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대예언.비밀

한국은 통일되고, 세계의 중심이 된다.

마도러스 2013. 12. 20. 08:56


한국은 통일되고, 세계의 중심이 된다.


■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 최고의 풍수학자며 지관인 지창룡(池昌龍) 박사 예언에 의하면, “다음에는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그 후 혜성같이 나타나 대통령이 될 것이나 가장 불쌍한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막간(幕間) 후에 한사람의 쫓겨나는 대통령이 나올 것인데, 그 다음에는성군(聖君)이 나와 나라를 부강케 하고 나라를 우뚝서게 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남북 통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된다. 통일이 멀지 않았다. 그 때가 되면, 한국(韓國)이 미래 세계의 주역(主役)이 될 것이다


세상에 가장 널리 유포된 통큰 협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으면 지옥간다!”는 것이다. 천국만 간다고 하면, 몸 주고 마음 주고 돈도 바친다. 만약, 믿지 않으면, 모조리 지옥에 보내질 것이라고 목청 돋구면서 협박한다. 만약, 그런 신(神)이 실제로 있다면, 그런 신(神)은 신(神)이 아니라 악마(惡魔)일 것이다.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정말 허무맹랑한 악마(惡魔)의 속삭임이다. 만인에게서 추앙(推仰)받는 세종(世宗) 대왕 역시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지옥(地獄)에 갔다는 논리이다.

 

종교는 결국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해서 좀먹고 사는 존재일 뿐이다. 진정한 천국(天國)은 종교와 상관 없이 진정한 자유가 보장받는 것이다. 장차 모든 종교(宗敎)의 껍데기가 벗겨진다. 종교(宗敎)의 거짓 실체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선량한 인간을 협박하는 모든 종교는 붕괴될 것이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 세상의 종교(宗敎)는 모두 인간이 만들었다. 사람을 협박하는 모든 종교가 망해야 세상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 장차, 천박한 종교(宗敎)의 껍데기가 벗겨질 것이다.


■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 경영학부 4학년 주현우 학생이 대자보에 쓴 ‘안녕들 하신지요?’ 물음에 전국 학생들이 ‘안녕하지 못 하다!’ ‘그 느낌 아니까!’ 라고 화답하면서 이제 전국적인 시국(時局) 열풍이 불고 있다. 그는 “수차례 불거진 부정 선거 의혹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 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 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입니다.” 또한, “IMF 이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년 수능을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기를 그리고, 무관심하기를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라며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라고 적었다. 


이어 “다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것은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라며,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라며 글을 마쳤다. 그의 대자보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를 통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1939년 03월 그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으나,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다. 1940년 04월 01일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25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고, 1944년 12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만주군 중위(中尉)로 임관되었으며,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의 열하성(熱河省) 주둔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그들의 주된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였고, 박정희(朴正熙)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다.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중위(中尉)로 근무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군의 충실한 장교’로 착실히 복무했다.


1945년 08월 15일 광복이 되자 만주 보병 제8단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1945년 0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중국(中國) 베이징(北京)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광복군(光復軍)에 편입되었다. 일본군(日本군) 장교로서 일본에 충성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했던 박정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갑자기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變身)하였다. 그는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05월 08일 미군(美軍)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05월 0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09월 조선 경비 사관 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졸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한 박정희는 강원도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미군(美軍)이 38선 경비 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 초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이 시절 국군의 연대 단위 기동 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육군 대위(大尉)로 진급했다. 그 뒤 육군 소령(少領)으로 진급, 1948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연루되었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던박정희(朴正熙)는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서 그동안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나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그는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일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실형을 면하게 된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0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육군 소령(少領)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0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감행될 때에 육군 중령(中領)으로 진급하고 대구(大邱)로 가는 육군 본부의 수송 지휘관을 맡았다. 1950년 10월 25일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11월 육군 준장(准將)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 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03월 20일 육군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07월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01월 부산 군수 기지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08월 12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는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이종찬(李鐘贊)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重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리 장면(張勉)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 본부로 박정희의 신원 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金炯一) 육군 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左翼) 빨갱이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張勉)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1960년 12월 15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윤보선(尹潽善)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그는 중령 김종필(金鍾泌)과 함께 1960년 09월부터 이미 군사 반란(反亂)을 계획했으며,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군사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부정 선거로 치러진 것에 항의했으며,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79년 10월 04일, 박정희(朴正熙)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 의원 제명 파동 등을 주도하였다. 결국, 1979년 10월 16일 부산(釜山)에서 민주 항쟁이 시작되었고, 부산. 마산 민주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8일 부산(釜山)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부마(釜馬)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 김재규(金載圭)는 “내가 거사(巨事)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釜馬)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어 4·19 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차지철(車智徹)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못 죽이겠느냐!’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거사(巨事)를 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박정희(朴正熙) 재임 기간(1963-1979)의 무역 적자 규모가 233억 달러였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 규모인 것이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쉽게 비유하면,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그래서,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전국 지가(地價)가 180배 이상 상승했고, 토지 불로 소득이 국민 소득의 무려 2.5배나 됐다. 불로(不勞) 소득의 천국이었고,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치였다. 연평균 물가 상승률을 보면, 이승만 22.7%, 박정희 14.7%, 김영삼 5.0%, 김대중 3.5%, 노무현 2.9%였다. 독재 정부 때에 물가가 한없이 상승했었고, 민주 정부 때에 물가가 안정되었다. 연평균 땅값 상승률통계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에 33.1%를 보여 매우 높은 상태에 도달했고, 민주주의 정권에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권 때 4.3%를 보이며 땅값이 안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961년 05월 16일 새벽 3시의 5.16 쿠데타! 이 치욕(恥辱)의 날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 박근혜, 결혼한 여성에게 무조건 퇴사 강요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육영 재단 이사장 시절 부설 유치원에서 근무했던 전직 교사가 "결혼하면 퇴사한다는 각서를 써야만 입사할 수 있었고, 젊은 여교사들에게 부당한 일들이 다수 있었다"고 육영 재단 입사 서약서 내용을 밝혔다. 이 교사는 박근혜 후보의 '여성 대통령론'은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1982년부터 4년 동안 육영 재단 어린이 회관 부설 유치원에서 근무한 강은주(가명)씨는 2012.11.28일한겨레 신문 기자와 만나 "육영 재단의 유치원 교사로 입사하려면 '결혼하면 퇴사(退社)한다'는 각서를 써야했다. 당시 유치원 중에는 그런 식의 각서를 요구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강씨가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다. 박근혜 후보는 1982년부터 육영 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동생 박근령씨와의 분쟁 끝에 1990년 이사장직에서 사임했다.


강씨는 "1980년대에는 사회 전체적으로 결혼한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유치원만큼은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대다수 여성들이 20대 초중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해서 결혼하기까지 불과 2-3년밖에 시간이 없다. 여러 유치원 교사를 경험했지만, 결혼하면 퇴사(退社)한다는 각서를 쓰는 경우는 육영 재단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 박근혜 이사장 취임 후, 사업 확대하면서 각종 노동력 동원


강씨는 육영재단 어린이 회관이 자행했던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강씨는"박근혜 후보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육영 재단 산하의 어린이 재단은 각종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어린이 과학관, 수영장, 스케이트장 등을 새로 운영하면서 유치원 교사들을 도우미, 매표소 판매원 등으로 노동력을 동원했다. 이런 일엔 따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씨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힌 배경은 박근혜 후보가 전면에 내세운 구호인 '여성 대통령론'은 위선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씨는 "육영 재단에 있을 때의 경력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아서 오랫동안 묻어뒀는데, 박근혜 후보가 여성 대통령을 구호로 내세워 밝히게 됐다. 여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가 결혼과 육아인데 퇴사(退社)를 강요하던 직장의 대표가 여성을 위하는 척 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