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배달국(倍達)의 청구(靑邱) 배달 시대

마도러스 2013. 2. 14. 16:56

■ 배달국(倍達)의 청구(靑邱) 배달 시대

 

 치우 천황의 용산(산동성) 문화

 

 배달국(倍達國) 14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은 중국의 유망(楡罔)과 유망의 뒤를 이은 황제 헌원(軒轅)과 탁록(?鹿)에서 결전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도읍을 백두산 아래 신시(神市)에서 청구(靑丘)로 옮기고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청구(靑丘)는 현재 중국 요녕성의 요하강 서쪽을 가리킨다. “대변경(大辯經)”을 보면, 치우(蚩尤) 천황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했는데, 그의 능()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고 하였다.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라는 사당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신시본기의 기록에는, 치우(蚩尤) 환웅은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고, 옹호산(雍狐山)에서 야금(冶金)을 하여, 도개. 모극. 대궁. 호시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蚩尤) 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 기간 중, 경기장과 거리가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되는 도깨비 형상의 붉은 악마가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치우(蚩尤) 천황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치우(蚩尤) 천황은 중국 민족의 시조(始祖)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라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치우(蚩尤) 천황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용장이었으며, 신의(信義)와 인의(仁義)로써 백성을 다스렸고, 신력(神力)과 정의(正義)를 만고(萬古)에 떨쳤던 배달국(倍達國)의 왕이었다.

 

치우(蚩尤) 천황은 탁록(?鹿)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의 투구를 하고,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편, 치우(蚩尤)천황이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는 전쟁의 신(), 즉 군신(軍神)으로 추앙하였고, 큰 전쟁을 앞두고 반드시 치우(蚩尤) 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치우(蚩尤) 왕릉에서 제사를 지내면, () 정상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와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북경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天亶)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삼신(三神)과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蚩尤) 천황을 모셨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의 삼신(三神)은 단군(檀君)의 부하인 삼신(三神)과도 동일한 것이다.

 

치우(蚩尤) 천황은 BC 2,700년에 백두산 아래 신시(神市)에서 요녕성의 요하강 서쪽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긴 후, 황제 헌원(軒轅)과의 결전을 치루었으며, 산동 반도의 태산(泰山) 아래와 황하강 유역에 배달국의 청동기 문화를 보급하였다. 용산 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의 동쪽에 있는 용산(龍山) 지역이기 때문에 용산(龍山) 문화 라고 한다. 용산(龍山)은 현재 산동 반도의 태산(泰山) 아래를 가리킨다. 청구(靑丘) 배달국의 용산 문화 유적지는 요녕성. 산동성. 하남성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지역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 치우(蚩尤) 천황의 청구(靑丘) 배달국(倍達國)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 반도 일대와 양자강 북쪽의 회대(淮代)까지 지배하였다고 한다.

 

용산(龍山) 문화의 옥기(玉器)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 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의 옥환(玉環)이 나타난다. 반월형 석도(石刀)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에서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 말이 사육되었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 솥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용산(龍山)문화는 BC 2,700-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 지방으로 널리 통용되었다.

 

치우(蚩尤) 천황 시대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시작이다. 치우(蚩尤)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 머리에 무쇠 이마)하였으니, 이미 청동기 시대에 돌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고고학적으로 BC 2,100년에 세워진 하()나라 초기에 청동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문화 유적지에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와 공작석(孔雀石, 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 등의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난 후부터는 이제 용산(龍山)문화가 중국의 하()나라 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용산(龍山) 문화가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용산(龍山) 문화 유적지에서 특히 청동기 유물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 용산(龍山) 문화는 중국으로 전해져 하(, BC 2,205-1,766)나라의 청동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는데, 이렇게 전파된 청동기의 흔적은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등이며, 산서성의 양분현까지 널리 분포되고 있다. 현재 동북방에 남아 있는 청동(靑銅) 도검(刀劍)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금주시(錦州市) 수수영자(秀手營子)의 토갱묘에서 발굴된 청동과(靑銅戈)이다. 이는 BC 18세기경 은(, BC 1,600-1,046) 나라의 도검(刀劍) 보다 앞선 것인데, () 나라에서는 도검(刀劍)의 검날만 발굴되었고, 수수영자(秀手營子)의 청동과(靑銅戈)는 도검(刀劍)의 자루까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