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인간의 죽음(Death)이란 과연 무엇인가?

마도러스 2014. 2. 13. 14:17


인간의 죽음(Death)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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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今世)과 저승(黃泉)은 동전(銅錢)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그 자체의 생명(生命)은 죽은 것이 아니라 명(命)줄이 떨어져 나간다. 생명(生命)은 계속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다만 육체의 껍데기와 허물만 벗어 나갈 뿐이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일정 공간을 여행하기 위해 빌린 렌트 카(Lent Car)하고 똑같다. 죽으면 버스 혹은 비행기만 갈아 탈 뿐이다. 죽음(Death)은 현상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 접선이 이루어져 그 본체(本體)가 공간 차원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공간 내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 세계는 다른 세계와 동시에 접점을 이루고 있다. 또 다른 세계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肉身)은 지구상에 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가지만, 그동안 경험하고 축적한 정보들을 간직하고 우주 공간에 영혼(靈魂)의 상태로 또 다른 삶을 영위하게 된다. 동전(銅錢)의 앞면과 뒷면처럼 각각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승(今世)과 저승(黃泉)을 앞치락 뒷치락하며 윤회(輪廻) 환생(還生)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 종교(宗敎)에서는 그들의 빈약한 교리 때문에 천당(天堂)과 지옥(地獄) 2가지만 있는 것처럼 2분법(二分法)으로 오도(誤導)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많은 다양한 사후(死後) 세계가 존재한다. 진정한 종교(宗敎)는 살아 있을 때의 행복과 죽어서의 영예(榮譽)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의 방법론을 제시해야 인간 영혼의 성숙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흑백(黑白) 논리에 빠져들면 안 된다. 천당(天堂)과 지옥(地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 인간의 육신(肉身)은 부모의 몸을 통해 태어난 후, 거듭 성장(成長)하고 일정 단계를 지나면 점점 쇠퇴해져 버린다. 이빨도 점차 빠지고 오장육부(五臟六腑)는 노화(老化)되고 머리는 희게 변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인생살이 끝에 결국 죽음의 단계에 이른다. 물질계(物質界)를 떠나 영혼계(靈魂界)로 간다.

 

■ 삶(生)과 죽음(死)을 통해 서로 환생(還生)을 거듭한다.


사후(死後) 세계 또한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의 다양한 세상이다. (生)과 죽음(死)은 동전(銅錢)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앞면이 100원짜리 동전이면, 뒷면 또한 100원짜리이다. 앞면이 500원짜리 동전이면, 뒷면 또한 500원짜리이다. 이승(今世)에서 100짜리 역할을 못 하고 자살하면, 강등(降等)해서 한 단계 더 불리한 50원짜리 역할이 주어지고 이승(今世)보다 더 어렵고 척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자연 법칙에 따라 그 뿌리와 줄기가 실하면 열매(果實)가 반드시 실하게 열리고, 그 열매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환생(還生)하여 (種)가 뿌려지고 싹이 튼 후, 뿌리와 줄기를 왕성하게 뻗게 된다. (生)은 죽음(死)으로부터 비롯되고, 죽음(死)은 (生)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生)과 죽음(死)은 서로 돌고 돌며, 반복하여 환생(還生)을 거듭한다.

 

인간의 육신(肉身)은 땅(地)의 기운을 받고 때어나서 땅(地) 위에서 살다가 다시 땅(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靈魂)은 하늘(天)의 기운을 받고 때어나서 인간(人間) 속에서 살다가 다시 하늘(天)로 돌아간다. 그동안 경험하고 체득한 엄청난 정보(情報)들은 영혼(靈魂) 속에 저장되어 영혼의 하늘로 돌아간다. 매우 많은 양의 정보들이 압축되어 영혼 속에 저장된다.


■ 죽음은 신명계(神明界)에서의 또 다른 탄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체험할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른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불안. 공포. 비애를 느끼게 된다. 죽음은 두려워하면 할수록 한층 더 두려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두렵고 고통스러운가? 죽음은 그다지 두려운 것도 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생에 태어나는 것처럼, 죽음이란 영계(靈界)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가(喪家) 집에 가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人間界)에서는 슬픔에 잠겨 있지만, 죽은 사람의 세계(神明界)에서는 축제를 열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쪽에서의 죽음은 저쪽 세상에서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신명계(神明界)에서의 또 다른 탄생이다. 영계(靈界)로 들어간 영혼(靈魂)은 살아 있을 때의 상념(想念)과 수행(修行)의 정도에 따라 합당한 단계에 머물게 된다. 물론 영계(靈界)에서도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높은 단계로 이행해 간다. 그런데, 영계(靈界)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저급령(低級靈)도 적지 않다.


인간은 이승(今世)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삶을 통하여 그동안 어떠한 귀중한 정보(情報)를 터득하고 체험(體驗)했느냐에 따라서 다음 죽음 이후의 사후(死後) 세계가 결정된다. 마치 초등학교(初等學校)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중학교(中學校)의 생활과 운명(運命)이 어느 정도 결정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때의 상황과 그 때의 형국에 따라서 운명(運命) 결정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이승(今世)에서의 삶의 무대는 수련(修鍊)의 도장(道場)이다.


인간의 영혼(靈魂)에는 모든 정보들이 기록되고 압축되어 저장된다. 인간의 영혼 역시 식물의 씨앗처럼 볼품 없는 쭉정이가 있고, 품질 좋은 알갱이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이승(今世)에서 짧은 시간을 살다가 결국 저승(黃泉)으로 가지만,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단련된 지식들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쭉정이 영혼(靈魂)이 되기도 하고, 알갱이 영혼(靈魂)이 되기도 한다.

 

우주 만물과 생명은 물질과 영혼의 정보 조합에 의해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분화되어 생명체(生命體)로 나타난다. 물질과 영혼의 정보는 하나씩 모여서 짝이 되고 여러 개의 정보가 모인 상태에서 어떠한 힘과 에너지가 작용하여 새로운 생명이 잉태(孕胎)되고, 새로운 물체가 창조(創造)되어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生命)은 각기 특유의 영혼(靈魂) 정보를 지니고 있고, 그 영혼(靈魂) 정보가 적당한 신통(神通)한 에너지와 결합하면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로 화생(化生)되어 나타난다. 모든 생명체들은 그들의 고유한 영혼(靈魂) 정보를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에 존엄한 가치(價値)를 발휘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이승(今世)에서 살아 있을 때, 저승(黃泉)에서 영혼으로 존재할 때 보다 더 많고 가치있는 체험(體驗)을 한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서 잘 하느니 살아서 잘 하라는 것이다. 이승(今世)에서의 삶의 무대는 좋은 학습과 수련(修鍊)의 도장(道場)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 상에서의 삶을 통해 보다 가장 많이 체험(體驗)하고, 보다 많이 공부하며 단련하게 된다. 인생살이가 힘들고 어렵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자살(自殺)해서는 안 된다. 학습(學習)과 단련(鍛鍊)의 기회를 놓치는 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잘못된 종교(宗敎)는 없어져야 한다.


지금의 종교(宗敎)는 원시 시대와 농경 사회의 유물이다.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해 주지도 구원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다. 산업 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救援)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 사회는 산업 사회 보다 더욱 투명하게 종교(宗敎)를 파헤칠 수 있다. 신화(神話). 신비(神秘). 비밀주의는 이제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종교(宗敎)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종교 없는 세상이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잘못된 종교(宗敎)는 없어져야 하고, 오직 인간적인 삶이 보장받는 세상이 존경받을 뿐이다. 종교라는 것이 원래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오히려 인간이 종교(宗敎) 파행(跛行)을 근심하고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신(神)이 아닌 것이 없다. 어느 이름 모를 행성의 먼지 알갱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신(神)의 나타남이다. 인간과 신(神)이 둘이 아니다. 누구나 수련(修練)만 잘 하면, 모두 예수(Jesus). 석가(釋迦). 공자(孔子)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누구나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제는 지금까지 지켜 온 모든 형식적인 종교들을 뛰어 넘어야 한다. 빛을 가리며 시야를 막고 있는 어두운 구름장들을 말끔히 걷어 내야 한다.


종교를 초월하는 문화(文化)가 신앙이 될 것이다.


문화(文化)가 종교보다 우선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장차, 종교를 초월하는 문화(文化)가 신앙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훌륭한 문화(文化)는 종교를 뛰어넘는 믿음과 신앙(信仰)을 안겨 준다. 유명 TV 인기 탤런트(talent)에 대해 열광하는 팬들은 그를 단순히 스타가 아닌 그 이상처럼 느낀다. 그를 신성(神聖)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몸짓 손짓 목소리에 일상의 희열(喜悅)을 느낀다.


이제, 종교(宗敎)의 미신(迷信)적인 굴레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가 갖는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현재의 모든 종교는 미신(迷信)의 굴레와 집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집단 이기주의가 없는 종교 그것이 바로 문화(文化)가 아니겠는가?


아미타불 불교(佛敎)인들은 팔만경전 공부하여 극락(極樂)간단 말을 하지만, 그 곳을 가는 길은 희미하다. 기독교(基督敎)에 입도한 천당(天堂)인들은 천당을 좋게 말하나 구만장천(九萬長天) 멀고 머니, 일평생엔 다 못 간다. 유교(儒敎)는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사람의 바른 도리(道理)를 말하나 거만방자(倨慢放恣) 시기질투(猜忌嫉妬) 음사욕정(淫事欲情) 뿐이더라. (격암유록)

 

하늘의 도리를 가르친 기독교(基督敎)와 땅의 도리를 가르친 불교(佛敎)와 사람의 도리를 가르친 유교(儒敎)가 해(日) 저무는 운(運)을 맡은 고로, 안개 속을 방황하며 길을 잃는 이치로서 유교. 불교. 기독교의 냇물이 각각 파벌로 나누어져 서로 이기고 서로 이익된다고 말하지만, 천당(天堂)인지 극락(極樂)인지 피차(彼此) 다 못 간다. 춘말하초(春末夏初) 사월천(四月天)을 당하고 보니, 모두 허사(虛事)로다. (격암유록)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가르침을 읽는 유교(儒敎)의 선비들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격이며, 염불하는 불교(佛敎)의 스님들은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았다고 장담(壯談)하며, 각기 삶과 죽음을 믿고 따르나, 진정한 도(道)를 모르며 허송세월(虛送歲月)하고 지내니 한탄스럽네! 나라 밖의 하늘을 믿는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유아독존(唯我獨尊)격으로 하느님을 믿으니 대복(大福)이 내려도 받지 못하리라. (격암유록) [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