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제사(祭祀) 잘 모시면 복福 받는다

마도러스 2011. 2. 24. 15:39

 

사(祭祀) 잘 모시면 복(福)받는다  

 

■ 구명시식(救命施食) 의식에 부친 영혼이 나타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서구식 사고 방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제사(祭祀)나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 바쁘고 번거롭다는 이유도 크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차지한다. 어차피 제사(祭祀)나 차례도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자는 의미이니, 추모회나 기도회로 대치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제사(祭祀)를 지내는 민족은 전 세계에 얼마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제사(祭祀) 지내는 풍습은 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위해 온갖 정성으로 음식을 차리고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절을 하는 모습은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인의 카르마(업보)이다. 한국인이라면 아무리 현대화되고 서구화되어도 죽으면 제사상을 받고 싶고, 또 당연히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어느 40대 사업가의 구명시식(救命施食)에선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 사업가는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구명시식(救命施食)을 연기했다. 그래서 다시 날짜를 잡은 것이 14일 후. 그런데, 하필 그날은 돌아가신 부친의 제삿날이었다. 부친의 제사(祭祀)는 큰형이 맡고 있었는데, 기독교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제사 대신 항상 기도를 드렸다. 결국 1984년도에 돌아가신 부친은 단 한번도 제사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형님이 제사상을 올리지 않아 늘 마음에 걸렸지만 장남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제사상을 올릴 수도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중 구명시식(救命施食) 날짜가 하필 부친 제삿날로 연기된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구명시식(救命施食) 당일! 그는 지방 중소 도시에 살고 있던 터라 서울을 향해 급하게 차를 몰았다. 토요일 고속도로 정체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히던 고속도로가 한산했다. 차량이 좀 많았을 뿐 어느 정도 속력을 내며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꽉 막히는 토요일 오후였지만 서울 시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디오에서는 막히는 구간이 많다고 방송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차가 잘 빠져 무사히 잠실 법당까지 시간 맞춰 올 수 있었다. 그는 의식을 기다리면서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구명시식(救命施食) 의식이 시작되자 검은 어둠 속에서 부친 영혼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영혼의 모습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의해 결정 난다. 잘 살고 잘 죽은 영혼은 한 눈에 좋은 인상을 풍기게 마련이다. 여기에 자손이 정성껏 모시기까지 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없다.

 

■ 죽은 영혼에게 잘 하면복(福)을 받는데 왜 안 하려 하느냐!

 

그런데, 부친 영혼은 허름한 차림새에 어두운 표정이었다. 살아서 얼마나 근심 걱정이 많았던지 볼은 깊숙이 패여 있었다. 후손들이 정성껏 상을 올렸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20년 동안 단 한번도 제사(祭祀)를 올리지 않은 탓에 기력 하나 없이 구명시식(救命施食)에 초혼(招魂)됐다.

 

부친은 생전에 청계천에서 봉제 공장을 운영했다. 당시 청계천의 삶이 그러하듯 참 먹고 살기 힘들었다. 게다가 봉제 공장에 여러 번 화재가 나는 바람에 번번이 망했고, 가족들은 늘 가난에 지쳐 있었다. 영혼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한탄했다.

 

'내가 조상을 잘못 모셨기 때문에 나도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구나. 너는 반드시 조상(祖上)을 잘 모시도록 해라!' 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설마 자신이 제사상을 받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죽으면 끝이 아니다!’ 라며, ‘죽은 영혼(靈魂)에게 잘 하면, 산 사람이 고스란히 복(福)을 받는데 왜 이렇게 쉬운 일을 안 하려 하느냐!’ 라며 행태를 꼬집자 아들은 이제부터라도 제사상을 거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20년 만에 처음 받은 제사상 앞에서 한동안 목이 메여 눈물 흘렸던 영혼(靈魂) 떠올리며 제사(祭祀)만큼은 종교를 초월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차길진 법사의 시크릿 가든 89) [뉴시스 Newsis, 입력: 2011.02.19]


■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교 사원에서는 제사(祭祀)를 지내고 조상(祖上)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 및 마귀 숭배로 여긴다. 정말로 조상(祖上)을 섬기는 것이 마귀 숭배일까? 하지만, 우리 민족의 민간(民間) 신앙에서는 자기 조상(祖上)을 ‘하느님’으로 여겨왔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 제사(祭祀)를 올리면, 99%의 복(福)을 받는다! 지장경(地藏經) 제7품에 “죽은 자를 위해 제사(祭祀)를 베풀면, 죽은 자는 그 은공의 7분의 1을 갖는다!”는 말이 있다. 산 자가 7분의 6을 갖는다는 말이나, 엄밀히 따지면 죽은 자는 100% 중 1%만 가져가고 나머지 99%는 산 자의 차지이다. 천도식(薦度式)은 죽은 자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효도(孝道)가 중요합니다. 조상에게 잘하면 내게도 복(福)이 오기 때문이다.

 

조선(朝鮮)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문명과 문화가 최고로 발달했던 시기이다. 조선(朝鮮) 초기 적어도 성종(成宗 1457-1494) 때까지만 해도 제사(祭祀)를 딸, 아들 구별 없이 돌아가며 윤회봉사(輪回奉祀)를 했으며, 제사(祭祀)에 드는 경비도 분담하는 분할제를 택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상(祖上)을 받드는 정신은 딸, 아들이 다를 수 없으며, 맏이나 그 외의 자녀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례(祭禮)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여자들도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에게 형식에 구애없이 음식을 차려 놓고 감사(感謝)의 제사(祭祀)를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에게 큰 짐이 되는 지나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은 없어져야 한다. 제사(祭祀)를 지내면 자신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만 오는 것이 아니다. 부모(父母) 및 조부모(祖父母)의 친한 친구 및 친척들도 함께 와서 음식의 향기와 기운을 음복(飮福)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예수(Jesus)가 강조한 윤회(輪回) 및 환생(還生)

 

예수(Jesus)는 윤회(輪回)를 여러차례 강조하곤 하였다. 기독교 초창기 성경(聖經)에서는 예수(Jesus) 탄생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 윤회(輪回)와 환생(還生)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다. 요한(Johannes)과 예수(Jesus)는 영혼(靈魂) 세계와 윤회(輪回)의 법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이전 있던 곳(前生)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한 6:62).

 

“이 사람을 보라. 그는 한때 전생(前生)에 잔인한 사람이어서 한 동료의 눈을 잔혹한 방법으로 멀게 했느니라. 드디어, 사람들은 이 사나이의 부모를 데리고 와, 바리새인(Pharisee人) 앞에서 증명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예수(Jesus) 당시는 물론, 예수 사후 약 500년간의 초기 기독교 사이에는 많은 기독교인들(특히 Gnosis파)이 윤회설(輪回說)을 자유로이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콘스탄티누스 황제 소집)에서 Gnosis파(靈知주의)의 문헌들은 당시 카톨릭 세력에 의해 모조리 배척되고 제외되었으며, 553년 바티칸 공의회(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소집)에서 윤회설(輪回說)을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윤회설(輪回說)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화형(火刑)에 처하는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의 기독교(Christianity)는 영혼의 윤회(輪回)를 인정하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제사(祭祀) 문화도 용인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Christianity) 원래의 본질이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