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대마도! 조선 땅이고 한국 땅이다.

마도러스 2012. 9. 20. 12:00

대마도! 조선 땅이고 한국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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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는 조선의 양쪽 발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는 1750년대 영조(英祖)시대 제작한 해동 지도(海東地圖)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對馬島)호남의 탐라(제주도)를 양발로 삼는다"

 

조선(朝鮮) 왕조 5백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한 예로 세조가 대마도주에게 내린 직명은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崇政大夫判中樞院事對馬主兵馬都節制使)였다. 조선 왕조의 대마도 인식은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08월 18일과 1949년 01월 07일 연두 기자 회견과 1948년 연말 기자 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對馬島)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무력으로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일어나 이를 격퇴했고, 도처에 그 전적비가 남아있다. 구한말(舊韓末)에 대마도(對馬島)를 강점한 일본은 1945년 07월에 포츠담(Potsdam)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으나 그 후에 이행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對馬島) 속령(屬領)에 관한 법적 조치’를 취하면서 수시로 “대마도(對馬島) 내놔라!”고 6.25때까지 무려 60여차례나 요구했다. 당황한 일본은 회피하다가 1950년 북한의 6.25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나자 쾌재를 불렀다.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 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 프랑스어판 하야시 지도에 대마도는 조선 땅

 

미국(美國)은 일본의 개항 직후, 일본(日本) 본토에서 1000여㎞쯤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오가사와라(Ogasawara)를 발견했다. 이를 미국령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일 간 영토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일본은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작성했던 지도(1785년)를 제시했다. 그 지도에 오가사와라 섬이 표기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하야시의 일본어(日本語)판 지도로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고심하던 일본 막부는 하야시의 지도를 번역한 '프랑스어(French language)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를 증거물로 내세워 영토 협상에 성공한다. 그런데, 바로 그 지도에 대마도(對馬島)조선령(朝鮮領)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영토 협상에서 사용한 지도에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다.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필사본 지도에는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 지도의 원본에는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우리 영토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韓國) 국회 도서관 206호실 독도 특별 전시관에서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프랑스어(French language)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대마도(對馬島)조선령(朝鮮領)으로 되어 있으며,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06년 한 네덜란드인이 하야시의 원본 지도 딱 한 부를 유럽으로 들고 갔다. 이를 갖고 클라프로토(Klaproth)라는 동양학자가 현지 정찰 등을 한 뒤 1832년 프랑스어(French language)판을 찍었다. 국회 도서관의 프랑스어판이 바로 그 지도이다. 한국 고서 연구회 한상복 박사가 국회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한상복(72)씨와 통화해 보니, 1980년대 초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1832년 인쇄본'이 맞다고 했다.

 

프랑스어판은 수십 부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오가사와라(Ogasawara) 섬을 둘러싸고 미국과 영토 협상을 벌였던 일본 대표는 1863년 프랑스 대사(大使)로 갔고, 그가 프랑스어(French language)판을 수거해서 폐기해 버린 것이다. 1868년 전후로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필사본이 대량 만들어진 것이다.

 

■ 하야시 제작의 조선 팔도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 땅

 

한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제작한 다른 지도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의 원본이 발견했다. 그의 고향인 센다이 소재 도호쿠(東北) 대학 박물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냈다. 대학 측이 '원본'이라고 소개해 놓았다. 그 지도에도 대마도(對馬島)조선령(朝鮮領)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관동대 학군단 김상훈(54) 대령이 이런 자료를 근거로 2010년 말 논문을 발표하자, 한 달도 안 돼 인터넷에 떠 있던 지도가 사라졌다. 그 공간을 'No Image(사진 없음)'로 비워 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3일 뒤 첫 기자 회견에서 대마도(對馬島)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對馬島)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對馬島)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인 1950년 0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 1864년 발행 아시아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 땅

 

관동대 학군단 김상훈 대령은 미국의 한 고미술 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Asia)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국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 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 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1855년 영국(英國)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 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 해방 기념판’ 최신 조선 전도(最新 朝鮮 全圖)에도 대마도(對馬島)조선(朝鮮) 땅으로 표기해 놓았다.

 

하지만, 2차 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日本)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獨島)대마도(對馬島)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對馬島)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당시에는 6·25 한국 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01월 18일,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평화선(Syngman Rhee Line)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對馬島)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 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수정(修正)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 라고 했다.

 

일본(日本) 속담에는 '거짓도 백번 우기면 진실이 된다' 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속담이다. 진실(眞實)은 백번 천번 만번을 거짓이라 해도 진실(眞實)은 결국 진실임을 일본은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