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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창건, 선화 공주 퇴출? 어림없는 소리!

마도러스 2009. 1. 21. 15:20

 

륵사 창건, 선화 공주 퇴출? 어림없는 소리!

 

 글 편집 :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


문화와 예술은 90%의 사실과 상식 그리고 10%의 미학(美學)에 의해 이뤄진다. 서동요 속의 서동(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이야기는 90%의 사실과 10%의 미학(美學)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미륵사 창건과 서동요의 문화는 사실과 상식 그리고 미학에 의해 대중의 공감을 얻어낸 것이기에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개인이 누리고, 기억하고 거듭 음미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자산인 것이다. 

 

전래 설화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과 선화 공주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전북 익산시 미륵사 639년 창건됐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의 창건자와 창건 연대, 내력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8.01.19일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탑 1층 심주 (석탑의 중심 기둥) 안의 사리공 (사리 장엄구를 넣는 공간)을 발견했으며, 이 안에서 국보급 금제사리호와 미륵사의 창건자 등 내력이 적힌 금제사리 봉안기(記) 등 유물 505점을 한꺼번에 발견했다”고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판독 결과, 금제사리 봉안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 좌평(佐平. 백제 귀족) 사택적덕(沙F積德)의 딸...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삼국유사는 ‘서동요’에서 서동(백제 무왕)이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를 만났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백제 무왕의 왕비가 미륵사를 베풀었다.’ 라고 기록했다. 금제사리 봉안기(記)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대목에서 ‘우리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을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가 있다. 서울신문의 이용원 논설위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째에 완공됐다. 같은 시대 왕흥사 건립에 35년 걸렸음을 감안하면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 창건에는 더 긴 세월이 소요됐다. 무왕이 선화공주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계산하면, 무왕 즉위시 선화공주의 보령을 20세로 추정하면 미륵사 완공시에는 선화 공주는 60세쯤 된다. 당시 신라인의 평균수명은 40년쯤이었다. 선화공주가 미륵사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좌평 사택적덕의 딸은 계비(繼妃)일 것이다.”

 

“진평왕이 다스리는 신라 땅에서 ‘있지도 않은 왕의 딸(선화공주)’을 등장시킨 노래가 유행하고 역사에도 남을 수 있을까? 선화공주 퇴출? 어림없는 소리이다. 선화공주는 건재하고 앞으로도 ‘민족의 연인’으로서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백제의 서동(무왕)은 신라 땅에 홀로 들어가 선화공주를 빼낸 뒤 백제로 돌아와 혼인한다.”

 

“양국관계가 우호적인 시기라면 왕가끼리의 혼사가 이처럼 이상하게 진행될 리 없다. 그 별난 과정이야말로 둘의 사랑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꽃피웠음을 웅변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금제사리 봉안기(記)는 선화공주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더욱 강화해 주는 셈이다.” 

 

이번에 나온 금제사리호는 높이 13cm의 항아리로 국제적 수준의 백제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미륵사지석탑은 탑 형식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목탑 형식으로 표현한 국내 최고(最古)의 석탑이다. 미륵사지는 신라 황룡사지보다 크며, 면적이 약 21만 m²에 이른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현장에서 “백제 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굉장히 귀중한 자료로 국보 중의 국보”라면서 “1400여년의 세월 동안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완벽하게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 쾌거이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탑은 결국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건축물이요, 신앙 대상물이다. 사리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장중하게 탑으로 장식할까? 사리는 입멸(入滅) 석가모니 부처의 다비식 뒤에 타지 않고 남은 유골 일체를 가리킨다. 요즘은 다른 고승들이 남긴 유골도 사리라 하는 까닭에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는 '불사리'(佛舍利)라고 해서 구분하기도 한다.

 

 

불교계에서 쓰는 사리장엄(舍利莊嚴)이란 용어는 사리(舍利)를 장중하고 엄숙하게 꾸민다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런 행위의 결과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다만 사리장엄이라고만 하면, 그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해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사리장엄구란 말 그대로 사리를 장중하고 엄숙하게 치장한 일체의 물건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