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조국을 배반한 백선엽 장군은 극형감

마도러스 2020. 6. 11. 03:19

■ 조국을 배반한 백선엽 장군은 극형감

 

● 백선엽 장군은 조선 독립군 소탕 특설 부대 출신이다.

 

박경석(88) 육군 예비역 준장은 "프랑스였다면, 백선엽 장군의 행동은 극형감이었다" 라고 성토했다. 백선엽(101) 장군의 사후 현충원 안장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 20200609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행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겠지만, 후과가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백선엽은 일제(日帝) 시대에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 데에 앞장선 사람이다. 일본 군대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파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간도 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 묘지에 안장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겠다. 그것이 백선엽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낫다. 이후, 벌어질 사태를 어떻게 견디겠나?" 라고 덧붙였다. "아무리 나중에 공적을 세웠더라도 조국을 배반한 것이 입증되면, 프랑스에서는 극형이다"라고 말했다.

 

박경석 장군은 이른바 '육사 생도 2' 출신이다. 육사 생도 2기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시, 육사 입학 후, 한 달도 안 되어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임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된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한동안 육사에서 정식 기수로 취급되지 못했다. 육사 생도 2기 상당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박경석 장군도 전투 중에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게 다쳤다. 그 때, 왼쪽 귀의 고막을 잃기도 했다. 그는 1980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었는데, 그 당시에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무공훈장 심사를 거부했으며, 결국 군복을 벗었다. 전역 후, 한국군사 평론가 협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긴 시간 동안 활동했다. 그는 "백선엽 장군이 아무리 나의 옛 상사라 하더라도 그를 국가 보다 우위에 둘 순 없다.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조선일보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에 앞장을 섰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제가 노골적으로 반대하니까, 청와대 에서도 연락이 왔다. 전화를 했던 비서관이 이명박을 칭하며, '각하'라고 하더라. '장군님, 각하가 결정하시려는데, 왜 반대하십니까? 그러기에 내가 '야 이 새끼야! 대한민국이 어떻게 생긴 나라인데,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대한민국 초대 명예원수로 세울 수 있냐?' 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백선엽이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우리의 건국 이념은 말소되고 만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결국, 국방부에서 육군 소장인 인사복지실장과 육군 대령인 담당 과장이 집으로 찾아왔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저런 자료를 보여줬다. 결국, 명예원수 추대가 무산됐다. 나 혼자로선 힘이 부족해서 채명신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2013년 세상을 떠난 채명신 장군은 그분의 유언에 의해서 서울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채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부인에게 그리고 저에게 항상 8평 장군묘 말고, 월남전 전우들이 있는 1평 사병묘 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 왔었다. 점심을 '서울역 그릴'에서 함께 먹었고, 백선엽에 대해 이야기했다. 채명신 장군도 백선엽 장군의 공적이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를 통해 백선엽이 우리나라를 혼자 다 구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낙동강 전선이 240km였고, 여기에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8개 사단이 합심해서 지킨 것이다. 백선엽은 그 중에 일부분만 역할을 한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백선엽을 홍범도 장군에 비유했고,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이순신 장군에 비유했다. “미친X들이다. 무식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을 일본과 싸운 이순신. 홍범도 장군과 비교할 수 있겠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 최근, 국립 묘지법 개정을 통해서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친일 인사의 묘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파내야 한다. 법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 일본 군대 출신이고, 일제(日帝) 시대에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 묘지에 안장할 순 없지 않겠나?”

 

● 걸레는 빨아도 걸레일 뿐, 행주가 되지 못한다.

 

백선엽(白善燁)1920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서 193903월 평양 사범 학교를 나와 일제(日帝) 만주국이 세운 봉천 군관 학교에 제9기로 졸업한 후, 194304월 만주 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봉천 군관 학교는 일본 관동군의 영향을 받는 일본 육사 만주 분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다. 1946년 남조선 국방 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백선엽이 근무했던 일제(日帝) 만주국 간도 특설대는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 독립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만든 특수 부대였다. 당시 북간도 일대가 조선인 항일 독립군 부대의 최대 근거지였기 때문에 일제(日帝)가 조선인 밀집 지역인 간도 지역을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다스리겠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만든 특수 부대였다.

 

● 왜 백선엽을 6.25 한국전쟁 영웅으로 만들었을까?

 

친일(親日) 청산 실패는 과거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친일파들은 친미(親美)와 반공(反共) 이데올로기를 생존의 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친일파들은 친일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6·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보도 연맹 등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며 반공 애국 투사로 변신해서 친일 행적을 지우려했다. 또한 생존을 위해 반공(反共)을 대한민국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친일 범죄 행위를 덮었고, 친일(親日)의 대가로 얻은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 결과, 독립 운동가나 양심적 인물들은 대한민국에서 배제되었고,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 상당수는 이승만의 정적(政敵) 또는 용공(容共)으로 몰려 수난을 당했으며, 그 후손들 대부분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 특설대의 비밀이란 회고에서 간도 특설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독립군을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일본을 배반하고, 오히려 항일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대한민국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밝혔다. 한편, 백선엽은 박정희가 빨갱이 남로당 군책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을 때, () 육군 하우스만 대위와 미 육군 로버츠(William Roberts) 준장에게 구명을 요청했다. 그리고, 육군 본부에 재심사를 건의하여 박정희에 대한 사형 집행 정지를 얻어냄으로써 불명예 제대시켰다. 그런 후, 1950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를 현역으로 복귀시켰다.

 

결국,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백선엽은 교통부 장관을 비롯하여 충주 비료 공장 사장 등 기업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백선엽은 반공(反共)을 모태로 하여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 45일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후, 미군 B-29 폭격기의 융단 폭격과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195009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9500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경북 칠곡군 가산면)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잠시 저지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전과(戰果)이며, 백선엽이 과연 한국 전쟁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 백선엽을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육군 본부

 

백선엽은 195207월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530131일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승진했다. 195402월에 제1 야전군 사령관을 거쳐 195705월 또 다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부러움을 살 수 있는 공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이 본보기가 되어야 할 인물은 아니다. 나라를 배신했던 인물이 다부동 전투의 공적을 혼자 독차지하고, 백선엽을 크게 미화(美化)한다고 해서 그가 애국자가 될 수 있을까? 그동안 그의 공적에 대한 보상은 나라에서 충분히 해 주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이 본받아야 할 영웅은 결코 아니다. 베트남 전쟁(1955-1975)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과 함께 하겠다며 사병 묘역으로 들어간 채명신 장군! 부와 명예를 뿌리치고 1980년 신군부와 타협을 하지 않은 장태완 수경 사령관, 정병주 특전 사령관 등이 진정한 대한민국 육군의 본보기가 돼야 하지 않을까? 걸레는 빨아도 걸레일 뿐, 절대로 행주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