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기적!

■ 박목월(朴木月) 시인 부인의 감동적인 희망 이야기

마도러스 2022. 12. 21. 04:04

 

■ 박목월(朴木月) 시인 부인의 감동적인 희망 이야기

 물은 바위 절벽을 잘 만나야 아름다운 폭포가 된다. 꽃은 주인을 잘 만나야 아름다운 화분꽃이 된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바뀐다. 좋은 만남을 갖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들의 인생사 모두는 구구절절 대서사시(大敍事詩)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좋은 일이 또는 때로는 힘든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반드시 있다.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 질 때와 보슬비 가랑비 여우비가 내릴 때가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날이 있듯이 인생의 참된 즐거움은 역경과 고난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피어난다. 매우 역설적이다.

★ 내 마음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진다. 천태만상(千態萬象)으로 변한다. 마음 속에 꽃을 담으면 꽃병이 되고, 마음 속에 꿀을 담으면 꿀병이 된다. 하지만, 마음 속에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된다. 내 마음 속에 감사! 사랑! 겸손! 등의 좋은 것을 담아두면, 남들로부터 대접 받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불만! 증오! 분노! 등의 나쁜 것을 담아두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래서 중요하다. 내 마음이 내 몸의 주인이다.

기쁨과 행복은 셀프(self)이다. 기쁨과 행복은 그 누구도 배달해 주지 않는다. 희망(Hope). 기쁨(pleasure). 행복(happiness)은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분노! 불만! 욕심! 모두 비워라! empty. 내려 놓아라! put down. 버려라! abandon. 체념(諦念)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Hope)을 본다. 체념(諦念)은 희망(Hope)의 또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오직, 나 자신의 책임이다. 오늘은 마음 속에 어떤 것을 담으시겠습니까?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나를 칭찬하셨던 우리 어머니! 고마워요!

★ 아래 글의 내용은 서울대학교 박동규 명예교수의 사연이다. 그리고, 이 글 속의 '어머니'는 박목월 시인의 아내이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한국 전쟁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은 실로 대단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더욱 힘차고 아름답게 변화시켰다.

★ 1950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을 잘 지키고 있어! 나중에 돌아올께!'' 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서울 한강을 건너서 남쪽 대구로 피난을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6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북한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서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남매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모르는 남쪽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 1주일 이상, 겨우 겨우 어렵게 걸어서 어느 한적한 마을에 닿았다. 경기도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 인심이 사나워져서 헛간에도 잠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서 펴 놓고 잤다. 여름철이었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고, 담장 넝쿨에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했다.

★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내 어깨에 짊어지게 하셨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보따리를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도와 줄께!'' 라고 말했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그런데. 갑자기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라졌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여기에서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훌쩍 도망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를 돌아 보지도 않고 곧장 달려갔다.

★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도와준다고 하더니, 쌀자루를 지고, 갑자기 저 길로 도망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서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됐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셨다. 그리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어머니는 연거푸 우셨다.

 그런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멍하게 누워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다!” 라고 거듭 거듭 칭찬해 주셨다. 그 후, 나는 소원이 생겼다.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 후,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게 된 것은 그런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느 때나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셨다. 우리 어머니의 칭찬의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인 지주였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나를 칭찬해 주셨다. 어머니! 정말 고마워요! 사랑해요! “ 고귀하고 뜨겁고 아름다운 이름 석자를 거듭거듭 불러본다. 어머니! 어머니!

★ 박목월(朴木月) 시인은 1946년경부터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이어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구 향촌동으로 피난을 갔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 향촌동은 전선 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 시기에 대구 향촌동 다방과 주점 등에서 당시 문인들은 ‘문총구국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국군의 활약을 작품화해서 국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한국전쟁 당시 박목월은 "문총구국대" 총무, 공군종군문인단 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57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엮임했고,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부인은 모든 것을 체념(諦念)했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

1950년 0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1950년 0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고, 1951년 0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2년, 6. 25 한국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박목월(朴木月) 시인은 중년이 되어 있었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다.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매우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그 여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매우 궁색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본 후, 부인은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부인은 곧장 돈 봉투를 꺼냈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과 함께 돈을 내밀어 주었다. 부인은 아무런 말없이 모든 것을 체념(諦念)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체념(諦念)은 희망(Hope)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분노! 불만! 욕심! 모두 비웠다. empty. 내려 놓았다. put down. 버렸다. abandon. 체념(諦念)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Hope)을 노래했다. 박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무척 감동했다. 모두가 가슴 아파했다. 박목월과 그 여인은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 후, 박목월은 서울로 향했다. 박목월은 그 여인과 헤어지기 전날 밤. 그의 가슴 아픈 마음을 시(詩)의 형태로 그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그 때 그 시(詩)가 바로 이 노래이다.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 속에서 진주가 생성된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성숙하고 가치 있는 삶들이 새롭게 생성된다. 박목월 시인의 부인은 모든 것을 체념(諦念)했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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