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애국가(愛國歌)의 최초 역사와 변천

마도러스 2014. 2. 11. 09:59

 

■ 애국가(愛國歌)의 최초 역사와 변천

 

● 처음엔 ‘하나님’이 아닌 ‘상제(上帝)님’을 간구했었다.

 

■ 1876년 조선은 일본과 병자(丙子) 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2년에는 미국, 1884년에는 영국ㆍ독일ㆍ이탈리아, 1889년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1892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ㆍ덴마크, 1901년에는 벨기에 등과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와같이 세계 열강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됨에 따라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고, 애국 애족의 사상과 더불어 서로 다른 애국가(愛國歌)가 도처에서 쏟아지게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각종 애국가가 애창되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 만해도 10여 종류에 이른다. 1896년 이필균의 <애국가>, 전경택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 김종섭의 <애국가>,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등이 그것이다.

 

■ 애국가(愛國歌)라는 말이 처음으로 기록으로 새겨진 것은 1896년 독립 신문 1권 15호(1896.05.09)에 학부주사 이필균(李弼均)의 애국가(愛國歌)(원제: 애국하는 노래) 가사가 실린 기록이 처음이다. 

 

아시아에 대조선(大朝鮮)이 자주 독립 분명하다.

애야애야 애국하세 나라 위해 죽어 보세.

분골하고 쇄신토록 충군하고 애국하세.

우리 정부 높여 주고 우리 군민 도와 주세.

 

깊은 잠을 어서 깨어 부국강병(富國强兵) 진보하세.

남의 천대 받게 되니 후회막급(後悔莫及) 없이 하세.

합심하고 일심되어 서세동점(西勢東漸) 막아 보세.

사농공상(士農工商) 진력하여 사람마다 자유하세.

 

남녀 없이 입학하여 세계 학식 배워 보자.

교육해야 개화되고, 개화해야 사람되네.

팔괘 국기(八卦國旗) 높이 달아 육대주에 횡횡하세.

산이 높고 물이 깊게 우리 마음 맹세하세.

 

■ 1898년, 독립협회가 독립문(獨立門)에서 가진 개국 506돌 경축식에서 “무관(武官)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영국(英國)의 국가(國歌)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의 곡조에 맞춰서 불려졌다. '상제(上帝)'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높으신 상제(上帝)님 자비론 상제(上帝)님 궁휼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 하소서. (1절)

우리의 단군(檀君)쥬 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소서. (2절)

 

■ 1901년 고종(高宗) 황제는 국가 상징물로 애국가(愛國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정 대신 윤용선에게 국가(國歌) 제정을 명령한다. 이때 윤용선은 조선 왕립 군악대 지도자로 초대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에게 부탁하였다.

    

■ 1902년 고종 황제는 애국가(愛國歌)와 국기 및 군가 제작을 위해 기장조성소(旗章造成所)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1902년 7월1일 애국가 작곡이 완료되었다. 기독교의 찬송가 풍으로 작곡된 이 애국가는 처음 독일에서 한국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5개 국어로 출간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 1902년 8월 15일, 고종(高宗) 황제의 명(命)에 따라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에 의해 대한제국(大韓帝國) 애국가(愛國歌)가 처음으로 작곡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군악 대장으로 양악을 최초로 국내에 들여온 독일인이다. 고종 황제의 명에 따라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9월 9일 고종 탄신일 기념식장에서 초연됐으며, 주로 국가의 중요 행사 때마다 군악대(軍樂隊)에 의해 연주되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애국가 (작사: 미상, 작곡: 프란츠 에케르트)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독립부강하야 태극기를 빛나게 하옵시고.

위권(威權)이 환영(圜瀛)에 떨치어 오천 만세에 자유가 영구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독립부강하야 태극기를 빛나게 하옵시고.

위권(威權)이 환영(圜瀛)에 떨치어 오천 만세에 자유가 영구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 1905년(을사조약) 이후,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에 가사 내용을 약간 달리한 애국가(愛國歌)가 불려지기도 했는데,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제(上帝)여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원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성지 동방의 원류가 곤곤히.

상제(上帝)여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

 

■ 1907년 03월 07일,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기 위해 현재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애국가(愛國歌) 가사를 작성했다. 대한 매일 신보(1907.03.20) 기사에 의하면, 안창호 선생이 ‘서서만리현(西署萬里峴)에 있는 의무균명(義務均明)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화창(和唱)했다’라고 한다. 독립지사 윤형갑 선생의 증언을 종손 윤정경씨가 2011년 03월 채록한 CD 자료에 의하면,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이 현재의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했다. 또한 임시 정부 시절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최고령 애국지사 구익균(105세) 노인 역시 똑같은 증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국사 편찬 위원회는 1955년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했고, 더욱이 친일파 윤치호(尹致昊)가 1908년 09월 작사한 것처럼 오도(誤導)되어 왔었다. 하지만, 2012년 08월 19일, 흥사단(興士團)의 애국가 작사자 규명 위원회는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애국가의 작자사라는 증언과 명확한 증거를 발표했다.

 

1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룬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 가을 하늘 공활한대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 1910년, 일제(日帝)의 총독부가 '대한제국 애국가'에 대해 가창(歌唱) 금지 조치를 취하면서, '대한제국 애국가'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후에는 창가집 등에나 애국가 가사가 보일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의 애국가가 불리지 못하면서, 민간에서는 <애국가>의 가사를 조금씩 달리하여, 아일랜드(Ireland)의 민요인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서 부르게 되었다.

 

■ 1910년대, 미국 하와이(Hawaii) 교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진 것으로 알려진 “하와이 호놀룰루의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에서 간행된 <조선 국가>의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제(上帝)'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1910년 한일(韓日) 합방으로 자취를 감춘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가 1910년대 미국 하와이 교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큐레이터는 1910년대에 하와이(Hawai)에서 발간된 애국가 악보를 최근 서울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입수하여 2005.11.13일 공개했다.

 

상제(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야, 위권(威權)이 세상에 떨치어

독립 자유 부강을 일신케 하옵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 (1절)

 

■ 1919년 03월 01일, 일제(日帝) 침탈의 칼날 앞에서 3.1 만세 운동을 할 때에도 우리 민중들은 아일랜드(Ireland)의 민요인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하고 있다.

 

■ 1936년, 안익태(安益泰)는 한국의 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불려지거나, 혹은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불려지는 것을 보며, 우리 민족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우리 실정에 맞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그 애국가가 공개적으로 불려진 것은 애국가가 작곡되던 1936년 독일 베들린 울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을 찾아가 함께 부른 것이 처음이다. 안익태는 그 애국가(愛國歌)를 주제로 하여 1936년 자신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였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한국의 국가(國歌)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애국가(愛國歌)는 안창호(安昌浩) 작사, 안익태(安益泰) 작곡의 노래이며,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 결론 : 대한민국(大韓民國) 애국가(愛國歌)는 1907년 03월 07일,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기 위해 현재의 가사를 작성했고, 1937년 안익태(安益泰) 선생이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작곡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의 국가(國歌)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애국가(愛國歌)의 제작과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동양 사상의 상제(上帝) 언어가 사라지고, 하나님이란 언어가 삽입됨으로써, 동양의 상제(上帝) 문화는 점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결국, 애국가(愛國歌)는 서양인들에 의해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상제(上帝) 문화의 핵심 언어인 상제(上帝)라는 언어가 삭제된 것이다. 애국가의 초창기 시절에는 상제(上帝)라는 언어가 많이 나왔다가 점점 서양인들의 문화가 정치 사회적으로 득세(得勢)하는 과정 속에서 상제(上帝)라는 언어가 외면된 것을 알 수 있다. (글: 진단검사의학과전문의, 최병문)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