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조상(祖上)의 영혼이 수호신이다.

마도러스 2011. 2. 24. 15:34

 

상(祖上)의 영혼이 수호신이다.


■ 양친 부모의 영혼은 그를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제사(祭祀)는 조상(祖上)을 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도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조상(祖上)을 잘 모시면 자신과 가족에게 복(福)이 돌아오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잘 나서 출세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조상(祖上)이 돌봐서 잘 되는 경우도 있다. 제사(祭祀)도 제대로 안 모시면서 복(福)을 받고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복권도 사지 않고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복(福)에 관한 말들을 종종 쓰곤 한다. ‘복(福) 있는 관상(觀想)이다’ ‘그 여자는 참 남자 복(福)이 많다’ 등등. 일상 생활에서 복(福)이란 말이 행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복(福)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편안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모처에서 병원을 개업한 지 꽤 오래된 한 의사가 찾아와서는 덜컥 “법사님 저는 참 복(福) 없는 놈입니다” 라며 자신의 박복한 인생 스토리를 털어 놓는 것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그만 양친 부모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후, 부모님의 얼굴도 모른 채 친척집을 떠돌며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겨우겨우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됐다기 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의사가 됐다. 막상 의사가 되고 나니 부잣집 아가씨들이 줄을 서더군요. ‘이제는 잘 살 수 있겠구나’ 싶어 그 중 재산이 넉넉하고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를 골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뒤, 한 10년 정도까진 처가(妻家)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한다. 병원 개업 때에도 처갓집 신세를 톡톡히 봤다. 한마디로 의사 타이틀에 돈 많은 처가(妻家)를 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나이였다나.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병원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기 시작할 무렵, 장인 어른의 사업체가 부도가 났다. 그 바람에 이제는 거꾸로 처가(妻家)의 생활비와 조카들의 교육비까지 몽땅 그가 대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얼마나 박복한 놈입니까? “뭐가 좀 되려고 하는 이 마당에 이제 처가(妻家) 생활비까지 제가 책임져야 하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면서 구명시식(救命施食)을 청했다. 나 역시 이 의사 선생님의 스토리가 마음에 걸려 그의 원하는 대로 구명시식(救命施食)을 올릴 수 있게 해 드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타나신 그의 양친 부모의 영혼은 그를 보자마자 호통을 치시는 게 아닌가!


“이놈아! 니가 복(福)이 없는 놈이라고? 하나뿐인 아들을 영계(靈界)에서나마 잘 되게 해주려고 중요한 순간마다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줬건만결국 한다는 소리가 ‘박복한 놈’이라는 소리라니!”


알고 보니 그의 부모님께선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6·25 당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무참히 사살된 것이었다. 그랬기에 시신조차 제대로 찾지 못해 장례도 시신없이 치를 수밖에 없었고 돌아가신 날도 정확하지 않아 제사도 올리지 못하였다.


양친 부모의 영혼은 하나 뿐인 아들인 그가 제사(祭祀)조차 지내주지 않자 이를 내심 서운하게 생각하셨던지 냉큼 제사(祭祀)부터 지내라고 따끔하게 혼을 냈다. 아무리 혼자 성장했다고 해도 모두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의사가 됐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조상(祖上)의 영혼(靈魂)이 수호신처럼 그를 지켜주었기에 가능했음을 깨닫게 했다.


“보세요. 선생님은 결코 박복한 분이 아니십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것 보다 더 간절히 영계(靈界)에서 선생님을 도와주고 계시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박복하다는 생각은 접고 그저 열심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 꼭 제사(祭祀) 올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선생님께 큰 복(福)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나의 말에 그는 눈물을 훔치며,연신 부모님 영혼(靈魂)께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만큼 그의 가슴에 고아(孤兒)라는 한(恨)이 강하게 맺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 한(恨) 때문에 ‘자기 자신은 뭘 해도 안 된다!’ 라는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소주 한잔에 ‘나는 참 복(福) 없는 사람이야!’ 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다. 복(福)이란 훌륭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각 하나만 훌륭하게 바꾼다면, 복(福)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다. [뉴시스 Newsis, 입력: 2011.02.19]


■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교 사원에서는 제사(祭祀)를 지내고 조상(祖上)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 및 마귀 숭배로 여긴다. 정말로 조상(祖上)을 섬기는 것이 마귀 숭배일까? 하지만, 우리 민족의 민간(民間) 신앙에서는 자기 조상(祖上)을 ‘하느님’으로 여겨왔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 제사(祭祀)를 올리면, 99%의 복(福)을 받는다! 지장경(地藏經) 제7품에 “죽은 자를 위해 제사(祭祀)를 베풀면, 죽은 자는 그 은공의 7분의 1을 갖는다!”는 말이 있다. 산 자가 7분의 6을 갖는다는 말이나, 엄밀히 따지면 죽은 자는 100% 중 1%만 가져가고 나머지 99%는 산 자의 차지이다. 천도식(薦度式)은 죽은 자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효도(孝道)가 중요합니다. 조상에게 잘하면 내게도 복(福)이 오기 때문이다.

 

조선(朝鮮)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문명과 문화가 최고로 발달했던 시기이다. 조선(朝鮮) 초기 적어도 성종(成宗 1457-1494) 때까지만 해도 제사(祭祀)를 딸, 아들 구별 없이 돌아가며 윤회봉사(輪回奉祀)를 했으며, 제사(祭祀)에 드는 경비도 분담하는 분할제를 택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상(祖上)을 받드는 정신은 딸, 아들이 다를 수 없으며, 맏이나 그 외의 자녀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례(祭禮)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여자들도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에게 형식에 구애없이 음식을 차려 놓고 감사(感謝)의 제사(祭祀)를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에게 큰 짐이 되는 지나친 허례허식(虛禮虛飾)은 없어져야 한다. 제사(祭祀)를 지내면 자신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만 오는 것이 아니다. 부모(父母) 및 조부모(祖父母)의 친한 친구 및 친척들도 함께 와서 음식의 향기와 기운을 음복(飮福)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예수(Jesus)가 강조한 윤회(輪回) 및 환생(還生)

 

예수(Jesus)는 윤회(輪回)를 여러차례 강조하곤 하였다. 기독교 초창기 성경(聖經)에서는 예수(Jesus) 탄생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 윤회(輪回)와 환생(還生)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다. 요한(Johannes)과 예수(Jesus)는 영혼(靈魂) 세계와 윤회(輪回)의 법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이전 있던 곳(前生)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한 6:62).

 

“이 사람을 보라. 그는 한때 전생(前生)에 잔인한 사람이어서 한 동료의 눈을 잔혹한 방법으로 멀게 했느니라. 드디어, 사람들은 이 사나이의 부모를 데리고 와, 바리새인(Pharisee人) 앞에서 증명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예수(Jesus) 당시는 물론, 예수 사후 약 500년간의 초기 기독교 사이에는 많은 기독교인들(특히 Gnosis파)이 윤회설(輪回說)을 자유로이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콘스탄티누스 황제 소집)에서 Gnosis파(靈知주의)의 문헌들은 당시 카톨릭 세력에 의해 모조리 배척되고 제외되었으며, 553년 바티칸 공의회(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소집)에서 윤회설(輪回說)을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윤회설(輪回說)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화형(火刑)에 처하는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의 기독교(Christianity)는 영혼의 윤회(輪回)를 인정하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제사(祭祀) 문화도 용인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Christianity) 원래의 본질이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