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박정희(朴正熙), 독립군 학살한 기록 공개

마도러스 2015. 11. 18. 15:33


박정희(朴正熙), 독립군 학살한 기록 공개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 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 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bDe7KCKkhHg&feature=youtu.be


 박정희가 일제 만주군 8단에서 독립군 학살 기록이 공개 되었다. 당시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군인들은 박정희가 독립군 학살을 나간다면, '요시‘ '토벌이다' 하며 고함을 지르며 좋아했다고 증언 했다.


 박정희(朴正熙)는 1937년 03월 그는 21세의 나이로 대구 사범 학교 졸업했고, 그 해 04월에 문경 보통학교로 부임하여 교사로 근무했으나 학교 교장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서, 만주(滿洲)로 가고자 했고, 군인(軍人)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찾아간 곳은 만주의 독립군(獨立軍)이 아니라 일본(日本)의 만주군(滿洲軍)이었다. 1939년 03월 그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으나,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다.

 

1940년 04월 01일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25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대구(大邱) 사범 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꼴찌’까지 떨어졌지만,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간 뒤에는 늘 우등생이었다. 1944년 03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고,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하였으며,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중위(中尉)로 근무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군의 충실한 장교’로 착실히 복무했다.

 

1939년 03월 박정희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는데, 1939년 03월 31일자로 발행된 만주(滿洲) 신문에 따르면, 박정희(朴正熙)는 만주 군관 학교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 서류 중에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서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 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만주(滿洲) 신문 1939년 0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朴正熙)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滿洲國)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朴正熙)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였다. 첫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만주 군관 학교 2기생 졸업 앨범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그 후, 그는 또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두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 군관 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으며,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완전히 일본 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또 한번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건국대학교 김병태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에서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였다”고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