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독립 운동가, 의열단 이종희(李鍾熙) 장군

마도러스 2020. 6. 15. 22:45

■ 독립 운동가, 의열단 이종희(李鍾熙) 장군

 

이종희 장군은 의열단장 김원봉과 함께 광복군 제1지대를 지휘한 독립 운동가이다. 일제는 마지막까지도 그의 본명을 알지 못했는데, 이인홍, 이집중이라는 두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덕분에 독립 운동을 오랫동안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종희(1890.04.19-1946.03.28)에 관한 기록은 의열단으로부터 시작한다. 192410월 의열단의 활동을 적은 일제 관헌의 기록물에는 이종희가 의열단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30살이 넘은 나이에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 1919년 만세 시위 운동의 영향으로 무장 투쟁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둘째,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설립된 이후, 국내에서 설렁탕집을 가장한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이나 연통제 요원에 의한 스카우트였다.

 

어찌되었건 이종희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베이징에서 일제의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다. 김달하는 외교부 관리였으나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후, 중국으로 건너가 친일 관리의 부관이 되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독립 운동가들의 정보나 위치를 일본 경찰에 제공했다.

 

이회영, 유자명과 상의한 후, 의열단원들은 의열단의 이름으로 친일 밀정을 처단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 신문 경보’(京報)에도 실렸는데, 김달하은 죽어 마땅한 자라고 표현했다. 당시 밀정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동지들은 당연한 결과라며, 일말의 동정도 표하지 않았다. 실제로 중국 경찰 당국도 살인범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중국에게도 일본은 적이었기 때문이다.

 

1925년에 의열단은 기존의 급진적 암살 파괴 운동에서 군사 정치 활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이종희 또한 황포 군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하여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열단은 독립운동의 여건 및 정치적 협력관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을 감지하고서는 난징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황포 군관학교 동문 및 인맥을 총동원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의 비밀 조직들과 협력하여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설립했다.

 

이 때, 이종희는 인근의 다른 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의열단장 김원봉이 그를 찾아와서 간부학교를 운영하고, 교관이 되어 뜻을 이루자는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 신뢰하던 의열단원 동료이자 동포였기에 이종희는 흔쾌히 승낙하고 의열단으로 복귀했다.

 

그 후, 이종희는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그리고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하고, 전장을 누비면서 끝까지 그와의 의리를 지켰다. 그러나, 광복을 1년 앞둔 1944, 지병으로 인해 병상에 눕게 되었고, 1945년 광복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 후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원들, 독립단체 요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개인 자격으로 교통편과 여비를 마련해야 했다. 이종희 또한 배에 오른지 4개월 만에야 귀국했다. 하지만, 여독이 깊어져서 부산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배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의열단장 김원봉을 비롯한 수많은 동지들은 수십 년을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장에서 싸웠던 전우를 잃고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드디어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아보려는 순간에 숨을 거둔 그의 삶이 너무나 비통하고 억울하여 다들 안타까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