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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공황과 미국.일본.유럽의 돌파 방식

마도러스 2008. 12. 2. 17:51

 

세계경제공황과 미국.일본.유럽의 돌파 방식


1. 미국의 경제 대공황 돌파 방식


미국 공화당의 후버(Herbert C. Hoover) 대통령은 1차대전 후의 풍요(豊饒)가 절정에 달했던 1928년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9년 12월 가장 극심한 세계적 경제 재난에 직면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경제가 몰락하고 곤두박질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버 대통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개입이 더욱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며, 미국 경제는 스스로 개선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대공황의 파국은 계속되고 있었다. 1932년 후버가 재선을 위해 경선에 나섰을 때 주식시장의 가치는 그가 4년전 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의 10%에 불과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여전히 실업상태에 빠져 무능한 정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건설적인 행동을 취해줄 것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공화당의 공황 극복이 실패로 돌아가자, 1932년 11월 결국, 미국 국민들은 민주당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33년 그는 곧바로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경기 하강에 제동을 거는데 성공했지만 경제를 다시 성장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두자리 실업률은 1930년대 내내 계속되었고, 경제는 1920년대 생산 수준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자극제가 되어 각종 군수 물자 및 보급품을 생산함으로써 미국 경제는 점점 경제 공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1929~1933년)은 전세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은 경제의 블록(block)화를 더욱 촉진시켰고, 세계경제의 블록화는 무역을 통한 자원의 분배를 왜곡시키고 경제효율과 생산성을 더욱 저하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의 증폭 속에 독일의 나찌즘(Naziism,히틀러), 이탈리아의 파시즘(Fascism,무솔리니), 일본의 군국주의(천황독재) 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일본의 경제 대공황 돌파 방식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이 일본으로 까지 확대되어, 1930년대 일본은 극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日本)은 조선. 만주. 일본을 잇는 경제블록 체제의 확보와 나아가 중국대륙으로까지 그 활로를 찾아야 했다. 결국, 일본은 공황의 탈출방법으로 전쟁을 택해야 했다. 한편, 중국(中國)은 그당시 내전(內戰) 상태 였는데,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군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군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만주에는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지원을 업고, 장개석의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작림은 정부군에 밀리고 있었는데,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당 정부군과 손잡음으로써 중국은 통일의 물꼬가 트이는 듯했다. 이때, 다급해진 일본(日本)은 군사행동을 일으킬 명분을 얻기위해 그들이 영업 중인 만주철도 노선을 폭파시키고 나서, 그것을 중국의 장학량의 짓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일본군은 1931년 9월 18일 선전포고도 없이 무력으로 만주를 침략하였고, 이것이 바로 대륙 침략의 첫 단추인 만주사변(1931)이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워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府儀)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 이로써, 자기 영토의 몇 배나 되는 광활한 만주를 차지한 일본은 새로운 시장이 활짝 열려 미국. 유럽 보다 세계 경제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탈출할 수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은 1936년 시안(西安)사건과 1937년 중.일 전쟁(1937년)으로 연결되었다.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38년 후반,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천명하며 아시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1940년 독.이.일 3국동맹을 체결한 후에, 일본(日本)은 가장 먼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 하였다. 이것은 미․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고,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다. 그리고, 석유의 대일(對日) 금수(禁輸)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對美) 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공습(1941)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원래 미국의 동인도제도(말레이지아 반도)에서 생산되는 석유에 대부분을 의존해 왔었는데, 석유의 대일(對日) 금수(禁輸)조치로 인하여, 일본으로의 석유 공급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격하여, 동남아시아 유전지대에서 부터 일본 열도에 이르는 석유 수송망을 확보하려고 했으며, 더 나아가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볼때, 태평양 전쟁은 석유 확보 전쟁이었다.   


3. 유럽의 경제 대공황 돌파 방식


 1차 대전이 종결과 함께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패전국 독일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 부여와 군비제한 등이 주요 골자였다. 막대한 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 넣었고, 이것은 또한 유럽 경제를 다시 크게 혼란시켜 놓는 계기가 되었다. 채권국이라는 위치에 있었던 미국은 차관을 제공하고 배상금의 액수를 감소시킴으로써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하였으나, 1929년의 세계경제 공황으로 말미암아 독일의 미국에 대한 전체 상환은 흐지부지 되었다. 이와 함께 군비축소가 모색되고 불전(不戰)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독일 나찌(Nazi)의 히틀러가 등장함으로써 무효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배국인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물었기 때문에 독일국민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33년, 독일(獨逸)에서는 베르사이유 조약 체계의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Adolf Hitler)가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스위스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獨逸)은 1933년 10월에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그리고, 1935년 3월에 히틀러는 전쟁 준비를 선언하였으며, 1936년 3월에는 독일군이 프랑스 남동부의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입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디오피아에 침입하여 1936년 5월에 완전 정복하였다. 또한, 독일일본은 1936년 11월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가세하여 독․ 이 ․일 3국 반소(反蘇) 동맹을 맺었다.

 

 결국, 1939년 9월에 미․영․프․소․중 연합국(聯合國)독․이․일동맹국(同盟國)이라는 대결구도가 성립되었다. 1938년 2월 독일(獨逸)의 히틀러는 나찌(Nazi) 체제를 강화하였고,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또한,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으며,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전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왜냐면, 독.소 불가침 조약은 독일의 파시즘을 견제해야 할 영.프.러의 연결 고리가 깨어지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소련 공략을 목표로 추진했던 일본의 독일과의 군사동맹 교섭도 물거품이 되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의 히틀러는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였다. 독일은 또한 1939년 9월 유럽 남동부의 코카서스 석유 공급 기지까지 점령하였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폴란드의 주권을 옹호하겠다고 주장했던 영국과 프랑스를 크게 자극하였다. 결국,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그리하여 영.독(英獨)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독(英獨)전쟁(1939년 9월)과 독.소(獨蘇)전쟁(1941년 6월)으로 크게 귀결된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를 침략하였고, 1939월 9월 28일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점령하였다. 또한, 소련은 1940년 7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더우기, 소련은 1940년 6월 루마니아 북부지방까지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한편, 독일(獨逸)은 원래 루마니아에서 석유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들여왔었는데, 석유 공급지 루마니아의 북부지방을 소련에게 빼앗겼으므로, 독일의 안정적인 석유 공급이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동방제국의 건설이 히틀러의 본래 목적이었는데, 소련에 의해 독일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동부 유럽의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을 더욱 활발히 벌였다. 왜냐하면,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더우기, 루마니아의 석유 자원을 비롯한 전쟁물자의 공급지로서도 매우 중요해서 반드시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戰線)에서 일제히 소련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1941년의 독.소(獨蘇)전쟁이다. 1941년의 독.소(獨蘇)전쟁은 석유 확보 및 자원 확보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