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 음악

이치(梨峙) 대첩과 만시지탄(晩時之歎)

마도러스 2014. 4. 26. 10:55


이치(梨峙) 대첩과 만시지탄(晩時之歎)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때가 지났음을 안타까워 탄식(歎息)하는 것을 말한다. 1592년 04월 13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한 날이다. 부산(釜山)으로 상륙한 왜적은 1592년 05월 03일 한양(漢陽)에 입성했으며, 06월 15일 평양(平壤)을 점령했다. 하지만, 호남(湖南)에는 왜적이 들어오지 못 했다. 전라도의 의병(義兵)들이 웅치(전북 완주 소양면과 진안 부귀면 사이의 모래재)와 이치(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잘 막아냈기 때문이다. 1592년 07월 08일 권율(權慄) 장군과 황진(黃進) 장군이 이끄는 관군은 의병 1500명과 함께 이치(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전투에서 왜군 2만여명의 진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치(梨峙)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閑山島) 대첩, 권율의 행주(幸州)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다. 그 후, 왜군은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이치(梨峙) 대첩은 군량미(軍糧米)의 현지 보급을 꾀하고자 했던 왜적의 전략을 차단하고 조선의 곡창지(穀倉地) 호남(湖南)을 방어해 낸 전투였으며, 조선군이 육지에서 일본군과 대규모 정면 충돌해서 승리를 쟁취한 첫번째 전투였다. 같은 시기에 전라도의 바닷길은 이순신 장군이 1592년 7월 6일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을 통해서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의 한양(漢陽)과 평양(平壤)이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선(朝鮮)의 임금은 의주(義州)로 도망갔다. 이미 조선(朝鮮)의 대부분은 좌초되어 거의 폐허가 되어 버렸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각골지통(刻骨之痛), 뼈에 사무치는 통증을 느낄 수 밖에 없다. 1593년 07월 16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사헌부(司憲府)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는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순신(李舜臣)이 진중(陣中)에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호남 예찬론도 아니며, 단지 그것은 호남을 사수하지 않으면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말이었다. 전라도 해안은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다도해와 바다 물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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