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역사 전환기(轉換期)는 출중한 지도자를 기다린다.

마도러스 2021. 5. 26. 01:57

■ 역사 전환기(轉換期)는 출중한 지도자를 기다린다.

 

역사가 전환될 때에는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절실하기 마련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할 때는 중국의 간섭에 굴하지 않고, 사대주의적인 신하의 반대를 이겨내는 결단이 필요했었다. 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893년 뉴질랜드에서였는데, 의회에서 찬성 20, 반대 18로 통과됐다고 한다.  1명만이라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역사의 진전은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우리도 지금 역사의 전환기를 살고 있다. 70년 남북(南北) 분단 시대를 지나고, 2018 6 12일 북미(北美)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평화 번영 통일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내기 위해서는 전환을 가져올 결단이 필요하다. 역사는 지금 그런 결단을 내릴 출중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당장 표가 될 일만 하는 정치인은 흔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내지 못한다. 역사는 때로는 당장 이뤄지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더라도 새로운 시대를 전진시키는 결단을 내릴 그런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 기억 속에 남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1) 김구, 단독선거 단독정부에 맞선 자주통일국가 건설 천명.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국민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정치 지도자 중에 한명은 황해도 해주 출생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다. 김구 선생이 한 일은 많았지만,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장면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1948년 방북(訪北)이다. “지금 이때 나의 단일한 염원은 3,000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一身)에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 02월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에 실린 김구 선생의 성명서).

 

1945년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38선이 그어지고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며, 분단이 되기 시작했다. 38선 이남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美軍政)은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미군정은 단독 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1948 04 03 제주 4.3학살까지 저질렀다. 제주 도민이 단독 선거를 반대하여 투쟁하자, 미군정(美軍政)이 제주 도민을 학살했는데, 학살당한 사람이 몇인지 정확히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당시 제주 도민이 30만 명이었는데, 그중 3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도민이 학살됐다고 한다. 단독선거 단독정부을 실시하려는 미군정에 맞서 통일 정부를 추진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가장 명망 있던 정치 지도자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선생은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에 1947 7 19, 총격 테러로 사망했다. 여운형 선생은 생전 12번이나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도 우리 민족은 결코 분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48 04 19, 남과 북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데 모였다. 이 회의가 바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이다. 김구(金九) 선생은 단독선거 단독정부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각오로 방북했다. 그런 희생적인 결단의 덕분으로 남북 지도자는 연석회의에서  외국 군대 즉각 동시 철수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후, 내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  외국 군대 철수 후,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꾸릴 것  이 임시정부가 전조선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의를 맺었다.

 

그렇게 분단에 맞선 김구(金九) 선생은 결국 1949 06 26 암살당했다. 한국 국민은 김구 선생을 진정한 한국 지도자로 추모한다. 김구 선생이 목숨을 걸고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단독선거 단독정부을 반대하고, 자주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언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남과 북이 서로 갈등했기 때문에 남북 분단이 일어났다며 우리 민족을 헐뜯는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방북하여 남북 합의를 맺음으로써 우리 민족은 분단을 막기 위해 단합했음을 증명했다. 김구 선생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역사에는 남한 사람은 단독선거 단독정부에 동조했고, 이승만이 남한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였다고 기록됐을 것이다. 김구 선생의 방북은 구국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김구 선생의 자주통일 국가건설 노선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승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은 매국매족 행위로 기록하고 있다.

 

 2) 김대중, 전쟁 통일에 맞서 조국 평화 통일을 외쳤다.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정치인 중에 한명은 전남 신안 출생 김대중(金大中 1924-2009)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큰 업적을 쌓았다. 특히, 대통령으로서 2,000년에 첫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을 만든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들어온 것은 바로 1971년 대선 때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섰다. 당시 한국 사회는 반공반북 분위기가 지배했다. 박정희는 1968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국민에게 외우게 했다. 여기에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해야 한다는 말을 넣어 반공 교육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군사독재 시대에는 반공 글짓기,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웅변 대회 같은 행사도 많았다. 1968년부터는 교련(敎鍊)이라고 해서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했다.

 

이렇게 반공반북(反共反北) 분위기가 휩쓰는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가 된 후, 첫 기자회견에서 평화 통일론을 주장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공존해야 하며, 남북 교류를 통하여, 평화 통일을 실현하겠다고 외쳤다. 그리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 보장 구상을 제시했다. 지금은 조국(祖國) 통일이라고 하면, 보수정당인 야당 국힘당조차 북진 통일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조국(祖國) 통일이라고 하면, 북진(北進) 통일을 의미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평화 통일론은 시대를 앞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 선거 기간에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라면서 비난했다. 그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계속 빨갱이 색깔론에 시달렸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이 초대의장을 맡은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를 이적(利敵) 단체로 규정하기도 했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 대통령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거짓 날조 조작을 해서 내란죄를 씌워서 체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항상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평화 통일을 주장한 댓가는 이처럼 참으로 혹독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그 고비를 모두 이겨냈고 끝내 1998 02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자,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자신의 신념인 평화 통일을 6.15공동선언에 담았다. 6.15공동선언은 오늘날 통일의 이정표로 불린다. 북진(北進) 통일론이 횡행하던 때에 누군가 목숨을 걸고, 평화 통일을 외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북진 통일론이 지배하는 나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 대결이 고조되던 끝에 결국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지도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이 시대의 선구자가 되어 평화 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반공이 아니라 평화 통일이 대세가 되었다. 헌법만 봐도 김대중 대통령의 공적(功績)을 느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 통일을 주장하기 전인 1969년까지만 해도 헌법에는 평화 통일이란 말이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평화 통일론을 주장한 후, 1972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그리고, 1987 06월 항쟁 이후, 헌법 개정하면서는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3) 1986년 유성환 신민당 의원,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국시(國是).

 

우리 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反共)보다는 통일(統一)이어야 한다.” 경북 성주 출생 유성환(兪成煥 1931-2018) 신민당 의원 1986 10 통일’(統一)이 국시(國是)라고 말했다. 국시(國是)란 나라의 기본 방침이란 뜻인데, 박정희는 1961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삼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공이 팽배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통일(統一)이 국시(國是)라고 외친 것이다. 이 말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성환 의원이 이 말을 하자, 국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다른 국회의원들이 일제히 소란을 피우며 반발했고, 국회의장은 유성환 의원의 마이크를 끄고 제지했다. 그것으로 그날 회의는 종료됐다. 당시 여당과 보수 단체가 유성환 의원을 공격해 나선 것은 물론이다. 검찰도 그 즉시 수사에 나서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유성환 의원 체포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여당은 야당이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채,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현직 국회의원이 의정 활동으로 한 말 때문에 구속된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2020,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사건 중에 조국(曺國) 법무부장관 사태가 있는데, 당시 논란은 조국(曺國) 사태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2021, ‘반공’(反共)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긴 힘들다. 보수 정당인 국힘당도 반공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나 남북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달랐다.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통일에 대해서는 공산주의를 없앤다는 멸공(滅共) 통일,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승공(勝共) 통일이란 말만 울려 퍼지던 때였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년 동안 매일 0.9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고 한다. 한번 국가보안법에 걸려들면, 훗날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이미 낙인이 찍혀 본인은 물론 가족 친지까지 신원 조회 결과, 취업에 불이익이 있는 식의 사실상 연좌제(緣坐制)도 살아 있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정삼환의 동생 정남도 "형에게 죽으라고 할 만큼 증오했었다" 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한 선생님이 학생의 생일 축하를 해주며, 책을 선물했는데, 지나친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일도 있었다. 반공 분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다 보니, 친절한 것조차 간첩으로 몰리는 극단적인 근거로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성환 의원은 국회에서 역사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통일(統一)이 국시(國是)라고 발언했다. 유성환 의원은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이른바 신상 발언을 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지금도 작년 1986 10 소위 국시(國是) 발언 파동으로 체포 구속될 때의 소신에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조국의 민주화와 조국(祖國)의 자유 민주 통일을 위해서 선배 여러분과 같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길을 결코 택하지 않을 것이며,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정치와 삶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한 정치인이 살아서 하는 정치는 물론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정치일 것입니다.” 유성환 의원의 통일(統一)이 국시(國是)라는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뒤, 불과 2년 만에 시대는 전변했다. 1987 06월 항쟁이 일어났고, 헌법이 바뀌었다. 바뀐 헌법엔 평화 통일이 명시됐다. 유성환 의원이 말한 것처럼 통일이 국시가 된 것이다. 유성환 의원의 발언은 전두환 신군부 독재(獨裁)에 파열구를 냈다. 유성환 의원 같은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다.

 

 4) 문재인, 한미(韓美) 동맹이 아니라 남북(南北) 협력 돌파구 모색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어떤 정치 지도자가 필요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은 역사 전환기(轉換期)이다. 그동안 미국이 세계 패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런 미국에 의존하여 안보를 지키려 했고, 경제 성장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끝났다. 우리나라는 한미(韓美) 동맹으로 안보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미(韓美) 연합 훈련을 하면, 우리나라가 더 안전해지기는커녕 남북(南北) 갈등, 북미(北美) 갈등이 커져서 오히려 안보가 불안해진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의존해서 성장하려 하지만, 지금은 정작 미국이 경제 위기에 봉착해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머지 중국을 상대로 미중(美中)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동맹국까지 수탈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2020년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했고, 미국 무기를 미국의 압력에 의해 구매해야 하며, 미국에 투자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에서 받는 혜택이란 거의 없고, 오히려 미국에 우리의 이익을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우리의 살길은 남북(南北) 협력에 있다. IBK 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문재인 정부가 구상한 10대 남북 경협 사업 20년 동안 실행하면, 남북(南北)이 얻는 경제 이익이 613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남북 협력은 동북아 협력으로 이어져 엄청난 경제적 파급력을 가져오게 된다.

 

경남 거제 출생의 문재인(文在寅) 대통령 2018 북한과 4.27 판문점 선언을 합의했다. 온 국민이 4.27 선언을 환호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미 워킹 그룹을 만든 후, 미국이 한국 정부를 하나하나 통제하는 바람에 남북(南北) 협력은 모조리 막혀버렸다. 많은 국민이 경제가 어려워 힘들어 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남북 경협을 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이때, 미국이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는 날이 하루하루 길어질 때마다, 남북 경협으로 얻었어야 할 막대한 기회 비용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이 부당한 내정 간섭을 해오면,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우리 실리를 챙길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미국을 쫓아다니며 승인을 얻는 데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4.27 판문점 선언 2007 10.4 선언이 실현되지 못했듯이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였다. 특히, 2021 08월은 우리에게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2021년 출범한 미국 바이든 정부는 03월에 한미 연합 훈련을 강행함으로써 대북 적대 정책을 이어갈 것임을 보여줬다. 미국은 08월에도 한미 연합 훈련을 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2021년 열린 조선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강 대 강, 선 대 선 원칙을 표방했다. 바이든 정부가 2021 03월에 이어 08월에도 한미韓美) 연합 훈련을 강행하면, 북한은 더 이상 바이든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군사 대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2017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특별히 핵무력을 이용하여 군사 시위를 한 적이 없다. 단거리 미사일 혹은 방사포를 시험한 적만 있을 뿐이다. 만약, 2021 08월 북미 사이에 군사 대결이 펼쳐지면, 핵보유국끼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매우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우리는 08월 한미 연합 훈련을 과감히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 협력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한다. 남북 공동 훈련으로 안보를 실현하고, 남북 경협에서 경제 성장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런 역사적 결단을 할 정치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미국에만 의존했던 시대를 끝내고, 남북(南北)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역사 전환기(轉換期)를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역사 전환을 결단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낼 김구, 김대중, 유성환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 역사와 민중은 김구, 김대중, 유성환을 잇는 출중한 지도자, 신념을 가진 선구자를 부르고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반공에서 통일로 국시가 바뀌었듯이 미국에 의존만 하던 역사를 청산하고, 남북(南北) 협력으로 역사 전환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 [자주시보신문, 아침햇살127, 입력: 2021 05 19]

 

 

■ 곡신불사(谷神不死), 난세를 극복하는 힘

★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온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깊은 산골짜기 계곡(溪谷)이다. 그곳은 세상의 모든 것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 정신(精神)을 갖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결코 그곳의 생명력은 죽지 않는다(不死).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溪谷)의 정신(精神)이야말로 가장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지닌 원천이다. 이 계곡의 정신을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곡신’(谷神)이라고 했고,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했다.

계곡(溪谷)의 정신(精神), 즉 곡신(谷神)의 의미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강하고 딱딱한 모습 보다는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이 중요하며, 곡신(谷神)이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이다. 도덕경(道德經)은 부드럽고 겸손한 것이 강하고, 교만한 것 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곡의 정신은 마르지 않는다. 노자(老子)가 꿈꾸었던 위대함은 근엄하고, 군림하고, 강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드럽고, 낮추고, 따뜻한 계곡의 정신이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계곡(溪谷)의 정신(精神)은 결코 죽지 않는다. 진정한 위인(偉人)은 세월이 지나봐야 드러나는 법이다. 센 것이 오래 가고 경쟁력 있을 것이란 잘못된 생각이 팽배하고 있는 요즘, 부드러움과 낮춤의 계곡(溪谷) 정신이 어떤 시절 보다 돋보이는 시대이다. 곡신불사(谷神不死)의 교훈은 지금처럼 어지러운 난세(亂世)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 우뚝 선 산(山)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자기를 낮추고 있는 계곡(溪谷)의 아름다움은 더욱 더 아름답다.

★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 6장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이라고 했다. 신령한 골짜기(谷)에 어려 있는 신(神)은 죽지 않는다(不死). 이것을 일컬어(是謂) 현묘(玄妙)한 골짜기(牝)라고 한다. 과연, 현묘한 골짜기(玄牝)는 무슨 의미로 쓰인 것일까?

그 당시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로서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쳐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백성들의 생활은 심히 곤궁하고 삭막한 상태였다. 갖은 전쟁과 노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는 천지를 뒤덮었다. 이로 인하여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여기 저기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거기다 전염병까지 돌아 민심이 흉흉하고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로 유랑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런 상황 하에서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는 믿음과 사상은 더욱 깊어졌다. 이런 견지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는 노자(老子)의 화두(화두)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시원한 물은 고통과 죽음을 초월하여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러면서 신령한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초토화되어 가뭄과 흉작과 기근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화된 상황 속에서도 깊은 산 중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물은 시원스레 쉼 없이 너그럽게 흘러내린다. 이 때, 지나가는 길손이 그 물맛을 느끼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가뭄과 기근의 황폐 속에서도 깊은 산 중 계곡(溪谷)의 물은 결코 마르지 않고 신비롭게 펼쳐진다. 마치 천지의 존립과도 근본적으로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이는 도인(道人)의 의식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어짊과 박애(博愛)의 정신은 마르지 않는 계곡(溪谷)의 기운과 같다. 이는 천지(天地)가 존재하는 생명의 원천과 같다. 도인(道人)의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 의식 세계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결같이 그리고 한없이 흘러나오고 이어지지만, 결코 다함이 없는 계곡(溪谷)의 물과 같은 법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천지(天地)가 쉼 없이 작용하고 변천하지만, 다함없이 존재하는 근본 이치와도 같다.

★ 산으로 상징 되는 남자의 존재는 계곡으로 상징되는 여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 산이 아름다운 것은 물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없거나 물을 담아내는 작은 호수를 품어내지 못하는 산은 이미 힘이 없는 산이다. 왜냐면, 계곡의 물은 만물의 생명을 키워내는 젖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사는 이유는 여자를 향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며, 여자는 곧 사람의 생명을 키워내는 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덕성은 곧 계곡의 덕성이며, 계곡의 덕성은 각박하고 메마른 험난한 세상을 찰지고 기름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산(山)이 모진 비바람과 세찬 눈보라를 견뎌내는 이유는 계곡(溪谷)의 물로 인해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자(男子)가 험한 고난에 직면해서 혹은 어렵고 힘든 일터에서 울컥 쏟아지는 설움과 눈물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여자(女子)로 인해 따뜻한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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