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三國).고려

광개토대왕, 후연(後燕)의 수도 북경까지 공략

마도러스 2009. 5. 16. 14:10

 

광개토대왕, 후연(後燕)의 수도 북경까지 공략  


게릴라식 기습작전, 5C 동북아 패권은는 중국 아닌 고구려.  

 

 

고구려가 전성기로 치닫던 404년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375~413)이 중국의 수도인 북경 (당시 지명은 연군·燕郡)을 침공해 게릴라전을 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중원(中原)의 패권을 쥐고 있던 후연(後燕)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후연의 도읍이던 연군은 연(燕)나라 이후, 명(明)-청(淸)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중국의 수도가 자리하고 있는 대륙의 심장부이다. 따라서 이러한 학계의 주장은 5세기 당시 동북 아시아의 주도권은 중국이 아닌 고구려였다는 사실을 방증해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진서(晉書)는 당 태종 때 편찬된 정사(正史)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지배선(池培善·62) 교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燕郡(北京) 침공 원인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면서, 중국 역사책인 진서(晉書)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진서는 당(唐) 태종(太宗)이 지시해 편찬한 진(晉) 왕조의 정사(正史)로, 5호16국(五胡十六國)과 진나라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이다.


이 책 권124 모용희재기(慕容熙載記) 404년 12월 조(條)에는 “그때 고구려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100여명을 죽였다(會高句麗寇燕郡, 殺略百餘人)” 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배선 교수는 “여기서 도적을 뜻하는 구(寇)자를 사용한 점으로 미뤄 중국인들이 광대토대왕의 연나라 공습 사실을 격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00명을 죽였다는 기록 역시 사실과 다르게 은폐. 축소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광개토대왕의 북경(연군) 공습에 대해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인 것”이라며 “적국의 수도를 유린한 이 게릴라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당시 중원의 패자였던 후연(後燕)은 붕괴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진서는 중국인들이 일점일획의 거짓도 없다고 믿는 정사(正史)”라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史) 같은 우리 역사서엔 ‘광개토대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出師) 연나라를 공략했다(三國史記 廣開土王本紀 十三年條, 十二月 出師侵燕)’는 사실만 간략하게 나와 있을 뿐, 연나라를 쳐들어가서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에 대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중국 정사를 통해 광개토대왕의 이 같은 활약상을 확인한 것은 지 교수가 처음으로, 이 논문은 2009년 04월 발행되는 백산학보(83호)에 실릴 예정이다.


광개토대왕의 후연 공격 원인을 살피기 위해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와 선비족(鮮卑族)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선비족은 한나라(前漢) 북쪽에 살던 호전적 성향의 유목민이다. 고구려 역사에 선비족이 처음 등장한 것은 BC 9년으로, 삼국유사 유리왕본기(瑠璃王本紀)에 선비족이 고구려 국경을 자주 침공하자, 고구려가 계략을 꾸며 힘센 선비족을 제압해 속국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속국이 되긴 했지만, 선비족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삼아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던 이들은 285년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외(慕容鬼)를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 293년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모용외는 고구려 서천왕의 묘를 파헤치려 했다. 자신들을 압박했던 서천왕에 대해 일종의 복수를 시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배선 교수는 “죽은 이의 무덤을 훼손하는 것은 그 시기 유목민들의 전통적인 복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모용외는 도굴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도굴을 목적으로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선비족과 고구려의 갈등은 이후 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 시대를 거치면서 심해졌다. 랑(樂浪)군을 공격해 위명을 떨친 미천왕이 선비족 세력권이던 요동(遼東)지역을 자주 침공하자, 선비족도 이를 받아쳐 접전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두 나라가 감정의 골이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였다.


당시 선비족의 패권을 쥔 사람은 모용황(慕容皇光)이었다. 모용외의 뒤를 이어 337년 전연의 왕으로 등극한 그는 동생 모용인(慕容仁)보다 무공이 약하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고자 342년 고구려 침공을 감행했다.


수년간 복수를 다짐해온 선비족의 군사력은 강건했다. 그들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丸都城)까지 쳐들어와 궁성을 불사른 뒤, 유목민 전통을 따라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약탈하고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후를 납치해 갔다.


이후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생모·왕후의 송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희귀한 보물을 1000여종이나 진상하며 송환을 요청했지만,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줬을 뿐 생모와 왕후는 돌려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두 나라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모용준(慕容儁)이 전연을 장악한 348년이었다.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자만에 빠진 모용준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수도를 이전했다. 점차 한족의 풍습에 젖어든 그는 요동과 창려(昌黎)에 모용외의 사당을, 범양(范陽)과 연군에는 모용황의 사당을 짓고 참배를 드리게 했다.


유목민의 야성을 상실한 그는 고구려의 요청을 수락,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를 돌려 보내줬다. 하지만 역사는 교만한 자에게 냉정한 법. 호시탐탐 연(燕)을 노리고 있던 전진(前秦)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습을 감행, 전연을 붕괴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후 고구려는 전진과 문물을 교류하며 화평한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 선비족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세력을 규합해 384년 후연(後燕)을 세우면서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오랜 갈등은 또 다시 불거지게 됐다.


이번에 선공을 가한 것은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385년 6월 후연의 본거지인 요동을 공격, 함락한 뒤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그해 11월 후연은 다시 군사를 보내 요동을 회복했다. 지배선 교수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민들이 다수 고구려에 투항했다”며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인근이며 기주는 베이징 200㎞ 남쪽의 내지(內地)로, 이 지역에서 유민이 투항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중국 내륙까지 깊숙이 뻗쳐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광개토대왕 공격 후유증으로 후연(後燕) 결국 멸망  

후연 무너뜨리고 북연(北燕) 세운 왕도 고구려 유민    


392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그해 7월부터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백제를 침공해 10개의 성을 빼앗아 후방을 다져놓고, 북쪽의 거란을 공격해 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명을 이끌고 돌아온 그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 숙적 연나라를 주시했다.


대왕이 칼을 뽑은 것은 401년. 천부적 군사 감각을 갖고 있던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권력을 쥐고 있던 모용성(慕容盛)이 쿠데타로 시해되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권좌에 오르는 혼란기를 놓치지 않았다. 군사를 몰고 쳐들어간 광개토대왕은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해 기염을 토한 뒤, 여세를 몰아 중국 내륙을 공략했다.


이 사실에 대해 자치통감(資治通鑑 卷113 晉紀35 安帝元興3年 12月條, 高句麗侵燕)과 삼국사기(三國史記 廣開土王本紀 十三年條, 十二月 出師侵燕)는 “고구려가 쳐들어갔다(侵)”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진서(晉書 卷124 慕容熙載記, 會高句麗寇燕郡 殺略百餘人)는 “고구려가 도적질을 했다(寇)”고 기록하면서 “100여명을 죽였다(殺略百餘人)”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배선 교수는 “도적질 했다(寇)는 진서의 표현은 중국인들이 이 사실을 격하했다는 의미”라며 “따라서 100명을 죽였다는 기록 역시 사실과 달리 은폐. 축소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북경 일대는 연(燕)이라 불렸다”며 “전연. 후연 같은 나라 이름에도 ‘연’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북경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정치·군사적 요충지”라고 말했다. “그런 요지인 중국 북경고구려에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이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란 얘기다.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북경을 유린한 광개토대왕이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위해 선비족의 사당을 유린했을까. 아쉽게도 이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연에 줬던 1000여종의 보물을 되찾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은 말이 없다. 선비족과의 수백 년에 걸친 갈등 과정에서 연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무사히 송환됐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다.


다만 △ 수도를 유린당한 후연의 모용희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 또 다시 패했고 △ 강성해진 고구려가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406년 궁궐을 중수(重修)했으며 △ 이듬해인 407년 고구려 유민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살해한 뒤 북연(北燕)을 건국해 왕이 됐다는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운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북연의 왕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 사람으로 스스로를 고양씨라 칭하며 고(高)씨를 성씨로 삼았다.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지 교수는 “광개토대왕의 게릴라 공습으로 인해 후연이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점과, 북연을 건국한 고운이 광개토대왕에게 같은 종족으로서 예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뤄, 5세기 초 고구려는 아시아는 물론 북중국의 질서까지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훗날 북위(北魏)의 침공으로 북연이 붕괴되자, 장수왕이 2만 군사를 파견해 북연 왕실과 도성 주민들을 고구려로 이주시켰다”며 “이는 장수왕 때까지 북중국 동부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지속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범진 기자 , 입력 : 2009.03.27)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堯)임금. (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