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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의 충의로운 자결과 혈죽(血竹)

마도러스 2014. 11. 10. 12:06


민영환의 충의로운 자결과 혈죽(血竹)

 

조선 말엽에 충신 민영환이 죽었는데, 그 죽은 자리에서 혈죽(血竹)(피빛과 같은 대나무)이 솟구쳐나게 하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奇蹟)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대나무라고 하는 것은 뿌리로 번식하기 때문에 주변에 대나무밭이 있지 않는 이상, 갑자기 대나무 한그루만 솟구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현상DL다. 이 현상이 하도 이해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현상이라 'SBS 백만불의 미스테리' 팀에서 추적을하여 방영을 한 것이다.

 

'SBSTV'팀에서도 전문가의 말을 다 들어봐도 주변에 대나무 밭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같은 현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는 대나무가 서식한 흔적은 없고 일제또한, 그 흔적을 찾을길이 없어 그냥 뽑아버렸던 것을 후손들이 간직해 오늘날 고려 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905년 11.30 (음력 11.04), 민영환이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반대하여 자결하고 8개월이 지나자,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등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재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
(公)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신문 보도대로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방 마루에서 청죽이 솟아 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 라고 말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광복 이후,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상제님께서 그 기적을 세상에 보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민영환의 충의의 마음을 본받고 되새기게 하신 것이다.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碧血)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혈죽血竹)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원로 역사학자 최태영 박사는 “당시 혈죽은 잎사귀가 45개 있었으며 이 숫자는 민 충정공이 순절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수여서 더욱 신비스러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