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김대중(金大中)의 인동초 생애와 업적

마도러스 2009. 8. 19. 15:02

 

김대중(金大中)의 인동초 생애와 업적

 

       스크랩 : http://cafe.daum.net/do92

 

 

김대중(金大中)의 별명은 인동초(忍冬草)이다. 김대중을 빼놓고서는 해방 이후 한국 민주화의 시련과 역사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이 이룩한 두 가지 기적(奇蹟) 중의 하나인 민주화를 김대중을 빼놓고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과 한국인은 두 가지 기적을 일궈냈다.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이제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 경제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민주주의 경험도 없이 왕조 시대와 식민지를 거쳐서 인동초(忍冬草) 세월을 통해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한 기록이다.

 

김대중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을 때, 온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고, 정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탄압을 이겨내고 끝내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자유로운 국회를 갖고, 사실대로 쓰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김대중김영삼이란 꺾이지 않는 두 개의 구심점이 버티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김대중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뱃길로 34㎞ 떨어진 작은 섬이다. 그는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사이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926년 1월 6일(음력 1925년 12월 3일)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그보다 2년 앞선 1924년이다. 하의 국민학교 4학년 되던 해, 그는 목포 북교 국민학교로 전학했다.

 

1939년 그는 당시 목포 상업 학교(목포 상고)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취업반으로 들어갔으나 2학년을 마치고 진학반으로 옮겼다. 소년 김대중은 역사와 정치,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광이기도 했다. 일본어로 된 ‘자본론’을 읽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김대중은 일본인 학생들의 텃세로 이지메(집단 따돌림)에 시달렸다. 그러나 꿋꿋하게 학교를 다녔고, 특히 웅변에 소질이 있어 곧잘 혼자서 연설을 하곤 했다. 1939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다음은 목포 상업학교 후배이자 훗날 그의 비서를 지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회고이다. “재학생들끼리 싸움이 붙어 교내가 아수라장이 됐을 때, 김대중이 졸업생 자격으로 학교에 왔다. 김대중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나라의 재건을 위해 힘써야 할 젊은이들이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무기를 버리고 서로의 손을 잡으라!” 라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토록 말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때 “사나이로 태어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자!” 라고 결심했고 결국 김대중과 평생을 같이하게 된 계기가 됐다.

 

김대중은 목포 상고를 졸업, 만주 건국대에 응시했지만 서류 전형에서 낙방해 패배를 맛본다. 그는 일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 회사인 목포 상선 회사의 경리 사원으로 입사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 포기 결정은 이후 그를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단초가 된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그는 여운형(呂運亨) 등이 주축이 된 ‘건국 준비 위원회’와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창당된 우익 ‘조선 민주당’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8개월 만에 탈퇴했다. ‘건국 준비 위원회’ 경력은 후에 김대준 전 대통령을 둘러싼 ‘색깔론’ 시비의 원인이 됐다.

 

1945년 08월 해방이 되자 그는 일본인 사장이 물러난 목포 상선 회사의 재산 관리인이 됐다. 1945년 11월엔 그 회사의 대표 자리에 오른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셈에 강했던 그는 사업에도 수완을 보여 전남 선박 목포 조합장, 대양 조선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엔 목포 일보를 인수해 주필을 맡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김대중은 1946년 목포 상고 동기생의 소개로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결혼한다.

 

1954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빚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평생 13번의 선거에 출마해 7번 당선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9번 나와서 6번(5, 6, 7, 8, 13, 14대) 당선했다. 대통령 선거엔 4번 출마한 끝에 당선됐다. 순탄치 않은 역정이었다. 5차례의 대선에 출마해 모두 당선한 박정희나, 12차례의 선거에 출마해 10번 당선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

 

첫 출마는 1954년 3대 총선이었다.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어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4대 총선 때는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두 아들(홍일.홍업)을 낳은 부인 차씨와 사별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1961년 5월, 인제 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3일만에 5·16 쿠데타가 벌어지는 바람에 의사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정변에 의해 의원직이 박탈당해졌다. 불운의 연속인 셈이었다.

 

1962년 당시 YWCA 총무이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 평생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를 찾았다. 3남 홍걸도 낳았다. 1963년 6대 총선에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 김대중은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든다. 불운을 극복한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했다. 타고난 지략과 달변으로 그는 야당의 명(名)대변인 소리를 들었다. 개원 초기 6개월 동안 본회의에서 13차례나 발언했다.

 

1964년 4월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하는 필리버스터(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이때 기록한 5시간 19분은 최장 시간 국회 연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정치에 들어온 후, 그는 계속 인동초(忍冬草)의 길을 걸었다. 도전과 응전, 역경과 환희가 교차됐다. 특히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만남으로써 정치 인생 내내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1970년 7대 신민당 대선 후보를 뽑는 전당 대회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그는 막판 대역전 드라마 끝에 김영삼을 제치고 후보로 지명되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3선 개헌(1969년)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다진 뒤 종신 대통령을 겨냥한 유신 체제(1972년)로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분패했지만 표차는 94만 표에 불과했다. 현직 대통령이란 프리미엄을 누린 박정희에겐 충격이었다. 그것은 김대중에겐 혹독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위협적 존재로 확인된 정치인 김대중을 그냥 두지 않았다. 대선이 끝난 뒤 총선 지원 유세를 위해 타고 다니던 김대중 승용차에 갑자기 대형 트럭이 달려 오더니, ‘꽝’ 하고 들이받았다. 그러는 바람에 그는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의문의 사고였다. 그 후, 그는 고관절 변형증으로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1971-1987년은 김대중의 정치 인생 중 최대의 암흑기이자 형극(荊棘)의 세월이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모두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투옥됐으며 10년간 55회의 가택 연금을 당했다.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으로 시작된 정치 탄압은 박정희 정권과 1979년 10.26 사태 이후 신군부로 이어졌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초헌법적 유신(維新) 비상 조치를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켰다.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美名) 하에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하여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방식을 채택하였다.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1972년 12월 설치된 ‘통일 주체 국민회의’는 2,000명 이상 5,000명 이하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통령이 맡았다. 실질적인 기능은 대통령 선출국회의원 정수 1/3 선출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원래 설치 목적인 통일과는 상관없이 대통령 선출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유신 독재 정권을 위한 어용(御用) 기구라는 역사적 오명을 남기고, 1980년 10월 개정된 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

 

김대중은 1972년 일본에서 10월 유신을 맞았다. 귀국을 포기한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 민주 통일 연합을 조직해 반(反) 유신 운동에 나섰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엄청난 공작을 기도했다.

 

1973년 ‘중앙 정보부(안기부)’ 요원들이 일본 도쿄 시내 호텔에서 그를 납치해 ‘대한 해협’에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서울 동교동 집에 가둬놓고 철저히 감시했다.

 

1976년 03월 01일 민주 구국 선언 사건 및 긴급조치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78년 12월 석방됐으나 다시 연금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자 그는 잠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와 1980년 5·18로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그에게 이른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그에게 내란 음모죄를 뒤집어 씌웠다. 신군부는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1981년 그는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김대중 구명 운동이 벌어지자 군사 정권은 형량을 무기 징역으로 감형했다. 1982년 12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김대중으로부터 몇가지 강제 서약서를 받고서 석방시킨 뒤, 미국으로 망명(亡命)의 길을 터 주었다.

 

1985년 2월 군사 정권의 위협 속에 귀국한 그는 김포 공항에서 곧바로 연행되어 가택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곧바로 1985년 2.12 총선을 지원하고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바야흐로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김대중의 고난한 세월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승리를 통해 일단 종지부를 찍어졌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정면 승부를 벌였지만 지역 감정의 벽을 넘지 못해 패배했다. 그는 영국에 6개월 동안 머문 뒤 귀국한 후, ‘아시아 태평양 평화 재단’을 설립하여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995년 지방선거 지원 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1995년 9월 그는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대선에서 자민련(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외환 위기에 빠져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된 정부를 그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물려 받았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던 그때, 국민들이 지치고 불안해 하던 그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밖으로는 외화 차입, 안으로는 경제 구조 조정에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는 기존의 ‘대북 흡수 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꾸준히 견지해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외교 협상을 통해 남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켰다. 김정일 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게기를 마련했다.

 

2000년 10월 13일 남북 평화 교류 및 민주화 공로에 의해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1년 8월 ‘IMF(국제 통화 기금)’에서 빌린 돈을 다 갚았다. 감격적이고 기록적인 일이었다.

 

김대중의 경제 정책은 ‘DJ 노믹스’로 드러났다. 대기업의 부채 비율 축소, 빅딜, 부실 금융 기관 퇴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 자본 비율 개선 등 강도 높은 구조 조정에 중점을 뒀다. 벤처 기업 육성 정책은 한국이 조기에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벤처 기업 육성책을 통해 성장한 벤처 기업은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경제가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하고 대기업 중심의 경제 체질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대중은 취임하자마자 향후 5년간 벤처 기업 2만개를 창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무기명 장기채 발행 등을 통해 9000억원의 자금을 마련, 창업하는 벤처 기업에 3억씩 지원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이런 정책에 따라 벤처 기업은 각 분야에서 우리 경제의 핵심 주체로 성장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 당시 특별법 ‘부품 소재 개발 정부 지원법’ 제정을 계기로 완제품 중심의 생산 체제에서 부품과 소재 개발에 역점하고, 정부가 이의 산업화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 결국 2005년을 정점으로 부품 소재가 전체 산업의 무역 수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국제 금융 위기’에서 우리 기업과 은행들이 세계에서 가장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기업 구조 조정을 통해 부채 비율을 줄이는 기업 체질을 개선시켜 놓은 혜택일 것이다. 그는 평소 "나는 정보(IT) 산업을 일으킨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싶다." 라고 했다. 현재 한국이 세계 유수의 IT 산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런 각별한 관심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정보 통신 강국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에 ‘초고속 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 정보 기술(IT) 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 보상법, 의문사 진상 규명법, 국가 인권 위원회법 등 민주화 입법을 추진했고, 의료 보험 및 생산적 복지 정책은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대중(金大中)의 별명은 인동초(忍冬草)이다. 김대중의 생애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엷은 잎 몇 개로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운다. 김대중의 일생은 도전응전의 역사였다. 숱한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인간 승리의 신화(神話)를 일궈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