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전두환, 5.18 북한군 투입설 최초로 유포

마도러스 2018. 5. 23. 22:26



전두환, 5.18 북한군 투입설 최초로 유포

전두환, 1980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

 

최근, 미국 국무부 비밀 전문에 따르면, 19805·18 당시 전두환씨가 전남 도청 진압 작전을 지시했다고 한다. 19805.18 당시 작성된 미국 국무부의 비밀 전문에서 광주 진압 작전의 최종 책임자로 전두환 씨가 드러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시각으로 20180525일 오전 09시 머스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한··일 대사관 등에 보낸 비밀 전문에 '군의 실력자 전두환 장군이 군사 작전이 필요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라고 나와 있다. 이 미국 문서는 당시 미국 국무부와 우리나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주고받은 문건인데, 체로키 파일이라고 해서 당시에 지미 카터 대통령 미국 국무부 장관, 국무부 차관, 주한미국 대사 이런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었고, 이제 비밀 해제가 돼서 볼 수 있게 된 문건이다.

 

이 문건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조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서에는 최종 진압 작전에 당시 '계엄 사령관의 결정이다' 혹은 '누구 대통령의 결정이다' 이런 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당시 보안 사령관이었던 '아미 스트롱 맨, 군의 실력자 전두환(Army strongman general Chun Doo Hwan)이 최종 작전을 결심했다' 라는 결정적인 문구가 나와 있다.

 

미국은 5.18 민주화 항쟁의 모두를 알고 있었다.

 

5.18 민주화 항쟁의 첫 번째 희생자가 청각장애, 언어 장애가 있다는 것을 미국이 알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초기부터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가운데 계엄군이 총검을 사용해서 아주 많은 사상자가 나타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문건을 접한 뒤, '당시에 첫 번째 희생자가 농아라는 사실은 이건 당시 광주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었던 건데, 어떻게 미국이 이걸 파악하고 있었을까? '미국의 정보력은 엄청났구나!'라는 것이 5.18 연구자들의 첫 반응이다.

 

비밀 문건에는 19805.18 기간 중에 당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난 뒤, 워싱턴에 있는 머스키 미 국무장관에게 '052700시쯤 진압 작전이 시작된다'는 긴급 전문을 보낸 내용이 나온다. 이후, 머스키 국무장관이 전파한 '한국 상황 보고서'에는 합참의장이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052700시부터 계엄군 투입을 알렸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다. 전두환 씨의 결심으로 최종 진압 작전이 결정되고 수행되는 과정까지 문건에 담겨 있는 셈이다.

 

‘5.18 북한군 투입설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전두환이었다.

 

5.18 민주화 항쟁의 북한군 개입설을 공식석상에서 처음 거론한 인물은 전두환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800604일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장이 된 전두환 씨는 주한 미 상공회의소 기업인들과의 만찬장에서 5.18에 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전두환 / 1980년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장 : 22명의 신원 미상 시신이 발견됐는데 모두 북한의 침투 요원으로 보고 있다. 5.18의 책임은 김대중에게 있으며, 그를 기소해서 이걸 입증하겠다]

 

마치 북한군들이 실제로 들어온 것처럼 그때 당시에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1980년 그때 전두환 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자체를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5.18 민주화 항쟁의 북한군 투입설은 1980년대 중반 신군부가 당시 안기부를 동원해 유포했다고 알려져 왔지만, 그 시작은 역시 한 사람, 전두환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눈감아 줬다.

 

주한미국 대사가 19800522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건을 보면, '지금 광주 상황이 21일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고 안 좋아지니까 미국의 입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한다. 내가 볼 때는 미국에서 빨리 성명을 내고 입장을 내야 될 것 같다' 라고 미국 국무부에 문건을 보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계엄군의 강경 진압을 질타하는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미국)가 성명을 발표하고 바로 직후에 군사력이 투입하게 되면, 미국 입장이 좀 난처해지지 않느냐?” “우리(미국)가 성명 발표하고 이틀 정도는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우리가 확실한 약속을 받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반미 감정 때문에 군사력 동원을 잠깐 멈춰달라고 부탁을 했을 뿐이다. 강경 진압 자체에 대해서 그걸 멈춰달라거나 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 국무부의 비밀 전문에서 계엄군의 최종 진압 작전 돌입 13시간 40분 전인 19800526일 오전 1020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 대사는 "광주의 무법 상황이 길어지는 것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군사 작전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다" 라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전부터 미국은 '광주의 상황이 결코 간단치가 않다. 계엄군이 진압을 하면서 총검을 들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는 등 강경 진압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5.18 기간 중에 0521일 날 집단 발포로 가장 많은 피해가 났고, 그 날 저녁부터 계엄군은 외곽으로 철수를 했습니다. 철수를 한 뒤, 시민 측과 정부 측이 협상을 벌였는데, 전두환'이제 더 이상 이런 교착 상태를 놔둘 수 없다'고 해서 군 투입을 결심을 했고, 그래서 0527일 새벽에 작전에 들어갔다. 0527일 새벽 진압 작전 당시 상황에서 당연히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미국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눈감아 줬다.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강경 진압에 동의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 쪽에서 '잘 몰랐다' 책임이 없다가 아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계엄군의 강경 진압을 사실상 용인했던 미국은 불똥이 반미 감정으로 튀는 것을 걱정했다. 심지어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묵인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