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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라!'

마도러스 2009. 3. 3. 17:38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라!'

 


  이상 야릇한 교합 동상에 관광객 시선 고정

 

카주라호는 난해한 도시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카주라호가 자랑하는 마투나 상(남녀 교합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통이 불편해 찾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카주라호에 닿자, 청년들과 릭샤꾼들이 몰려와 한국어로 “아저씨, 우리 호텔로 모실게요”라며 못살게 굴었다. 한국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의 유혹을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해 그들이 안내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카주라호의 마투나 상


다음 날 아침, 동군(東群)·중군·서군으로 나뉜 카주라호 사원 가운데 마투나 상이 집중돼 있는 시내에 위치한 서군으로 향했다. 신선한 햇살을 받은 마투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서군은 몇 개의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담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황갈색 또는 분홍빛을 띤 사암으로 지어진 사원 외벽이 모두 섬세한 부조로 뒤덮여 다가갈수록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더 눈을 뜨기 어려웠다. 시바와 비슈누 등 힌두 신과 요정들이 홀로 조각돼 있기도 했지만, 곡예사처럼 기묘한 동작으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남녀 신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풍만한 가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어떤 상은 가늘다고 할 수 없는 허리를 유연하게 휘어 서로 얼싸안고 한쪽 다리를 치켜올려 앞으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선 양쪽으로 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양다리를 쫙 벌려 그 짓을 벌이고 있어 무척 놀라웠다.

 

▲ 카주라호의 데비 자그다베 사원 외벽을 뒤덮고 있는 마투나 상.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사원인데 저렇게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들 교합상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했다. 몇 년 전 자이푸르에 갔다가 한 노인으로부터 인도 최고의 성전(性典) ‘카마수트라’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3, 4세기 인도 고전 문명의 황금시대, 당시 인도의 지체 높은 사람들은 그 지체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체위(모두 64종의 체위)의 성애를 배우고 익혔다는 것이다. 64란 숫자는 주역에 나오는 최고수와 동일한데, 이는 섹스가 남녀의 자유롭고 즐거운 성애를 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애는 예술과 같은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교도 애교도 없이 정액을 배설하는 행위를 성의 낭비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성행위는 세련된 기교에 의해 한층 감미로워진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남녀의 성적, 육체적 결합을 공(空)과 식(識)의 만남, 인간과 신의 만남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애의 기쁨은 생리적, 감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진리를 체득한 뒤에 갖는 정신적 만족감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섹스는 종교적인 환희에 이르는 길이었던 셈이다. 쌍둥이란 뜻의 ‘마투나’는 이런 이유에서 불교의 불이(不二)와 통하며 생명의 힘 같은 것이다. 

 내 버려 두라!

 

인도는 예로부터 문명의 텃밭이었다. 세계 4대 고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불교와 힌두교 등이 발생, 발전하다가 외지로 퍼져 나갔고, 이슬람 세력에 밀려 피난 온 아람어와 조로아스터교 등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등 인도는 늘 방문객을 환영했다. 당나라의 고승 현장에 이어 신라의 혜초,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와 그 뒤를 이은 수많은 여행자와 정복자, 선교사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인도에서 태어난 모든 종교는 건조한 땅 중동에서 발원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와는 달리 범신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많은 신을 섬기는 범신론이야말로 인도가 자랑하는 문화 다양성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라 이질적인 것도 잘 소화해냈다. 그래서 인도에 들어온 것 가운데 인도화하지 않은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포용이란 측면에서 인도를 따를 나라는 별로 없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비틀스의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이 1960년대 인도를 찾은 것도 그에게서 인도 음악의 깊은 맛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저 유명한 ‘렛잇비(Let it be)’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돼 있다. 그게 자연의 섭리니까 말이다. 인도 문명, 나아가 동양 문명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서구문명에 물든 우리의 눈에 인도는 혼돈의 땅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게 현대의 문제다.

 

스트레스 없는 인도인의 삶

인도 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렛잇비’ 정신은 자유를 상징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뜻한다. 깨달음과 명상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만을 위한 서구의 휴머니즘(인본주의)과는 당연히 구별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는 인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도 경제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20여 일에 걸친 이번 인도 여행을 마치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인도인이 가진 정신적 무게, 또 그들이 인류에게 제시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가 바로 21세기 인류의 희망이 되어 미래를 밝혀줄 것이다.”

 

주간 동아, 권삼윤 문명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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