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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대중문화 속에서 부활하다.

마도러스 2006. 8. 21. 08:56

이소룡, 대중문화 속에서 부활하다.

 

인터넷ㆍ영화ㆍ방송 등 통해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 최고의 몸짱ㆍ파이터로 추앙

 

노란 ‘추리닝’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르며 ‘아뵤~’라는 특유의 기합과 함께 엄지손가락으로 콧잔등을 툭 치면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이소룡(1940∼1973).

 

절권도(截拳道)라는 무술을 창시했고 세계적인 영화배우로 활약하다가 33세에 요절한 이소룡은 그야말로 짧고 굵은 인생을 살았다. 아니다, 그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그가 최근 들어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 노란 '추리닝'를 입은 이소룡.

먼저 이소룡은 온라인상에서 되살아났다. ‘싱하형’(‘디씨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싱하’라는 닉네임을 가진 네티즌이 이소룡 합성 사진과 함께 ‘형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고 해서 ‘싱하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연속된 사진으로 움직임을 표현하는 영상물로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한다)으로 부활했다.

 

또 온라인상에서 효도르, 레이세포 등 요즘의 격투기 고수들과 가상 대결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격투기 전문가의 해설이 곁들여진다.

 

이소룡을 주제로 한 인터넷 카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 절권도에 대한 카페부터 그의 영화, 사진 자료 등을 공유하는 카페, 나아가 이소룡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이소룡이 했던 모든 행동을 따라 하려는 사람이 모인 카페까지 다양하다.

 

오프라인상에서 이소룡의 흔적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서울 역삼동에 있는 한국 절권도 총본관이다. 한국에서 정통 절권도를 유일하게 전수하고 있는 곳이다.

 

김종학 총관장은 “대학생, 직장인, 배우 등 100여명의 문하생이 수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배우 김수로도 이곳에서 절권도를 배웠다고 한다.

 

▲ 보스니아에 세워진 이소룡 동상.

대중문화 속에서도 이소룡은 뚜렷이 살아났다. 최근 영화에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영화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존경하는 영화나 영화인에게 헌사하는 장면)가 수없이 등장한다.

 

 또 이소룡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겸 시인인 유하는 자신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감독이 원래 생각한 영화 제목은 ‘절권도의 길’이었는데 제작회의를 통해 ‘말죽거리 잔혹사’로 바뀌었고, 주인공 권상우가 절권도를 익히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모습 등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배우 중에서도 이소룡을 존경해서 배우가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재 홍콩 최고의 배우로 여겨지는 성룡은 이소룡 영화의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영화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이소룡을 옆에서 지켜보며 세계 최고의 액션배우를 꿈꿨다. 코믹액션 스타 주성치 역시 인터뷰 때마다 “이소룡을 보고 액션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개그맨 이경규도 ‘이소룡 키드’다. 그의 영화 ‘복수혈전’은 이소룡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이소룡 열풍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방송에서도 대단하다. KBS의 인기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는 최근까지 개그맨 장동민의 ‘이소룡이 간다’라는 코너를 방영했다. 장동민은 노란 추리닝을 입고 쌍절곤을 휘둘렀고, 개그우먼 강유미도 여자 이소룡으로 출연했다.

 

음악도 이소룡 열풍에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최고 인디밴드 중 하나인 크라잉넛 3집 타이틀 곡 ‘이소룡을 찾아랏’ 역시 이소룡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소룡을 찾아랏’은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 속에서 이소룡의 모습을 찾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이소룡 열풍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보스니아에 이소룡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2005년 11월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맞아 동상을 세운 보스니아 모스타르시 측에서는 “이소룡이야말로 세계적인 영웅이며, 인종차별 없이 사랑받는 스타이기 때문에 동상을 세웠다”고 밝혔다. 당연히 홍콩에도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지금, 왜 이소룡이 다시 유행할까? 먼저 10~20대 젊은층에서 이소룡이라는 존재가 재발견된 것을 들 수 있다. 대학생 이성호(22)씨는 “잘 단련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이소룡은 1970년대뿐 아니라 2006년 지금 데뷔해도 지극히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말처럼 이소룡에게 다시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웰빙 붐과 함께 건강한 몸에 대한 갈망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최고의 몸짱이자 파이터라고 할 수 있는 이소룡의 근육은 21세기 남자들이 원하는 근육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강한 남자’ 혹은 ‘마초’에 대한 열망 역시 이소룡을 부활시킨 원인으로 볼 수 있다. 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격투 스포츠가 각광받는 요즘, 역사상 최고의 파이터 중 하나로 꼽히는 이소룡이 신세대에까지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 이소룡에 대한 기성세대의 향수가 중요한 요인이다. 유년시절 영화관이나 TV에서 처음 접했던 이소룡의 액션은 이들의 가슴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다. 직장인 이현기(49)씨는 “어린 시절 이소룡 영화를 보고 쌍절곤 연습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면서 “아직까지도 성룡, 이연걸, 주성치보다 이소룡의 카리스마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많은 관객이 이소룡의 뒤를 이어 나타난 배우들의 액션을 보면서 가슴 한편에는 이소룡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소룡 생애와 작품

 

정무문’등 빅 히트작 5편만 남기고 33세에 짧고 굵은 삶을 마감


이소룡(본명 이진번)은 아역배우 출신이다.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우 이해천의 아들로 태어난 이소룡은 1946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광둥어 영화 ‘금문녀’로 데뷔했다.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작품이었다.

 

이듬해 그는 홍콩으로 와서 권법을 수련하며 몇몇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인해고홍’ 등으로 주목 받았으나 195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시애틀 소재 워싱턴 주립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1964년 미국 여성 린다와 결혼 후 경제적인 사정으로 중퇴했다.

 

그는 쿵후도장을 운영하면서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등 할리우드 스타에게 쿵후를 가르쳤다. 이후 미국에서 TV 시리즈 ‘그린 호네트’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경력을 쌓았지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주연이 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결국 홍콩으로 다시 갔고 골든 하베스트와 계약을 하면서부터 그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소룡은 짧고 굵은 다섯 편의 영화를 남겼다. 스크린을 통해 그를 본 관객은 이소룡의 탁월한 쿵후 실력뿐만 아니라 카리스마, 날렵한 남성미, 그리고 괴조음에 가까운 기합소리에 마치 최면에 걸리듯 빠져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당산대형’(1971)이었다. 태국 얼음공장을 배경으로 비열한 음모와 맞서 싸우는 화교 노동자 청년의 복수극이다. 이 작품은 아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후 쿵후영화가 홍콩영화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정무문’(1972)은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소룡 영화다. 특히 ‘정무문’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이소룡을 불멸의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정지화면으로 장식해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 나온 ‘맹룡과강’(1972)은 이소룡의 인기에 힘입어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제작됐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척 노리스와 벌이는 최후의 일대일 대결은 언제 봐도 비장하다. 이들은 싸우기 전에 긴 눈싸움을 하고 서로 등을 돌린 뒤, 뚝뚝 소리와 함께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다.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힘을 소진할 때까지 서로 싸우는데, 이는 어떤 화면기술이나 특수효과보다 더한 고통과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당산대형’에서도 그랬지만 이소룡은 이 작품에서 세계 화교의 영웅으로 나온다. 무협영화의 허영이 지워진 자리 위에 이소룡은 최초의 현대적 무비스타로 등장했다.

 

세계를 제패한 이소룡은 자신을 당대 스타급 백인 배우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나르시시스트(자아도취가 심한 사람)였다. 사실 그만한 동양 배우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말이다.

 

‘용쟁호투’(1973)는 이소룡 영화 중에서 유독 튀는 영화다. 이 작품은 무협영화의 전통과 할리우드의 첩보 영화 특성이 맞물리면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데 ‘용쟁호투’는 이소룡의 마지막 영화인 ‘사망유희’(1973)보다 더욱 죽음의 기운이 넘쳐나는 영화다.

 

그가 촬영한 영화 중 가장 사고가 많아서인지 더욱 비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흑연비수’ ‘흑권’ 등으로 강렬한 눈빛과 신기의 기술을 보여줬던 무협 여배우 안젤라 마오 잉이 이소룡의 여동생으로 우정 출연한다. 홍금보, 성룡, 원규, 원화 등 이후 스타가 된 쟁쟁한 배우들도 엑스트라로 계속 얼굴을 비치지만 이들의 연기가 반갑다기보다는 너무 처절해서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다.

 

 인상적인 것은 영화 속에서 경비원을 무자비하게 꺾어 죽이던 우람한 체격의 배우 양사다. 그는 세월이 흘러 ‘용재강호’(1986)에서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본명 이국호·1993년 영화 ‘크로우’ 촬영 중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와도 결투를 벌였다. 죽은 두 부자와 유일하게 일대일 대결을 벌인 배우다.

 

▲ 이소룡 DVD 콜렉션

‘용쟁호투’에는 비장미가 충만하다. 이소룡이 격투 신을 찍을 때 실제로 맞고 또 때렸다느니, 이미 건강이 나빠져 투약을 해가며 근근이 촬영했다는 등 ‘용쟁호투’는 그의 죽음 이후 촬영 중 발생한 가십(흥미 위주의 소문)마저 신격화됐다.

 

그런데 이소룡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많은 무기를 다루지만 유난히도 슬퍼 보인다. ‘당산대형’ ‘맹룡과강’ 등에서 볼 수 있던 중국인 친구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혼자다.

 

이소룡이 소림사 스승(호금전 영화의 단골 배우였던 고홍)과 나누는 선문답도 죽음을 예감한 자의 유언처럼 담담하다. 거울로 가득 찬 방에서 ‘황비홍’ 시리즈의 단골 악역이었던 석견과 싸우는 라스트 결투 신은 정말 보고 또 봐도 아깝지 않은 명장면이다. 거울 방이 그의 모습을 무한 복제해서 스크린에 늘어놓는데, 그럴수록 이소룡의 고립감은 더욱 강조된다.

 

‘용쟁호투’에 이어 출연한 ‘사망유희’는 마약복용, 행방불명, 그리고 총격사건 등으로 촬영이 중단과 속개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1973년 7월 20일 이소룡은 여배우 팅 페이의 집에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진 지 45분 만에 사망했다. 그렇게 일부 장면만 촬영된 상태였던 ‘사망유희’는 이후 한국배우 김태정이 이소룡의 대역으로 출연, 5년 만에 완성돼 공개됐다.

 

서일호 주간조선 기자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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