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편지

■ 그릇(器)을 비워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마도러스 2021. 5. 3. 04:23

■ 그릇(器)을 비워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 고개를 겸손하게 숙이면, 부딪히지 않는다.

 

조선(朝鮮) 초기의 문신(文臣)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 19살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20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맹사성이 어느 날, 강원도 오대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선사(懶瓮禪師)를 찾아갔다. 그리고, 여쭈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座右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나옹선사(懶瓮禪師)가 대답하기를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 “그런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孟思誠,)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나옹선사(懶瓮禪師) 녹차(綠茶)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찻물이 넘치도록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가다가 머리가 문턱 위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한 번 숙이고 또 숙이고, 양손을 먼저 내밀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기허수물(器虛受物) 심허수도(心噓受道)” (道典 2:142). 그릇()을 비워야 물건()을 담을 수 있고, 마음()을 비워야 도()를 받을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집착의 끈을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도 생기고, 능력도 생긴다.

 

 젊은 양반! 오던 길을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조선(朝鮮) 시대,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있으면서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선비가 와서는 맹사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노인! 지금 건넛마을에 급한 일이 있는데, 보다시피 내가 새 버선에다 새 도포를 입어서 개천을 건너기가 곤란하니, 나를 좀 업어서 건너가게 해주시오. 그러면, 오늘 낚시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은 주겠소.” 맹사성은 제가 노인이라 기운이 많이 모자라지만, 어디 이리와 업히시오.” 라고 말하면서 젊은 선비를 업어서 강을 건너 주었다. 그리고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물었다. 이 젊은 선비는 여기 맹사성 정승 대감 내 부친 친구이신데, 벼슬 자리 하나 부탁하러 갑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맹사성(孟思誠)이 이렇게 말했다. “젊은 양반! 헛수고하러 찾아가지 마시고, 오던 길을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왜 그러냐고 하자, 그때서야 맹사성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젊은 선비는 너무나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가고 말았다. 맹사성은 조선 시대 초기에 청렴함의 대명사였다. 이렇게 겉모습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 능력과 재주, 외모 등의 겉만 보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싸가지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과연, "싸가지"란 무슨 뜻일까?  () () () (),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을 "()가지 없는 놈"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것이 변하여 "싸가지 없는 놈"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두 사가지 (싸가지) 덕목을 잘 지켜야 남으로부터 신뢰감을 받을 수 있다

 

■ 검은 소를 수족(手足)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던 맹사성

 

어느 봄날, 맹사성(孟思誠)이 온양의 고택(古宅) 뒷산 설화산에 올랐다. 그리고, 아이들이 검정소를 마구 때리고 괴롭히며 장난치는 장면을 보았다. 맹사성은 아이들을 호통쳐서 내좇아 버렸다. “이런 고얀 녀석들! 말 못 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아이들이 줄달음치고 도망갔다. 그런 다음, 맹사성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 그는 검은 소를 얼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소죽을 쑤어서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고맙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그 후, 주인 잃은 소를 찾아가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맹사성은 이 검은 소를 수족(手足)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다. 맹사성이 검정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한양을 오가는 모습은 소와의 인연이 얼마나 친숙했음을 알 수 있다. 먼 길을 갈 때에도 반드시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 그 후, 맹사성이 죽게 되자, 그 검은 소도 슬픔을 못 이겨서,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주위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흑기총(黑驥塚)이라 이름도 지어주며, 해마다 벌초도 해주고, 잔도 부어 주었다고 한다. 맹사성의 묘에서 약 30m 곁에 있다.

 

 소를 타고 갑자기 나타난 노인,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허름한 차림에 소를 타고 지나가는 맹사성을 몰라본 지방 관리들

 

조선 초 좌의정(左議政) 맹사성이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牙山)의 온양(溫陽)에 볼일이 있어 내려간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자, 경기도 양성과 진위의 현감(縣監)은 맹사성이 지나가는 길에 그들의 고을 근처를 지나친다는 것을 알고서 맹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중을 나와 기다렸다. 두 현감은 하인들에게 길을 닦아 청소하게 하고,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시켰다. 그런데, 한참동안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두 현감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포졸을 불러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라고 물으니 아직입니다. 높으신 분의 행차라 그런지 늦어지나 봅니다.” 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현감은 알았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잘 지키거라.” 라고 단속하였다. 얼마 후, 큰길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허름한 옷을 입고, 소를 탄 노인이 길에 들어서자, 지키고 있던 포졸이 다른 길로 돌아가시오!”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노인이 금방 지나갈 것이니, 가게 해주시오.” 라고 했다.

 

포졸은 노인과 실랑이가 길어지자, 화가 나서 노인을 잡아끌고, 두 현감에게 데려가 하소연하며, “이 노인이 아무리 돌아가라고 화를 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소란한 상황에 두 현감도 궁금했던 터였다. “어떤 사람이길래 맹사성 정승이 오실 길을 지나가려 하느냐?” 다그친 뒤, 데려온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바로 맹사성 정승이었다. 두 현감(縣監) 아이고, 일이 잘못되었구나! 정승 나리에게 큰 실수를 했으니 어쩐담!’ 생각하며 넙죽 엎드렸다. 맹사성이 평소에 소박한 차림새에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소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높은 지위의 맹사성이 허름한 차림으로 이동을 하는 의외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오해와 진실을 담은 일화(逸話)이다보잘 것 없어 보이는 노인이 정승 맹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반전이 쾌감과 재미를 주고 있다. 또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관리들의 어리석음과 맹사성의 소탈하게 여유를 즐기는 자유분방함도 대비되어 나타난다. 특히, 이 이야기는 다른 지역보다도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더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맹사성을 통해 당시 서민들이 바라던 청렴하고 소탈한 위정자(爲政者)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살았던 맹사성(孟思誠)

 

맹사성(孟思誠)은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요즘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淸白吏)다 보니,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그의 생활에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한 대감이 그의 집을 찾았다. 그 대감은 속으로 놀랐다. '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게 살다니...!' 안으로 들어가서, 맹정승을 만난 대감은 더욱 놀랐다. 여기 저기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했다. 맹사성 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을 갖다 놓고 생활했다. 대감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감께서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산단 말이오?" 그러자, 맹사성이 말했다. “허허, 그런 말 마시오! 이런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오? 그런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무척 부끄럽소. 나야 그에 비하면. 호강(豪强) 아니오?”

 

 맹사성(孟思誠)은 효성이 지극하고 ()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맹사성(孟思誠,)은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이며, 조선 시대의 3대 청백리(淸白吏)이다. 경기 파주의 황희 정승(1363-1452), 전남 장성의 박수량 선생(1491-1554), 충남 아산의 맹사성(1360-1438)이 조선 3대 청백리(淸白吏)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는 맹사성(孟思誠)의 가족이 살던 옛집인 맹씨 행단(杏壇)이 있다. 맹씨 행단은 맹씨네가 살던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맹사성은 최영(崔瑩) 장군의 손주 사위로써, 맹씨 행단의 집과 땅은 최영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전한다. 1963년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맹사성(1360-143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훌륭한 인품과 재능 덕에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좌의정(左議政)의 자리에 있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능력이 뛰어난 관리라는 청백리(淸白吏)의 상징으로, 꾸밈없이 소박하게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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