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고려(高麗) 500년, 조선(朝鮮) 500년 황제 간략사

마도러스 2013. 2. 13. 12:18

 

■ 고려(高麗) 500년, 조선(朝鮮) 500년 황제 간략사

 

 고려(高麗) 34대 황제 500년 역사  

 

1. 태조(太祖) 왕건(王建)(918-943)

                    : 궁예의 폭정으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황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민족융합정책으로 이름있는 호족들이 황실외척이 되어

                       혜종~광종때까지 황위 쟁탈전으로 8천명이 죽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2. 혜종(惠宗)황제(943-945): 왕건의 맏아들.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복동생,

                         왕요(정종).왕소(광종)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병사함.

3. 정종(定宗)황제(945-949): 왕건의 둘째 이복아들. 혜종의 대광인 왕규의 세력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으로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함  

        # 왕요(정종).왕소(광종)는 서경(평양) 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친 후,

           황도(개경)로 진입했고, 그것은 분명 쿠테타였다. 왕요(정종)는 정권을 장악한 후,

           혜종의 대광인 왕규의 무리 3백 명을 처형했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 대신들이었다.

4. 광종(光宗)황제(949-975): 왕건의 넷째 아들. 노비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하였으며

                    천 여명이 넘는 호족들을 숙청하여 전제황권을 확립하였다.

5. 경종(景宗)황제(975-981):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

6. 성종(成宗)황제(981-997): 왕건의 일곱째 아들인 욱(旭)의 둘째아들로 출생.

                    팔관회를 폐지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7. 목종(穆宗)황제(997-1009):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8. 현종(顯宗)황제(1009-1031):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안정을 꾀하고 문화가 발전시킴.

9. 덕종(德宗)황제(1031-1034): 2년 만에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고, 국사편찬 사업 완성.

10. 정종(靖宗)황제(1034-1046):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 문종(文宗)황제(1046-1083):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12. 순종(順宗)황제(1083-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 선종(宣宗)황제(1083-1094):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 등 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 헌종(獻宗)황제(1094-1095):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 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황위를 찬탈당함.

15. 숙종(肅宗)황제(1095-1122):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 예종(睿宗)황제(1105-1122):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진흥 시킴.

17. 인종(仁宗)황제(1122-1146):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겪었으나 선정을 베풀음.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18. 의종(毅宗)황제(1146-1170):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가,

                              무신정변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이의민에게 살해됨.

19. 명종(明宗)황제(1170-1197): 의종의 동생. 무신들의 추대로 즉위하고,

                                                유약하고 무능하여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패위 당함.

20. 신종(神宗)황제(1197-1204):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21. 희종(熙宗)황제(1204-1211): 신종의 맏아들. 이전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

                                                후에 희종7년에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패위 당하고

                                                최충헌은 차차 민심을 잃는 계기가 된다.

22. 강종(康宗)황제(1211-1213):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쫓겨났다가 최중헌에 의해 황위에 오름.

23. 고종(高宗)황제(1213-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뒤 몽고제국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고.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24. 원종(元宗,1259-1274): 장기전의 전투로 국토가 피패 해지자 몽고와 화친하고

                                        개성 환도를 단행.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겪음.

25. 충렬왕(忠烈,1274-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황제칭호에서 왕으로 강등되고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음.

26. 충선왕(忠宣,1308-1313):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 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1308년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27. 충숙왕(忠肅,1313-1330,1332-1339):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 만에 복위함.

28. 충혜왕(忠惠,1330-1332,1339-1344):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29. 충목왕(忠穆,1344-1348):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30. 충정왕(忠定,1348-1351):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혼란 겪었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 만에 폐위됨.

31. 공민왕(恭愍,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시름에 잠겼다.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32. 우왕(禑,1374-1388)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이성계에게 폐위됨.

33. 창왕(昌,1388-1389):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쫓은 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 10세 때 시해됨.

34. 공양왕(恭讓,1389-1392):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조선(朝鮮) 27대 황제 500년 역사  

 

1 (태조,1335~1408) : 조선을 건국하시고 조선의 기틀을 다지셨다.

2 (정조,1357~1419) : 여러 신기술 도입, 백성을 위한 정치.

3 (태종,1367~1422) : 조선의 국방 강화, 왕권 강화, 사병을 혁파, 의정부 설립

4 (세종,1397~1450) : 훈민정음 창제, 조선의 과학기술을 발달시킴,

                                 고유악보 정간보 창간, 집현전 설치

5 (문종,1414~1452) : 학문에 밝고 인품이 너그러우며 온후

6 (단종,1441~1457) : 온성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았으며 나난·무산의 두 성보를 설치

7 (세조,1417∼1468)(수양대군):  한국의 지리지와 지도를 찬수하게 하였으며 호패법 다시 시행.

8 (예종,1450∼1469) : 재위중 직전수조법을 제정.

9 (성종,1457∼1494) :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

10 연산군,1476~1506 :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들을 회유,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

11 (중종,1506-1544):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사림파중심의 지치주의적 이상정치 시도

12 (인종,1515~1545) : 3살 때부터 글을 읽었으며, 근검한 생활

13 (명종,1534~1567): 비변사를 상설기구로 승격. 군사문제를 총괄. 수차의 제조,

                                  《경국대전》간행

14 (선조,1552~1608):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을 대거 등용 (당시 임진왜란)

15 광해군,1575~1641 : 김제남의 난 , 인조반정, 대동법(경기도 국한 실시) 

16 (인조,1595~1649) :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

17 (효종,1619~1659) : 북벌준비, 1차 나선정벌, 2차 나선정벌에 참여함

18 (현종,1641~1674) :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북진정책을 추진

19 (숙종,1661~1720) : 왜란·호란 이후 토지개혁 추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20 (경종,1688~1724) : 파란 많은 일생. 재위 4년간은 “당쟁의 절정기”였다.

21 (영조,1694~1776) : 약해진 왕권 강화, 백성들을 위한 정치

22 (정조,1752~1800) : 수원화성 축조등 세종의 버금가는 성대를 누림

23 (순조,1790~1834) : 천주교에 대한 박해 계속하여, 교인들을 검거하여 탄압

24 (헌종,1827~1849) :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처형

25 (철종,1831~1863) : 기근 및 가뭄·화재·수해지역 등을 대상으로 빈민 구제책

26 (고종,1192~1259) :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

27 (순종,1874~1926) : 우리나라의 황태자, 제일 마지막왕

 

 

1393년 2월 태조 이성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꿈

1394년 10월 한양 천도(漢陽遷都)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이방원.5남)의 난 일어남, 정도전. 남은 등 죽임을 당함

1398년 (태조 7)년 9월 태조,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물려줌(定宗)

1400년 (정종,이방과-첫째 부인의 2남. 2)년 1월, 제2차 왕자(이방간.4남)의 난 발생

1400년 11월 정종, 이방원(芳遠)에게 왕위를 물려줌(太宗)

1401년 (태종,이방원-첫째 부인의 5남. 1)년 7월 신문고(申聞鼓)설치

1406년 (태종 6)년 3월 선교양종의 사사(寺社) 24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앰.

1414년 (태종 14)년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편 : 전국 8도 체제가 완성됨.

1416년 (태종 16)년 8월 승려들에게 도첩을 지급함 : (度牒制)

1420년 (세종 2)년 3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함

1425년 (세종 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을 사용

1425년 4월 저화 사용을 금지하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함

1429년 (세종11)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함

1434년 (세종 16)년 6월 장영실이 자격루(自擊漏,물시계)제작. 동북면에 6진(六鎭) 설치

1443년 (세종 25)년 2월 계해조약(癸亥條約)체결

1443년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1445년 (세종 27)년 4월 정인지(鄭麟趾), 권제(權踶)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편찬

1446년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 반포

1447년 (세종 29)년 7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완성, 안견(安堅)이 몽유도원도 그림

1452년 (문종 2)년 2월 김종서 등 『고려사절요』 편찬 : 연대순으로 정리한 고려 역사책.

1452년 5월 단종(端宗) 즉위.

1455년 (단종 3)년 윤6월 단종, 수양대군(世祖)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됨.

1456년 (세조 2)년 6월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됨(死六臣).

1457년 (세조 3)년 6월, 단종을  영월에 유배, 10월 영월에서 단종 사망.

1463년 (세조 9)년 11월 홍문관(弘文館) 설치.

1467년 (세조 13)년 5월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발생.

1468년 (세조 14) 3월 직전수조법을 제정하여 둔전의 민경을 허락함

1468년 (예종 1) 9월 7일 왕위를 이어받음,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     

                        10월 남이(南怡) 장군, 반역죄로 처형됨.

1470년 (성종 1)년 11월 경국대전(經國大典) 완성됨.

1478년 (성종 9)년 12월 서거정(徐居正),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함.

1482년 (성종 13)년 8월 폐비 윤씨(廢妃 尹氏)에게 사약을 내림.

1498년 (연산군 4)년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발생, 10월 김종직(金宗直) 문집을 불태움.

1504년 (연산군 10)년 10월 갑자사화(甲子士禍) 발생.

1506년 (연산군 12)년 9월 중종 반정,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

1510년 (중종 5)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발생.

1512년 (중종 7)년 8월 임신조약(壬申條約) 체결.

1517년 (중종 12)년 6월 축성사(築城司)를 비변사(備邊司)로 개칭.

1517년 (중종 12)년 12월 기묘사화(己卯士禍) 발생

1519년 (중종 14)년 4월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현량과(賢良科) 실시.

1522년 (중종 17)년 12월 소격서(昭格署)를 다시 설치, 도교 의식에 따라 하늘에 제사.

            # 조광조 등이 소격서는 이단이며,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천자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1518년 폐지되었다가 이때 부활됨, 그러나, 선조 때에 다시 폐지됨

1530년 (중종 25)년 이행(李荇),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찬

1539년 (중종 34)년 영조문(迎詔門)을 영은문(迎恩門)으로 개칭 (명나라 사신 숙소)

            # 1896년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

1543년 (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 건립 : 서원(書院)의 시초.

1545년 (인종 1)년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 발생.

1547년 (명종 2)년 2월 정미약조(丁未約條) 체결.

1550년 (명종 5)년 2월 이황의 요청에 따라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 편액하사

1555년 (명종 10)년 5월 을묘왜변(乙卯倭變) 일어남.

1559년 (명종 14)년 3월 임꺽정의 난(林巨正亂) 발생.

1572년 (선조 5)년 이율곡 선생과 성흔(成渾) 사이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서신왕래

1575년 (선조 8)년 7월 동서분당(東西分黨).

1580년 (선조 13)년 정철(鄭澈),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음.

1589년 (선조 22)년 10월 정여립 모반 사건(鄭汝立謀反事件) 발생.

1590년 (선조 23)년 3월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

                                   이 무렵,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뉨.

1592년 (선조 25)년 4.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4.30일 선조, 한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름.

                   5.29일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

                   6월 일본군, 진주성 공격, 논개(論介) 사망.

                   7월 말 곽재우(郭再祐)가 경상도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8월 금산 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 전산(七百義塚).

                   10월 진주대첩(晉州大捷).

1593년 (선조 26)년 2월 행주대첩(幸州大捷) : 함경,평안도의 일본군, 한성으로 퇴각.

1594년 (선조 27)년 2월 훈련도감(訓練都監) 설치.

1597년 (선조 30)년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 발발.

1598년 (선조 31)년 11월 노량 해전 : 이순신 함대, 일본 수군을 대파시킴.

1605년 (선조 38)년 4월 유정(惟政), 일본에서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옴.

1607년 (선조 40)년 이 해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을 지음.

1608년 (선조 41)년 2월 광해군(光海君) 즉위. 이 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함.

1610년 (광해군 2)년 8월 허준(許浚),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함.

1618년 (광해군 10)년 1월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함.

1619년 (광해군 11)년 3월 명에 보낸 원군 패배,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은 금에 항복.

1623년 (광해군 15)년 3월 인조 반정 발생, 서인이 광해군(光海君) 추방, 인조(仁祖)를 추대.

1626년 (인조 4)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발발.

1627년 (인조 5)년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 일어남.

1636년 (인조 14)년 2월 후금이 보낸 국서를 받지 않고 거절함.

1652년 (효종 5)년 이 해, 효종의 북벌정책(北伐政策)이 본격적으로 추진됨.

1653년 (효종 4)년 8월 네덜란드인 하멜(Hamel) 제주도 표착, 1666년 탈출, '하멜 표류기'

1654년 (효종 5)년 3월 제1차 나선정벌(羅禪征伐).

1659년 (효종 10)년 5월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

1674년 (현종 15)년 2월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

1680년 (숙종 6)년 4월 경신환국(庚申換局) :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

1683년 (숙종 9)년 4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1689년 1689 (숙종 15)년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 : 세자책봉 문제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1689년 6월 송시열(宋時烈), 사약을 받음.

1693년 (숙종 19)년 이 해 안용복(安龍福)이 독도에서 일본인을 축출

1694년 (숙종 20)년 3월 갑술옥사(甲戌獄事) : 노론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몰락함.

1701년 (숙종 27)년 10월 장희빈(張禧嬪), 사약을 받음.

1712년 (숙종 38)년 5월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1722년 (경종 3)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발생. 무자다병(無子多病)하였다.

                            재위 4년간은 “당쟁의 절정기”였다.

1725년 (영조 1)년 1월 탕평책 실시

1728년 (영조 4)년 3월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발생.

1741년 (영조 17)년 9월 난전(亂廛)을 엄히 금지함.

1750년 (영조 26)년 7월 균역법(均役法) 실시함.

1760년 (영조 36)년 6월 일성록(日省錄) 기록 시작(-1910), 국왕 언행과 정사 기록,

                                    정조가 일기를 쓰면서 시작.

1762년 (영조 38)년 윤5월 사도세자(思悼世子), 뒤주 속에 갇혀 죽음.

1770년 (영조 46)년 8월 『동국문헌비고』 완성

1776년 (영조 52)년 3월 정조(正祖)즉위.

                   7월 홍국영(洪國禜), 도승지로서 세도를 부림.

                   9월 규장각(奎章閣) 설치.

1783년 (정조 7)년. 이 무렵.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음.

1790년 (정조 14)년.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음

1791년 (정조 15)년 2월, 신해통공(辛亥通共) : 금난전권을 폐지함.

1797년 (정조 21)년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편찬

1801년 (순조 1)년 9월 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 帛書 事件) 일어남.

1805년 (순조 5)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勢道政治) 시작.

1811년 (순조 12)년 12월 평안도 농민전쟁(平安道 農民戰爭) 일어남.

1814년 (순조 13)년 제주도에서 민란 일어남.

1817년 (순조 17)년 김정희,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힘.

1831년 (순조 31)년 9월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조선 교구를 설치함.

1840년 (헌종 6)년 12월 왕대비, 수렴청정을 거둠.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1846년 (헌종 12)년 7월 김대건(金大建), 순교함.

1848년 (헌종 14)년 이양선(異樣船)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등지에 계속 나타남.

1861년 (철종 12)년 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간행함.

1862년 (철종 13)년 2월 진주 민란 일어남.

1863년 (철종 14)년 11월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 체포됨.

                    12월 고종(高宗)즉위 :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

1864년 (고종 1)년 3월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 대구에서 사형당함.

                  4월 서원 등에 토지와 재산을 보고하도록 명령(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 시작)

1865년 (고종 2)년 4월 경복궁 중건(景福宮重建)을 지시.

1866년 (고종 3)년 1월 병인박해 시작(-3월),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인 선교사 9명 처형

                  3월 민치록(憫致祿)의 딸을 왕비로 정함(憫妃).

                  7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발생.

                  7월 고종, 경복궁으로 옮김.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발생.

1868년 (고종 5)년 4월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 사건 발생.

1871년 (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발생.

1873년 (고종 10)년 최익현의 “계유상소”,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규탄, 물러나게 했고,

                    고종 친정(親政) 선포. 민씨 세도 정치 시작

1875년 (고종 12)년 운요우호 사건 발생.

1876년 (고종 13)년 1.17-19 강화에서 조일 수호 회담 열림.

1876년 4. 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 파견, 김기수를 단장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

1879년 (고종 16)년 12월, 지석영(池錫永)이 충주 덕산에서 40여명에게 종두법 처음 실시.

1880년 (고종 17)년 최시형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이 간행됨.

1881년 (고종 18)년 4.10 신사유람담(紳士遊覽團) 파견.

1881년 6월 최시형 『용담유사(龍潭遺詞)』간행.

1882년 (고종 19)년 4.6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언.

1882년 06.09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

1882년 7.17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체결됨.

1882년 8.1 민비 환궁.

1882년 8월 고종 황제 태극기를 도안 후, 수신사 박영효에게 일본에서 처음 사용하도록 허락

1882년 10월 조.중 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조인.

1882년 12.5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외교 및 재정 고문으로 초빙.

1883년 (고종 20)년 10.01 박문국,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

1884년 (고종 21)년 10.07 갑신정변(甲申政變) 발발.

1884년 10.24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주모자들이 일본으로 망명.

1885년 (고종 22)년 2.19 알렌(Alen. H.N.)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광혜원(廣惠院)설립.

1885년 3.1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발발.

1885년 8.3  아펜젤러(Appenxeller, H.G)가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 설립.

1886년 (고종 23)년 4.28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1889년 (고종 26)년 9.14 함경도 감사 조병식(趙秉式)이 함경도에 방곡령(防穀令) 실시.

1892년 (고종 29)년 11.1 동학교도 삼례 집회(參禮集會)를 개최.

1893년 (고종 30)년 3.11 동학교도 보은 집회(報恩集會)를 개최.

1894년 (고종 31)년 1.10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발발. 고부관아 점령.

1894년 3.21 농민군, 고부 백산에서 봉기.

1894년 4.6-7 농민군, 황토현에서 관군과 보부상의 연합부대를 물리침.

1894년 6.8-9 일본측, 조선에 내정 개혁 강요.

1894년 6.25 갑오개혁(甲午改革) 시작.

1894년 6-7월 농민군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廢政改革案)을 실시.

1894년 9.13 농민군 2차 봉기(農民軍二次蜂起).

1894년 11.28 전봉준(全琫準),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됨.

1895년 (고종 32)년 4.1 유길준(兪吉濬), 『서유견문록(西遊見聞)』간행.

1895년 8.20 을미사변(乙未事變) : 명성황후(明星皇后) 죽음.

1895년 11.15 단발령(斷髮令)을 내림.

1896년 (고종 33)년 1월 각지에서 을미의병(乙未義兵) 봉기.

1896년 2.11 아관파천(俄館播遷): 고종이 약 1년간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

1896년 4.7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 : 발행인 서재필(徐載弼).

1896년 07월 독립협회(獨立協會) 결성, 조선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1897년 (고종 34)년 8.14 연호 광무(光武)로 고침.

1897년 9월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움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즉위식 올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1897년 12.24 손병희 동학 3대 교주가 됨.

1898년 (고종 35)년 2.2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죽음

1898년 3.10 독립협회, 서울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 개최, 열강의 이권침탈 철회를 주장.

1898년 4.9 배재 학당 협성회가 최초의 일간 신문인 <매일신문> 창간.

1898년 5.29 서울 종현(鐘峴) 성당(현재의 명동 성당)준공.

1898년 9.5 장지연, 남구억이 <황성신문>을 발행.

1898년 10.29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 ‘헌의 6조(獻議六條)’를 올림.

1898년 11.4 정부, 독립협회의 해산과 주요 인물 검거를 명령함.

1898년 12.25 정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를 해산.

1899년 (고종 36)년 12.4 <독립신문> 폐간.

1901년 (고종 38)년 5.28 제주도 대정군에서 이재수의 난(李在守亂) 발생.

1901년 11.16 목포 부두 노동자 동맹 파업.

1902년 애국가(國歌), 독일인 에케르트 작곡. (현재곡: 안익태 1936년 비인에서 작곡)

1903년 (고종 40)년 4월, 압록강하류 용암포(龍巖浦)사건

                                     압록강 상류 삼림벌채 종업원 보호 구실 점령

1904년 (고종 41)년 2월23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 조선의 대일협력 강요.

1904년 (고종 41)년 08월 제1차 한일 협약 체결.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고문정치 실시

1904년 9월 송병준의 일진회와 이용구의 진보회가 일진회(一進會)로 통합됨.

1905년 (고종 42)년 7.29 가쓰라.태프트 밀약 성립.

1905년 8.12 제2차 영일동맹

1905년 9.5 포츠머드 강화 조약

1905년 11.18 을사조약(乙巳條約),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외교권 박탈

1905년 11.20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1905년 11.30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음력 11.04).

                     → 이듬해, 병오(1906)년, 최익현(1906), 신돌석(1906) 봉기

1906년 (고종 43)년 2.1 일제에 의한 “통감부(統監府)” 설치.

1906년 7.22 이인직(李人稙), 신소설 ‘혈의 누’를 만세보에 연재, 최초의 신소설.

1907년 (고종 44)년 1.29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시작됨.

1907년 4월 고종, 헤이그 밀사 파견.

1907년 7.16 이완용, 송병준이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

1907년 7.20 고종 퇴위, 순종(純宗) 즉위.

1907년 7.24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 : 정미7조약 체결, 군사권 박탈

1907년 8월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봉기 : 정미의병(丁未義兵)

                                                       (고종 강제퇴위, 정미7조약, 군사권박탈에 항거)

1907년 11.29 신민회(新民會) 설립.

1907년 12.6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 결성.

1908년 3.23 전명운, 장인환 스트븐스 저격.

1908년 11.1 최남선, 최초의 월간 종합지 소년 창간 :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년 12.28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년 07.12 기유각서, 사법권 박탈

1909년 10.26 안중근(安重根)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년 4.15. 주시경(周時經) 『국어문법』간행.

1910년 4월 이시영.이동녕.양기탁이 서간도.요령성.삼원보에 독립운동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군사교육기관 신흥강습소 설치.

1910년 8.29 

한일 합병조약 

공포, 입법권, 경찰권 박탈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와 한국통치 양도문서에 서명

1910년 9.10 황현(黃玹) 자결함.

1910년 9.1 <황성신문>, <대한민보> 폐간됨,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고쳐 총독부 기관지로 삼음.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