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국방

아파치, 한국 육군의 주력 공격형 헬리콥터

마도러스 2020. 11. 18. 04:27

 

■ 아파치, 한국 육군의 주력 공격형 헬리콥터

 

 시콜스키 R-5 헬기는 2차 세계대전 말부터 본격 실용화된 헬리콥터이다. 1950 6.25 한국전쟁에서 긴급 외상 환자 수송과 구조 임무에 투입되면서 점차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투입된 이 헬리곱터는 '하늘의 구급차'로 불렸다.

 

 AH-1G 코브라 헬기는 최초의 공격 헬기이며, 베트남 전쟁(1955-1975)에서 크게 활약했다. 공격 헬리콥터(Attack Helicopter)는 다양한 용도의 헬리콥터 중 적군 반격에 대응하고, 아군 헬리콥터를 호위하는 역할을 한다. 전차들의 저승사자가 곧 공격 헬기인데, 당시 생소했던 공격 헬기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AH-64 아파치 헬기는 미국 육군의 주력 공격형 헬리콥터이다. 우리 한국 육군도 운용 중이다. 아파치의 임무는 주요 이동 표적에 대한 정밀 공격부터 전천후 주야간 무장 정찰 임무까지 망라한다. 특히, AH-64E 아파치 가디언부터는 전방석의 부조종사가 무인 항공기인 그레이 이글을 병행하여 통제할 수 있다. 아파치의 ATK M230 30mm 기관포는 분당 625발의 속도로 사격할 수 있으며,  1,200발의 탄환을 적재할 수 있다. 또한, 날개에 헬파이어 미사일이나 하이드라-70 로켓을 조합하여 장착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파치(Apache) : 아파치(Apache)족은 북아메리카대륙 남서부에 분포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이다. 메스칼레로족. 지카릴라족. 치리카후아족. 리판족 등의 동아파치족과 키베쿠에족. 밈브레뇨족. 코요테로족 등의 서아파치족으로 나뉜다. 말을 능숙하게 다루고 지형에도 익숙하며, 뛰어난 전략과 용맹스러운 전투력으로 북아메리카에 진출한 유럽인들에 대항했다. 미국이 독립한 뒤에는 미국 연방군과 대립하여 벌어진 아파치 전쟁과 나바호 전쟁 등을 통해 종족의 생존과 영역의 방어를 위해 분투했으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국 연방군에 패배하고, 미국의 강압에 의해 부족별로 나뉘어진 인디언 보호 구역에 정착했다. 아파치족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초기에는 스페인인과 멕시코인, 미국이 건국한 후에는 미국인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영토를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북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욕에 저항해서 1861년 코치스(Cochise)가 일으킨 전쟁은 미국 연방군과 남서부 인디언 사이에 25년 동안 계속된 나바호(Navajo) 전쟁(1861-1865) 아파치(Apache) 전쟁(1874-1886)의 시발점이었다. 나바호(Navajo)족과 아파치(Apache)족은 날랜 말을 능숙하게 다를 줄 알았고, 지형에도 익숙했지만, 미국 연방군의 우수한 무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바호(Navajo)족은 1865년 항복한 뒤, 뉴멕시코 보호구역에 정착하기로 동의했다.

 

 1874년 미국 정부는 모든 아파치(Apache)족 인디언을 인애리조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아파치족 전사들 대부분은 영구적인 유폐 생활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크고 작은 전투를 줄기차게 일으켰다. 아파치 전쟁(1874-1886)은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제로니모와 빅토리오가 이끄는 아파치족의 기습전이 주기적으로 계속되면서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이 보이자, 또다시 미국 연방군이 개입했다. 아파치 전쟁은 결국 1886년 제로니모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 후, 아파치족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은 자신들이 살던 영토에서의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치리카후아족은 서부지역에서 플로리다. 앨라배마. 오클라호마 등의 요새로 이동하여, 전부 27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이들은 1913년 오클라호마에서 할당지를 받거나 뉴멕시코의 메스칼레로 보호구역에서 살도록 강요되었는데, 1/3은 할당지를 받았고, 2/3는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보호구역에 있는 아파치족의 숫자는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모든 아파치(Apache)족은 애리조나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이동하여 살 것을 1874년 명령받았다. 제로니모(Geronimo) 3번이나 도망하였고, 설령 인디언들이 투항한다 하여도 항상 그만은 체포되지 않고 도망을 하였다. 1876년 아파치 인디언들이 강제로 동부 애리조나 지역의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내몰릴 때, 제로니모(Geronimo)는 그의 추종 세력과 함께 멕시코로 도망했다. 그 곳에서 그는 곧 붙잡혀 애리조나 지역으로 압송되었다. 그로부터 1870년대 말까지 그는 그곳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1876년 미국 육군은 모든 아파치 인디언을 보호 구역으로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1년 한 아파치족 예언자가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보고서, 그는 인디언 비밀 캠프로부터 내려와서 다시 전면적인 보복 전쟁을 선언하였다. 제로니모(Geronimo)는 미군을 비웃으며, 10년이나 넘게 신출귀몰(神出鬼沒)하였다. 이 때, 지방 신문들이 제로니모(Geronimo)의 활동을 과대해서 말하게 된 까닭에, 그는 가장 악명높고 공포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잡히게 될 당시에는 5,000명의 미군 병력 (당시 미국 전체 병력의 1/4), 그리고, 3,000명의 멕시코 병력이 동원될 정도였다. 1886 03 25일 제로니모(Geronimo)는 미국 육군에게 투항하였으나 다시 도망하였다가 1886 09 04일 마지막으로 투항하였다. 미국 육군은 그 당시의 제로니모(Geronimo)의 용맹성과 지략을 기리고 있다. 현재도 미국 육군 공수부대가 지상에 낙하할 때, 그들은 제로니모’(Geronimo)라는 구호를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