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스크랩]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거늘

마도러스 2006. 7. 1. 22:54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거늘


일본이 독도 시비 걸면 우리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해야


일본이 독도 문제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는 아예 조사선을 독도 인근 한국 측 배태적 경제수역(EEZ) 내에서 수로측량을 하겠다고 나섰고, 우리 정부는 이들의 시비를 침략으로 간주하여 일본 조사선을 나포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일본의 공세적 도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동해에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일본이 엄연히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이처럼 나온다면 우리는 대마도를 한국 땅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엄연히 조선 사람이 대마도에 산성을 쌓은 기록, 그리고 대마도 도주(島主)가 “대마도 주민들을 조선 남해안으로 이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록, 그리고 태종 이방원이 “대마도는 조선 땅”이라고 선언하는 기록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은 대마도 정벌군이 출항하기 전인 세종 1년(1419년) 6월 9일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이 기록에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여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1410)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집에 불을 질러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다. 뜻있는 선배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다. (중략) 내가 왜구들을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배고픈 것도 구제했고, 통상을 허락했는데 배은망덕하게 또다시 침략하여 우리 백성을 해쳤다.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고 천벌을 자청해도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느냐. 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생령을 물과 불에서 건지고자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이제 독도 문제에 대한 감정에 앞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란 논리의 정립을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대마도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척박했던 땅


예로부터 대마도는 조선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척박한 땅이었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 주민들이 왜구로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양식 지원, 조선의 관직 제수, 무역 특혜 등을 제공하여 평화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해적질을 일삼자 병력을 동원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과 대마도의 500년에 걸친 전쟁과 평화의 기록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한국과 일본을 가로막고 있는 현해탄, 부산과 시모노세키 뱃길의 한가운데 고구마처럼 박혀 있는 섬이 대마도(對馬島)다. 부산에서 뱃길로 470여 리밖에 안 되는 대마도는 한일 교류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간 기착지였고, 왜구의 본거지로서 한반도를 괴롭혔던 말썽 많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대함대가 물길을 타고 건너온 곳이 바로 현해탄이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사실을 몰래 조선에 알려준 사람이 대마도주였다. 대마도 인근의 바다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러시아 발틱 함대가 궤멸당하고 사령관 로제스트윈스키 제독이 포로가 됐던 ‘세기의 격전지’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왜구 견제 위해 수군 강화


조선이 개국한 14세기 말의 동북아 3국은 왕조가 교체되는 혁명기이자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강력한 지각 변동기였다. 일본은 50여 년의 내란기였던 남북조시대가 막을 내리고 통일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 통치체제가 정상화되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이민족 정권인 원(北元)나라가 몰락하고 명(明) 왕조가 개막됐다. 한족(漢族)에 의한 중국 대륙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 역사적 격랑의 와중에 한반도에는 왜구 토벌의 선봉장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조선 개국의 주인공이 됐다.

이 무렵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았던 대마도는 일기도(壹岐島·이키도), 송포(松浦·마쓰라)와 함께 왜구의 본거지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수시로 한반도 해안에 출몰하여 백성을 납치하고 물자를 약탈하던 왜구를 조선에서는 삼도왜(三島倭)라 불렀다.


태조 이성계는 왜구들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군을 정비하고 전함을 개량했으며, 주요 해안 요충지에 성을 쌓고 봉화를 설치했다. 수군 강화책은 태종, 세종대에 더욱 착실히 진행되어 태종 8년(1408)에는 각종 병선이 613척, 수군 병력은 5만 5,000명에 달했다. 당시의 수군은 병력의 수로 계산할 경우 오늘날의 해군 병력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계속)


대마도 사는 왜인들 “조선에 와서 술장사라도 하게 해 달라” 간청


예나 지금이나 바다를 지키려면 해군력이 강해야 한다. 일본 조사선을 나포하려면 조사선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배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닌가. 조선시대의 위정자들도 일본의 왜구들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수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해 조선 초기부터 수군 강화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수군 강화에 관심이 컸던 임금은 태종 이방원이었다. 세종 2년(1420) 11월 17일 실록에는 상왕(上王·태종 이방원. 당시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었다)이 한강에서 전함의 실전 훈련을 참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에 앞서 여러 도의 전함이 왜선(倭船)을 쫓다가 왜선이 빨라서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상왕이 한스럽게 여겨 대호군(大護軍·조선 전기 군제인 오위의 종3품 벼슬) 윤득민(尹得民)에게 빠른 배 세 척을 만들도록 명했다. 귀화한 왜인을 시켜 왜선을 타고 10여 보 가량 먼저 출발시킨 후 윤득민과 최해산, 이예가 새로 만든 배 한 척씩을 타고 쫓아갔다. 윤득민의 배가 항상 앞섰는데, 민첩하고 빠르기가 왜선보다 나았다.>


조선이란 나라가 탄생하여 전함을 개량하고 해안 요새경비를 강화하는 바람에 왜구들은 활동이 위축되어 약탈지를 중국 남동해안으로 옮기거나, 아예 해적질을 포기하고 조선 정부와 통상이나 귀화, 식량원조 요청 등으로 활동 방법을 바꾸었다.


일본인들 조선에 귀화 행렬 줄 이어


한반도와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통일신라, 발해와의 국교 단절 이후 폐쇄된 상황이었다. 양국 간에 외교적 숨통이 트인 것인 태조 이성계 시절이다. 태조는 즉위 직후 남쪽 해안의 평화정착을 위해 무로마치(室町) 막부에 승려 각추(覺鎚)를 외교사절로 보내 왜구들이 납치해 간 우리 백성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것이 조선과 일본 간의 첫 공식 외교 접촉이다. 양국 간에 국교가 수립된 것은 1404년. 일본은 통일신라와의 국교단절, 발해와의 교섭 중지 이래 쇄국상태에 있다가 550여 년 만에 조선과 수교를 함으로써 쇄국의 빗장을 풀었다.


태조 6년(1397) 3월 25일 실록에는 통역관 박인귀 등이 대마도에서 올 때 왜선 10여 척이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사례에서 보듯 조선 초기에는 대마도 주민들이 수시로 조선으로 밀항 혹은 투항하여 귀화를 신청하는 모습들이 실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조선은 성질이 사나운 대마도인이나 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종의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대마도에 거주하는 수령급이나 왜구에게 납치된 조선 백성의 송환에 적극 호응한 자, 항복한 일본인 중 왜구 진압에 공을 세운 자, 조선술이나 의술, 무기 제작 특기를 가진 왜인들은 무역에 특혜를 주거나 조선의 관직을 내리는 수직(授職)제도를 시행했다. 이러한 유화책을 시행한 결과 왜구의 해적질이 줄고 귀화 행렬이 줄을 잇게 된 것이다.


왜인들 귀화하면 평(平) 씨 성 내려


태조 6년(1397) 8월 25일에는 일본 승려 원해가 처자를 거느리고 귀화해 왔다. 원해는 의술에 정통한 의사 겸 승려였는데, 조정은 그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고 전의(典醫)박사라는 의관(醫官) 벼슬과 함께 ‘평(平)씨’를 성(姓)으로 내려주었다(조선시대에는 왜인들이 귀화하면 대부분 ‘평씨’를 성으로 내려주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임진왜란 발생 당시 일본의 실력자 ‘풍신수길’을 ‘평수길’로 기록했다).


실록 곳곳에는 많은 대마도 왜인들이 귀화를 요청하거나, 조선에 귀화하여 살아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다음은 세종 5년(1423) 2월 21일 경상도 감사의 보고.


<“대마도의 왜인 변삼보라(邊三甫羅)와 만시라(萬時羅) 등이 배 한 척에 24명이 타고 이달 12일 해운포에 이르러 ‘대마도에는 밭은 작은데 세금은 과중하여 생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조선에서 인정(仁政)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귀화해서 직업을 얻어 편안히 살고자 한다’고 하면서 처자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보고를 받은 예조에서는 “늙인이와 어린이, 부인들에게 양식을 주어 편안히 머물게 하고, 장정은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했다. 세종 8년(1426) 1월 3일에 귀화를 신청한 대마도인들은 “술장사라도 해서 먹고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마도의 시라삼보라(時羅三甫羅), 사이문구로(沙伊文仇老) 등 남녀 14명이 경상도의 내이포에 와서 ‘대마도에는 의지할 만한 친척이 없어 생활이 곤란합니다. 귀국 해변에 살면서 고기도 잡고 술도 팔아 생활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대마도 왜인들이 술장사를 할 수 있도록 온정을 베풀었다.(계속)



대마도 주민, 진도·남해·거제도로 이주 계획도


조선왕조실록의 대마도 관련 기록 중 흥미로운 사실은 생활환경이 척박했던 대마도인들이 정들었던 삶터를 버리고 조선의 진도나 남해, 거제도 등지로 이주를 계획했다는 사실이다. 세종 1년(1419) 10월 18일에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종정성의 호. 일본 측 자료에는 도도웅환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측에서 착오로 도도웅와로 기록한 듯하다)가 진도와 남해 등지로 거처를 옮겨 살게 해달라는 외교 서한을 보내왔다. 대마도주의 이러한 요청에 대해 예조판서 허조는 다음과 같은 답을 보냈다.


<“대마도 사람들이 작은 섬에 모여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고도 기탄하는 바가 없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성질이 달라서가 아니다. 다만 작은 섬이 돌산이므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늘 그것을 대기가 어렵다. 또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치 못해 핍박하여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심히 불쌍히 여기노라.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소오 사다시게)는 사려 깊고 침착하며, 지혜가 있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조선에) 신청해 오지 않은 적이 없노라. 일찍이 진도와 남해 등의 섬을 청하여 그의 무리들과 함께 옮겨와 살기를 원했으니, 그가 자손만대를 위해 염려함이 어찌 얕다 하겠느냐.”>


세종 8년(1426) 1월 18일, 대마도의 삼미삼보라(三未三甫羅)라는 관리는 “거제도의 농토 한 자리를 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우리 섬에는 토지가 없사오니 거제도에 농토 한 자리를 주어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하게 해주소서.”>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거제도 농토를 요청한 건은 거주민이 다 개간했기 때문에 요청을 들어줄 수 없으니 그리 알라.”>


대마도 왜인들은 잔혹하고 사나워


조선 초기 대마도와 일기도, 송도 지역은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전란에서 패배한 무사집단과 전쟁으로 처지가 곤궁해진 영세민들이 몰려들었다. 때문에 이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떼를 지어 배를 타고 조선 해안이나 중국, 심지어 베트남까지 진출,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왜구의 소굴로 지목됐던 대마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 1년 7월 28일 왜구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올린 유정현은 “대마도인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기질이 사납다”고 평가했다.


<“대마도 왜인들은 잔혹하고 강하고 사나워 조그만 원한까지 반드시 갚으니 지금은 두려워 굴복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각 도의 병선은 뭉쳐 있게 하고 요새지마다 각각 20척을 두며, 병선 없는 요해지에는 육군을 주둔시켜 수비를 엄하게 하소서. 그들은 살아서는 병기와 갑옷을 갖추고,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농업은 팽개치고 도적질로 생업을 삼으니 지금은 비록 섬멸해서 거의 없어졌다 해도 다른 섬에 사는 도당이 심히 많습니다. 저것들이 다른 섬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침략한다면 그 화는 전날보다 더 참혹할 것입니다.”>


일본인들 사람 장사에 열 올려


세종 11년(1429) 12월 3일에는 통신사 박서생이 일본을 다녀와 올린 보고서에 대마도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이 기록을 보면 일본 본토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며, 대마도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신이 일본에 이르러 대마도로부터 병고(兵庫·효고)에 이르기까지 적들의 수효와 왕래하는 길을 살펴보니 대마도와 일기주 사이의 큰 섬들과 지하(志賀·시가), 평호(平戶·히라도) 등의 섬들은 적간관(赤間關·아카마가세키) 이서(以西)의 적들이요, 사주(四州) 이북 조호, 사도(社島) 등지는 적간관 이동(以東)의 적입니다. 그 군사가 수만에 이르고 병선도 1000척이 넘습니다. 동서의 적이 일시에 군사를 일으키면 방어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이 서쪽으로 향해 오는 길로는 대마도가 여러 적들의 집합장이 되고, 적간관은 사주(四州)에 있는 여러 적들의 출입하는 문입니다. 만일 서쪽으로 향하는 적이 있을 때 종정성(대마도주)이 그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물을 길지 못하도록 하고 대내전은 적간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면 해적들은 왕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보고서 말미에 박서생은 일본인들의 ‘사람 장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일본에는 사람은 많고 먹을 것이 적어 흔히 노비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혹 남의 자제를 훔쳐다 팔기도 하는데, 이는 허다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일기도(一岐島)는 지금 병란으로 양곡이 떨어졌는데 내년 봄에 기아가 심하게 되면 도둑질 아니면 사람을 팔아 생활을 영위하는 자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세종 20년(1438) 6월 10일에는 우의정 허조가 ‘일본인의 충성심’을 언급한 대목이 보인다.


<“일본 황제는 천지개벽 이래 혁명한 적이 없고, 또 주장(主將)이 패하여 죽으면 그 휘하의 장사들이 모두 자살하여 충절을 본받고 있습니다.”>


입력 : 2006-04-19. 월간 조선.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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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글쓴이 : 난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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