 번한(番韓) 지역의 제후가 되었다. 이중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족보 위의 40여대의 선조까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했다. 그리고 기후()가 추존하는 40대 선조가 서우여(徐于餘)”였다.

 

그런데, “기자(箕子) 동래설이 역사기록에 나오게 된 이유는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고려(高麗) 때 가덕왕의 후손들이 기자 조선 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世系)를 빛내기 위하여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명칭을 서우여(徐于餘)”에서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자(箕子)라는 사람은 원래 은()나라의 신하로 있었는데, ()나라가 은()나라를 멸망(BC 1,122)시키자,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서부변방을 다스렸던 인물이다. 기자 조선은 나중에 위만(衛滿) 조선에게 멸망되었다.

 

한편, 위만(衛滿) 조선(BC 194-108)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 조선의 제후국인 기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 조선과의 연합의 고리를 끊은 나라이다. 그런데, 중국의 일부 사서(史書)들은 단군 조선(BC 2,333-238)이 기자 조선(BC 323-194)과 위만 조선(BC 194-108)으로 계승되었다고 거짓 기록하고 있다. 단군 조선(BC 2,333-238)의 역사 시간대를 좁혀 놓는 범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 조선(BC 323-194)은 전국시대인 BC 323년에 고조선의 번한(番韓)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가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하여 고조선의 제후(諸侯)가 된 나라이다. 고조선이 멸망(BC 238)한 이후, 기자(箕子)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멸망(B.C.194) 당하게 되며, 그 뒤 한수 남쪽에 후삼한(後三韓),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기(史記), 관자(管子), 산해경(山海經) 등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존재 시기와 영역을 완전히 왜곡해 놓았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위만(衛滿) 조선(BC 194-108)부터라고 했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삼한(三韓)을 없애버리고,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의 후삼한(後三韓)을 내세웠다. 그럼으로써, 우리 역사의 시간대를 낮추었으며, 우리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 영역 안으로 축소시켰던 것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재위BC 2,357-2,258),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시대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요서 지방 홍산(紅山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유적지를 조사한 이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그 후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예를들면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에게 문명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한반도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 현재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홍산(紅山문화를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말엽 및 고조선(古朝鮮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중국의 건국(建國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문화'이다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단군(檀君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실제는 호족(.호랑이)과 웅족(.)을 배달(倍達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