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학.성공비결

삼성(三星)의 신(新)경영. 창조 경영

마도러스 2010. 1. 20. 14:14

 

삼성(三星)의 신(新)경영. 창조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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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중교리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6년 2명의 지인과 함께 경남 마산에 협동 정미소를 창업했다. 사업 첫해에 손실을 본 이병철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뒤, 새로운 방식으로 도정업과 정미소를 운영하여 흑자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그 후, 그는 부동산 업종에 진출했다가 1937년 중일 전쟁 여파로 은행 대출이 중단되면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38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다시 무역업에 나서기로 하고, 대구 인교동에 ‘삼성 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1948년 이병철은 잘나가던 대구 삼성 상회를 청산하고, 서울로 진출했고, 삼성(三星) 물산을 설립했다.


1948년, 삼성(三星) 물산은 사원 주주제를 최초 도입하여 회사 수익이 나면 지분에 따라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창업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란 놀라운 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회사 경영 철학으로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란 3가지를 내 걸었다.


1953년, 제일 제당을 설립하면서 국민들에게 설탕을 수입품의 1/3 가격으로 값싸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1955년, 제일 모직을 설립하면서 그동안 수입품이 독점했던 양복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1966년 또 한번의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했다. 소위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돼 한국 비료 공장을 국가에 헌납했다. 사카린 사건의 발단은 창고에 보관 중이던 사카린 원료 약품이 정부의 허가없이 시중에 유출돼 판매되면서 비롯됐다. 10년간의 열정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고, 이 사건으로 오랜 시간 외유와 칩거 생활에 들어갔지만 그의 열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실패를 발판 삼아 다시 꿋꿋하게 기업가의 길을 갔다. 


그는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고 했다. 그래서, 1969년 삼성 전자를 설립했다. 한편, 그는 1976년 위암 진단을 받았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병마를 이겨냈다. 그 후 10여년이나 더 생존했다. 이 기간 동안 삼성 중공업을 설립했고, 거제 조선소를 만들었으며, 삼성 석유 화학을 창업하는 등 끝없는 도전을 했다.

 

사람은 병으로 쇠약해져 죽는 게 아니라, 매일 도(道)를 닦다가 다 닦으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반일(反日)감정이 커서 일본을 자주 오가면 '친일파' 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일본이 아무리 싫어도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일본을 태평양 멀리 던져 버릴 순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학력에 50점, 인물에 50점을 배정하곤 했다. 인물은 용모가 단정하고 건강하고, 능동적인 성격을 우위에 두었다. 학과 성적이 좋다고 해서 꼭 훌륭한 인재라고 보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 동양 방송 이사로 있던 아들 이건희는 아버지 이병철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망설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희 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다가올 시대는 전자의 시대이고, 반도체가 전자 산업의 핵심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이건희 이사는 사재를 털어 부천에 있는 한국 반도체를 인수했고 삼섬 반도체의 모체가 됐다. 그리고, 삼성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삼성 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처,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위기 의식으로 ‘신(新)경영’에 돌입했다. 신(新)경영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1995년 3월 경북 구미에서 품질 미달의 삼성 휴대폰 15만대가 불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삼성 임직원에게 ‘신(新)경영’이 얼마나 엄중한 과제인지를 깨우치게 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삼성 전자는 품질을 우선시 하는 경영에 본격 착수하게 됐다. 한편, 이건희 회장은 2000년 폐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는 험난한 과정도 겪어야 했다.


2006년 이건희 회장은 2단계 창조(創造) 경영’에 착수했다. 2006년 9월 미국 뉴욕 사장단 회의에서 “20세기 경영과 21세기 경영은 다르다. 20세기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되지만, 이제는 품질의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21세기에는 디자인과 마케팅, 연구개발(R&D) 등이 복합적으로 융화된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며 창조 경영을 역설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에는 창조적 열정이 필요하다"며, 창조 경영의 화두를 제시했다. 그 뒤 '창조적 열정', '창조적 경영', '창조적 상상력' 이 곧 삼성의 좌표가 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회장직을 1987년 아버지 이병철로부터 물려 받은 후, 2002년까지 14년 동안 삼성을 14배로 키웠다.


하지만, 2008년 초에 이건희 회장은 양도 소득세 465억원 (6년간) 포탈 및 차명 주식 거래 등의 혐의로 입건되는 불명예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2008년 4월 회장직을 사퇴했다. 한편, 삼성 전자는 2009년 자율 복장제 및 자율 출근제를 도입했다. 또한 성과 보상 시스템도 일 잘 하는 사람 보다 창조적 사람이 더 많은 보수를 받도록 고치는 작업도 진행했다.


그 후, 삼성 전자는 2009년에는 세계 IT 업계 1위에 오르게 됐고, 2009년 3611건의 특허를 따내 4년 연속 세계 2위 자리를 지켰다. 2009.12.29일, 이건희 회장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활동를 위한 정부의 방침으로 특별 사면을 받았다.


창조적 혁신과 개혁은 세계와 경쟁하고 미래와 경쟁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문화는 세상에서 도태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결국, 문화를 혁신하고 문화를 개혁하는 자가 미래 문명을 지배하게 됩니다. 왜냐면, 문화 산업(CT. culture technology)은 정보 산업(IT). 생명 산업(BT)과 함께 미래의 3대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의 창조적 혁신과 개혁은 미래 성공의 필수 조건입니다. (글 편집 :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