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일본, 조선국보 약탈 4678권 보관

마도러스 2010. 3. 24. 11:59

 

일본, 조선국보 약탈 4678권 보관


일본 왕실의 도서관인 궁내청에 소장된 한국 자료639종 4678책으로 전해진다. 약탈의 근거가 명확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120종 661책이다. 이 가운데 ‘조선 총독부 기증’이란 도장이 찍힌 게 79종 269책으로 그 대다수는 조선 왕실 의궤이다. 원래는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사고 등에 보관돼 전해졌으나,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일본 궁내청으로 불법 반출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한·일 강제 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된 한국 자료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2010.02.26일에는 이정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조선 왕실 의궤 반환 촉구 결의안’이 만장 일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 체결된 협정으로 문화재 인도 문제는 일단락됐다”며 반환에 부정적이다.


일본 왕실의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書陵)부’에서 발견한 의궤(儀軌)는 고동색 표지가 거의 다 찢겨 나가고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너무나 훼손 상태가 심했다. ‘왕세자 책례 도감 의궤’는 조선 시대 왕세자 책봉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가를 기술한 책이다.


의궤를 열람케 해준 궁내청 서릉부 직원은 “책장을 넘길 때 조심하세요!”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자칫하다 종이가 찢겨 나가거나 바스러질 것만 같아 차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훼손이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고는 단언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덜너덜해진 채 일본의 왕실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는 조선의 사료를 보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의궤(儀軌)는 조선 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2007년 『조선 왕조 실록』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실 기록 문화의 정수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소중한 의궤는 우리 땅이 아닌 일본의 왕실 도서관에서 이처럼 남아 있었다.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둘레 5㎞의 거대한 황궁은 일왕(일본에서는 천황)이 사는 곳이다. 황궁 안에는 일왕 내외의 거처를 비롯, 일본 왕실을 담당하는 행정 부처인 ‘궁내청’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서릉부가 있다.


일본 황궁 북쪽 ‘기타하네바시(北桔橋) 문’으로 궁내청에 들어간 것은 2010.03.16일이다. 기타하네바시 문에서 출입 허가증을 발부받은 뒤 걸어서 왼편으로 2-3분 들어가니 4층짜리 서릉부 건물이 나타났다. 1층 왼쪽 끝 방이 열람실이었다.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했다. 휴대전화나 카메라는 물론이고 볼펜. 샤프. 지우개도 금지였다.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했고 화장실에서 한 번, 열람실 안에서 또 한 번 손에 소독약으로 세척을 받아야 했다. 열람실에 들어가니 내부에는 4인용 테이블이 4개 놓여 있고, 서릉부 직원 4명 가량이 열람자들을 철저히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 궁내청 소장도서에서 경연 직인이 확인돼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연 도서 중 대표격인 책은 ‘통전(通典)’이다. 고려(高麗) 시대 송나라에서 수입해 조선 왕실까지 이어서 소장했던 책자이며, 두 왕실에서 내리 소장했던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국내에도 없고 일본 궁내청에 소장돼 있는 것이 유일본이다. 권말에는 고려 왕조 숙종 재위 6년인 신사(辛巳)년(1101년)에 송나라에서 수입했음을 보여주는 직인 ‘고려국(高麗國)十四葉辛巳歲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通元年’이 찍혀 있었다.


중국 송나라 연호 ‘건중정국 원년’과 요나라 연호 ‘건통원년’도 1101년에 해당한다. 18년째 해외 문화재 반환 조사를 해온 박상국 한국 문화유산 연구원 원장은 “‘十四葉’은 14대 왕임을 뜻하는 듯하나 숙종은 15대 왕이므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며 “이런 숫자 착오는 옛 자료에선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이 직인 또한 일본 궁내청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연 서적인 통전은 궁내청에 20권짜리로 제본되어 보관돼 있었다. 경연은 역대 임금이 신하들과 정기적으로 교양 습득을 위해 받던 교양강좌 책자이다. 이 중 통전(通典)은 당(唐)나라의 재상(宰相) 두우(杜佑 735-812)가 30여 년에 걸쳐 편찬한 제도사(制度史) 책자이다.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에 송나라에서 수입해 조선 왕실까지 이어서 소장했던 책자이다.


열람실에 앉아 통전통전(通典)의 책갈피를 펼치니 가장 앞 부분에는 가로 세로 3.8㎝ 정사각형 직인 안에 조선의 왕실 도서에 찍도록 했다는 ‘경연(經筵)’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흥분을 가라 앉히며 책갈피를 넘기다 권말의 직인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조선왕실 의궤 환수 위원회 간사인 혜문 스님은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이어 소장됐던 책자라는 점에서 문화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며 “일본 궁내청의 사료에서 고려국의 직인이 확인됐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일 궁내청의 소장 자료 목록을 조사해 온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북송(北宋)으로부터 건너왔던 ‘통전(通典)’은 현재 국내는 물론 어디에도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엄청난 가치를 갖는 책자”라고 강조했다.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은 조선 시대의 의학과 관습, 군의 역사 등을 소개한 제실도서(帝室圖書)의 대표격인 본문이되는 책이다.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 책을 펴는 순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역의 본문에 1466년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아 놓은 책이다. 일본 궁내청 왕실 도서관에서 한글로 돼 있는 자료를 보게 되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예컨대 ‘先면 迷고 後면 得리니 主利니라’이란 표기 뒤에는 뜻을 풀이해 ‘먼저 하면 미혹하고 뒤에 하면 얻으리니 이로움을 주로 한다’는 해석이 붙어 있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1592~98) 때 유출됐던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이 책의 각 권 제일 앞부분에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란 붉은 색 도장이 큼지막이 찍혀 있었다.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의 본문에 ‘乾은 元코 亨코 利코 貞니라’란 문장도 보인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덕을 나타내는 말로서, 세상 만물은 봄의 덕인 원(元)에 바탕하여 생겨 나오며, 여름의 덕인 형(亨)으로 자라게 되고, 가을의 덕인 이(利)로 결실을 거두어, 겨울의 덕인 정(貞)으로 갈무리되니, 삼라만상의 생장수장(生長收藏)이 곧 하늘(乾)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네 가지 덕에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규장각과 대한제국 제실 도서관에 있던 제실도서(帝室圖書)들이 고스란히 조선총 독부로 넘어갔고, 이 중 일부가 일본 궁내청에 기증 형식으로 넘어간 것이다.


제실도서(帝室圖書)의 하나인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는 전국 시대의 손무(孫武)에서 당나라 곽숭도(郭崇韜)에 이르는 중국 역대 명장 94명에 대한 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조선조 임금들이 교양으로 새겨두기 위해 소장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눈에 뜨인 건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였다. 처참하게 시해돼 주검조차 찾지 못한 채 1897년 2년2개월 만에 치러진 명성 황후의 국장 모습을 기록한 자료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한 이유로 ‘명성황후 살해’를 꼽았듯 구한말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과 맞물려 있는 가치 있는 사료이다. 자줏빛 표지에 ‘개국 504년 을미 10월(開國五百四年乙未十月)’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글씨는 명성 황후가 시해된 1895년 10월을  뜻한다. ‘오대산상(五臺山上)’은 이 의궤가 오대산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4권으로 구성된 ‘국장도감의궤’의 각 권 맨 뒷장에는 ‘대정 11년(1922년) 5월 조선 총독부 기증’이란 글자가 새겨진 직사각형 모양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었다. 조선 총독부가 불법 반출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낸 증거였다.


제2권에는 명성황후 국장의 모습이 다양한 색채로 정교하게 묘사돼 있었다. 당시 명성황후 국장 행렬엔 26대의 가마가 사용됐고 2035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궤는 여러 권을 만들어 분산 보관한다. 국내엔 서울대 규장각에 다섯 질이 남아 있다. 총을 메고 칼을 찬 병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상여 앞으론 곡(哭)을 담당하는 궁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림들이었다.


명성황후 국장 행렬의 왼쪽과 오른쪽 각각 둘씩 창과 방패를 든 방상시 4명이 그려져 있었다. 곰 가죽으로 든 붉은 색 가면을 쓰고 4개의 눈을 단 흉측한 얼굴이다. 잡귀의 위협 없이 편안히 잠드시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장례에 쓰일 가마 26가지의 각 형태와 색깔도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일일이 손으로 그려내 그림으로 실록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입체감이 대단했다. 말을 탄 중대장의 모습이나 말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어떻게 이렇게 정교할 수가 있나”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또한 3권으로 이뤄진 명성 황후 민씨의 빈전. 혼전 의궤를 내용으로 하는 ‘빈전혼전(殯殿魂殿)도감의궤’는 제사상에서 약과나 떡, 실과 향초의 위치, 그리고 단상의 구도를 정교하게 묘사해 놓고 있었다. ‘참 대단하다.’란 찬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4시간 동안의 열람을 마치고 자료를 다시 일 왕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기분은 착잡하기만 했다. (중앙일보 도쿄 김현기 특파원, 입력: 201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