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원한(怨恨)

마도러스 2014. 2. 10. 17:37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원한(怨恨)


  스크랩: http://blog.daum.net/dosu92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端宗)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은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1452년 단종 즉위 후,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455년(단종3년)에 단종(端宗)에게서 왕위를 받아 왕권을 찬탈한다. 세조(수양대군)가 왕좌에 오르자 그를 도운 공신들은 단종(端宗)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후, 강원도 영월로 귀향을 보내 평민으로 만들고는 다시 죽여야 한다고 간하였다.


■ 세조에게 내린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1457년(세조12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세조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나타났다. 현덕왕후는 얼굴에 분노의 빛을 띠고 세조(수양대군)를 향하여 꾸짖었다.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도 그래도 부족하여 벽지인 강원도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눈을 부릅뜨고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세조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한참만에야 겨우 현덕왕후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다. “지독한 놈! 그래도 살고는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현덕왕후(顯德王后)세조의 몸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세조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 뒤였다. 세조는 반정 이후에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이런 꿈을 꾸고서 마음이 섬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마 후 동궁 내시가 달려와서 황급히 아뢰었다. “전하, 동궁의 최내관이옵니다. 방금 전에 세자 마마께서 잠을 주무시다가 가위에 눌리셔서 매우 위중하시나이다.” 이 말을 듣고 난 세조가 급히 동궁에 행차해 보니 이미 세자는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 실로 약 한 첩 써볼 겨를도 없는 급변이었다.

 

세조는 맏아들의 죽음이 형수인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기고, 관리를 보내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평민의 무덤(墓)으로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세조의 명을 받은 신하가 현덕왕후의 능을 파고 관을 꺼내려 했지만 웬일인지 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 능에서 꺼내진 관은 34일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당했다가 물가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한편, 그 이후 세조에게는 또 하나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현덕왕후가 뱉은 침을 맞은 곳에서 흉칙한 종기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면서 점점 악화되었다.

세조는 전국 방방곡곡의 명의를 불러모아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신통치 않았고, 그 어떤 신약을 써 보아도 별 효험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려보기도 하지만 효험이 없었고, 결국 죽는 날까지 이 악성 피부병에 시달려야 했다.


■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일으킨 기이한 사건


세월이 흐른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소릉(현덕왕후의 능호)의 복위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와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한 사건을 계기로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1513년(중종8년) 2월 18일 종묘에 있는 소나무가 벼락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신하들이 소릉을 회복하기를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 하지만, 왕후의 관에 대해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많은 병사들을 풀어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담당 관원이 꿈을 꾸었다. 왕후의 복장을 한 여인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너희들이 수고하는구나. 그러나 애쓰지 않아도 내일은 관 있는 곳을 알게 되리라.” 깜짝 놀란 관원은 얼른 엎드려 절을 한 뒤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꿈에서 본 지형을 찾아내 그 주변을 파 보자 왕후의 관이 나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관과 시신은 생각보다 손상이 적었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소릉을 복위할 수 있었다.

 

기이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덕왕후의 능을 문종의 옆에다 모셨는데, 두 능 사이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소나무들이 모두 시커멓게 말라죽어 버리는 게 아닌가! 중종이 즉시 사람을 시켜 소나무를 베어내자, 마침내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은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 세조(수양대군)의 맏아들 의경 세자와 둘째 아들 예종은 발이 썩는 질병으로 각각 20세에 요절했다. 세조의 손자성종(成宗) 역시 소갈증을 심하게 앓다가 38세로 붕어했다. 의경 세자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급사했고,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사망했다.


2) 세조(수양대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 세자(1438-1457)는 단종이 붕어하기 한달 전인 1457년 9월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는데,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 혼령의 살(殺)을 맞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횡사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죽기 전에 늘 현덕 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기도 했다.


3) 문종의 비(妃)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1418-1441)는 1541년 단종을 출생하고 사흘만에 죽는다. 세조(수양대군) 즉위 후 단종의 생모라는 이유로 종묘에서 신주가 철폐되고 능은 파헤쳐져 물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한다. 그후 1513년(중종8년)에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고 신주가 종묘에 봉안된다. 이렇듯 현덕 왕후는 살아있을 때보다 사후에 더 기구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4) 일설에 의하면 세조(수양대군)가 걸린 이 악성 피부병은 다름이 아니라 문둥병이었다고 한다. 또한 세조가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 동자를 만나 쾌유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