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김일성은 김정일 때문에 사망

마도러스 2011. 12. 16. 08:34

김일성은 김정일 때문에 사망

      

■ 1994년 07월 08일 김일성(金日成) 사망에 대해 북한 고위층 사이에서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한 것은 바로 아들 김정일(金正日)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대북 전문 매체 열린 북한 방송이 2011.07.08일 보도했다.


북한(北韓)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사인(死因)은 과로에 의한 심근 경색(Myocardial Infarction)에 의한 자연사(自然死)였다. 그러나, 사망 원인과 사망 전후 김정일이 취한 일련의 미심쩍은 행동들을 보면 그것은 자연사(自然死)가 아닌 타살(他殺)이었다.


당시 김일성(金日成)에겐 두 가지 큰 과제가 주어졌다. 하나는 1994년 07월 25일로 예정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정상 회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미(北美)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왔던 핵(核)무기 문제였다. 핵(核) 문제는 1994년 06월 16일 카터(Jimmy Carter) 전(前)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대좌함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김일성(金日成)은 남은 과제인 남북 정상 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장을 직접 챙기겠다며 ‘1994년 07월 경제 관계 일꾼 회의’를 묘향산 별장에서 가졌다. 그 과정에서 생긴 충격적인 사건들로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급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일성의 급사를 두고 항간의 의견은 ‘자연사’와 ‘음모에 의한 간접 살해’ 두 갈래로 나뉘었다. 간접 살해 쪽 의견은 김일성(金日成)의 아들 김정일(金正日)을 연관시켰다. 김정일(金正日)의 패악질과 권력 욕심이 이유로 내세워졌다.


김정일(金正日)은 권력과 혈육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었으며, 그의 잔인무도한 포악성이 지적됐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으로 조선 시대의 수많은 임금 독살설이 예시됐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 4명 중 1명이 독살(毒殺)됐다는 것이다. 500여 년 기나긴 왕조 통치가 그 원인이었다. 아울러 왕들의 죽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반대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때 왕들이 급서했다.


김일성(金日成)은 잠시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가 다시 등장했다. 이는 김정일(金正日) 실정(失政)에 따른 김일성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김일성(金日成)은 일찍부터 김정일의 국정 운영 실패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해왔다. 그러다가 1993년 후반 들어 김정일(金正日)의 통치 능력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친정 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를 신속히 취하면서 깊어진 부자(父子) 갈등은 차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 07월 25일로 예정된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두고 극대화되었으며, 결국 급사(急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죽임을 당한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1994년 06월 카터(Jimmy Carter) 전(前)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남북 정상 회담 주선을 부탁하면서 “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불신과 부자 갈등의 속내를 드러냈다. 이전에도 김일성은 혁명 원로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후계자 조기 선정을 자책하곤 했다.


어떤 때는 “김평일(김정일 이복 동생)이가 큰일 할 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전해진다. 김정일은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마다 형제 간의 질투와 적대감으로 나타나는 카인(Cain Complex)를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김정일(金正日)은 그 동안 김일성의 질책이 두려워 궁핍해진 인민 생활에 대해 허위 보고를 해 왔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김일성(金日成)은 1994년 07월 06일 묘향산에서 경제 일꾼들과 협의회를 진행하던 중 3개월 전부터 주민들이 배급을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정일을 세차게 몰아 붙였다고 한다.


김일성(金日成)이 통일 문제를 서두른 이유도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됨에 따라 빈껍데기로 남은 주석직과 총비서직의 권위를 통일 분위기 조성으로 되찾으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챈 김정일(金正日)남북 정상 회담을 반대하면서 부자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는 끝내 김일성의 급사(急死)를 불러왔다.


남북 정상 회담을 둘러싼 부자 갈등은 묘향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김일성(金日成)은 별장에서 김정일(金正日)에게 “회담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시큰둥하자 격노(激怒)했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 경호원(1호 호위 총국) 경호원이 김정일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었고, 김정일 경호원들도 이에 응사하고 나왔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이 1차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이것이 사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일성(金日成) 사망과 관련된 음모는 그가 묘향산 별장으로 향하기 전 경호 계획 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통상 김일성이 한 번 떴다 하면 8명의 의사가 따라붙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묘향산으로 떠나던 그날 동행 의사는 단 2명뿐이었고, 심장 담당 주치의는 아예 제외됐다. 김일성 동선에 따른 단계별 호위 계획을 직접 점검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심장 전문 주치의를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그 당시 김일성(金日成)은 평소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 담당 주치의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심장 전문 주치의가 제외된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의심스러운 것은 김일성이 한번 떴다 하면 혈압과 맥박, 체온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어 일명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부르던 독일산 최첨단 의료 장비들마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김일성(金日成) 사망 뒤처리를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그래서 필연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 많다. 우선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쓰러진 순간 김정일(金正日)에게 SOS가 보내졌으나 한 시간이 넘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응급 의료 장비를 실은 구조 헬기가 떴으나 착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그 후에 응급 의료진이 자동차로 출발하였으나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도 김정일(金正日)이 지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지연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일성 사망 시각은 1994년 07월 08일 오전 2시였다. 그러나, 공식 발표 시각은 07월 09일 낮 12였다.


최고 지도자의 사망 사실이 늦게 발표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후계자 선출 시간 벌기이고, 다른 하나는 적의 공격 대비이다. 그러나, 북한(北韓)은 1974년에 이미 후계자 선출이 끝났고, 김일성 사망 당시 휴전선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일성(金日成) 사망 공식 발표 시각이 무려 32시간이나 지연됐다. 반발하는 군부(軍部) 설득이 그 이유였다. 군부(軍部)의 반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일성 사망이 자연사가 아니라, 타살(他殺)이라는 방증이다.


김정일(金正日)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살인(殺人) 혐의를 벗으려면, 김일성(金日成) 사망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것 하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김일성 살해 증거로 꼽힌다.


역사학자 토인비(Toynbee)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1994년 06월 15일 카터(Jimmy Carter) 전(前)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 그리고 김일성(金日成)으로부터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 회담 주선을 부탁받아 그 물꼬를 텄다. 그러나 김일성의 급사로 남북 정상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1년 04월 28일 카터(Jimmy Carter) 전(前)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김정일(金正日)로부터 남북 정상 회담 주선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이 또한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토인비의 말이 실감난다. 토인비(Toynbee)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 갈등에 의한 권력 암투로 죽임을 당한 김일성(金日成)처럼 김정일(金正日)의 앞날도 순탄치만 않을 것 같다.


우선 김정은(金正恩) 3대 세습 안착 여부가 아직은 미지수이다. 후계 구도를 놓고 어떤 권력 암투가 벌어질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천명(天命)을 다하고 죽는 예가 드물고, 권력 후계 경쟁자는 목숨 부지하기가 어렵다. 포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그렇다고 김정일(金正日)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정일이 비참한 최후를 모면하고 그 후계자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김정일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세습이 아니라,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김정일이 자신과 일가족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