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천자국(天子國) 회복을 시도한 황제, 고종

마도러스 2008. 2. 5. 17:44


천자국(天子國) 회복을 시도한 황제, 고종

 

조선의 고종(高宗)은 1897년 08월 01일 독자적인 연호 '광무(光武)'를 사용하고,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圓丘檀)(현재 서울 조선 호텔)에서 황제(皇帝) 즉위식을 거행했다. 고종은 '원구단'에서 상제(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고 만천하에 황제(皇帝) 등극을 알렸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새로운 국호인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각국의 공사관. 영사관에 통보하였다. 고종 황제가 올린 원구대제(圓丘大祭)는 끊어진 한민족의 천제(天祭) 문화의 맥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천자국(天子國)의 위상을 회복하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최후의 임금이다. 고종(高宗)은 1897년 조선 왕조사에 최초이자 최후로 ‘황제’로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고 ‘광무(光武) 원년으로 연호를 고쳐 썼는데, 이는 조선(朝鮮)이 자주적 주권 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된다. 이는 당시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외세의 간섭 와중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마저도 거부한 조선 왕조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 두 황제는 조선(朝鮮)의 마지막 황제로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로 기록되었다.

 

■ 일본의 조선 침략과 고종(高宗) 황제의 슬픔

 

1863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은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중국(中國)에 예속되지 않은 자주국임을 내외에 알리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선포함으로써 조선 왕조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당시는 왕비 명성 왕후가 군대를 동원한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1895 을미사변), 이에 충격 받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1896 아관 파천) 친(親) 러시아 내각을 구성한 후였다.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현재의 조선 호텔 자리에 원구단을 짓고, 상제(上帝)님의 위패를 모셨다. 이로써 고종 황제는 상제님을 모신 정통성 있는 황제로서의 위상을 되살려 내고, 비로소 중종 이후 상실되었던 제천 문화를 일시적으로나마 복원해낸 셈이었다.

 

또한 고종(高宗) 황제는 단발령에 따라 먼저 자신의 상투를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나 1897년 시작된 광무(光武)개혁은 이미 가까운 일본을 비롯한 서양의 앞선 나라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주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것이다. 반면 일본은 개화파를 앞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압력을 가했다.

 

마침내 1904년 러일 전쟁을 핑계로 군대를 동원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을 둘러싼 강대국간의 상대적 우위를 이용, 한일 의정서를 강제 조인하고 1905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을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기 시작한다.

 

이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실제적인 지배에 들어가자, 고종(高宗)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오히려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를 당하고 만다. 고종 황제는 1919년 01월 한(恨) 많은 세월을 마감하였다.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독살되었다는 설이 시중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는 3.1 운동의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조선의 마지막 왕이 된 순종(純宗) 황제

 

순종(純宗)은 1875년 세자로 책봉된 후,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고종이 이완용(李完用)의 강요에 못이겨 헤이그 밀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하야 하자, 이어 순종(純宗)이 24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미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당한대한제국(大韓帝國)은 1907년 08월 01일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마저 해산되었으며, 12월에는 황태자 영왕(1897-1970, 순종의 이복 동생, 일본이 영친왕으로 격하하여 부름)이 유학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1908년 동양(東洋) 척식(拓殖) 회사의 설립을 기화로 경제 침탈의 길을 뚫은 일본은 1909년 조선의 국권 탈취 공작을 착착 추진한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합병 조약을 조인함으로써 마침내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만다. 결국 순종(純宗)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제이자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조선 왕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후 한일 합방 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한 침략아래 36년의 긴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고 1945년 대망의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은 예전의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았고, 서양에서 도입된 민주주의에 의한 대통령제로 바뀌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1950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 그리고 4·19, 5·16 등을 거치며 민족의 시련기를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그 사이 정치 체제는 잠시 장면 총리가 이끄는 내각 책임제가 있었지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선거로 통치자를 뽑는 대통령제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환국(桓國)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다.' 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요(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