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역사.문화

■ 후한말 무정부 시대, 위.촉.오 삼국 낳았다.

마도러스 2021. 2. 13. 15:27

■ 후한말 무정부 시대, 위.촉.오 삼국 낳았다.

 

 황건적의 난 시작으로 십상시의 난, 동탁의 폭정 이어져

 

속지 말자! 화장발, 잊지 말자! 조명발.” 역사에도 이런 분칠이 있다면, 중국의 삼국시대를 빼놓을 수 없다. 나관중(1330~1400)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필두로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매번 서두를 장식하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 나무 밭에서 삼형제 의리를 맺음)조차 허구라니,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극적 이야기에 더 열광하기도 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팩트(fact)에 픽션(fiction)을 더한 팩션(Faction)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진수(233-297) 삼국지’, 배송지(372-451) 삼국지주’,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 등 정사(正史)를 중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삼국 시대, (). (). () 군웅할거 시대 개막

 

삼국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 184년부터 전국이 통일된 280년까지이다. 위나라( 220-265), 촉나라( 221-263), 오나라( 222-280)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다. 이 때문에 가장 먼저 위()나라가 세워진 220년을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후한(後漢)의 영제(167-189), 헌제(189-220)가 집권하던 때를 포함한 이유는 삼국의 형성 과정에서도 여러 의미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 삼국의 영토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인구 밀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위()에 살았다. ()이나 오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와 촉()의 힘을 합쳐도 위()에 열세였다. 현격한 국력 차가 존재했다. 이런 삼국을 세우는 데 기틀을 닦은 것은 오() 손견(155-191), () 조조(155-220), () 유비(161-223)이다. 손견과 조조는 동갑내기이며, 유비는 이들보다 여섯 살 아래이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서 군웅할거, 각자도생, 이합집산

 

 () 손견은 강동 양주에서 대대로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다. 20대 초반에 황건적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여 장사태수, 요즘 군수 정도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오정후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190년에 () 동탁연합이 후한의 수도 낙양(洛陽)을 공격할 때에도 동참했다.  () 조조는 환관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수도 수비대 관직)로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에서 공을 세웠다. 반 동탁연합의 기수로서 전국적 명망을 떨쳤다.  () 유비는 변변찮은 지방 출신으로 노식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 때에 조조. 손견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약이 미미했다. 이후 사형인 공손찬에 의탁하는 처지가 되었다. 명문가 자제인 손견과 조조는 20대 초반에 주목을 받았으나, 유비는 멍석을 만들어다 팔아야 할 정도로 미천한 집에서 나고 자랐다. 유비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세워 손견, 조조와 경쟁했는지는 삼국지를 읽는 좋은 포인트이다.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동탁의 권력 장악, 혼란을 겪다!

 

세 사람의 운명이 처음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184년 황건적의 난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출발점이다. 후한(後漢) , 외척과 환관의 정쟁이 끊이질 않았고, 백성들은 벼슬아치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참위설(讖緯說). 음양오행설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한 태평도(太平道)가 출현했다. ‘창천이사 황천당림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고 누런 하늘이 일어나 갑자년에 천하가 흥할 것이다). 태평도(太平道) 구호에 따라 푸른 하늘은 후한(後漢)을 뜻하며, 누런 하늘은 새 나라를 의미한다. 현세구제(現世救濟)의 태평도가 중심이 된 농민 봉기에서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이유이다. 황건적의 난은 난세에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며 토벌되었다. 하지만, 황실 외척과 10명의 환관이 대립한 십상시의 난’, ‘동탁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지며, 혼란은 계속됐다. 동탁이 영제(167-189)를 폐위한 뒤, 헌제(189-220)를 즉위시키고, 태후를 살해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자, () 동탁연합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동탁은 협공을 피해 황실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다. 최 교수는 어린 황제가 독재자의 꼭두각시가 돼 버리면서 중앙권력이 지방권력을 통제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아나키) 상태였다면서 이에 전국의 군웅들이 할거했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현상타파 세력의 등장이라고 설명했다.

 

 원소. 원술 형제간 대립구도에 제후들 이합집산 거듭

 

후한(後漢)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힘이 있는 자가 곧 법이자 정의가 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가 펼쳐진다. 형식상 황제인 헌제(189-220)의 거취를 놓고, 두 차례 전략적 순간을 맞이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발해태수 원소, 기주자사 한복 등은 새로운 황제를 모시자고 주장한 반면, 남양태수 원술, 서주자사 도겸 등은 반역 세력을 처단해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 만족하자고 반박했다. 원소. 원술 형제 사이에 대립 구도가 형성된 셈이다.

 

맹주인 원소. 원술 두 사람을 사이에 놓고, 제후들끼리 이합집산이 벌어졌다. 원소 측의 책사 저수는 기··· 4주를 평정한 뒤, 후한(後漢) 장안(長安)의 황제를 맞이하고, 낙양(洛陽)의 종묘를 부활시키라는 대전략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원술 측은 공손찬, 도겸, 손견 등과 손잡은 채, 조조(曹操)를 쳤으나 패퇴하고 만다. 원술이 초반 구도를 잘 잡았지만, 몇 번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주도권을 상실했다.

 

조조(曹操)는 동에 서주, 남에 원술과 손견, 서에 동탁(후에 이각·각사) 등 적으로 둘러싸여 경우에 따라 존립이 어려울 수 있었지만, 난관을 잘 극복해냈다. 조조(曹操) 192년 청주의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여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키더니, 193년 가족의 원수인 도겸이 있는 서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눈이 먼 듯 조조(曹操)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흑역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조조는 서서히 세력을 키워나갔다. 후한(後漢) 헌제(189-220)는 낙양으로 도망치는 유랑 생활 중었는데, 195년 그의 신변에 또다시 변곡점을 맞이했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헌제를 품으라는 저수의 간언을 원소는 귀찮은 일로 치부하며 무시했다. 이에 반해 조조(曹操)는 반대를 무릅쓰고 헌제를 옹립했다. 천자를 모시고, 제후를 호령하려는 의도였다. 명목상의 통치권자이긴 하지만, 후한(後漢) 황제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정치가 무력이나 칼로 이뤄지는 것 같지만, 명분도 서야 했다. 이런 결단으로 조조의 영향력은 한층 커졌다. 정국의 핵심은 원소-원술에서 원소-조조로 변화했다. 이후, 조조(曹操)는 원소와 결전에서 승리하며, 화북 지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유비(劉備)는 조조로부터 달아나서 형주에 와 있었다. () 유비(劉備)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량을 군사(軍師. 군대 우두머리)로 맞아들이면서 정세는 다시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