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동학군(東學軍)은 조선의 선각자(先覺者)

마도러스 2008. 12. 26. 20:52

 

학군(東學軍)은 조선의 선각자(先覺者)


[농민군 높게 평가한 당시의 일본 신문 공개] 동학군(東學軍) 토벌 작전 큰 원한 남길 것이다!” 농민군 높게 평가한 그 당시의 일본 신문이 공개됐다. 1894년 동학 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강력히 비판했던 당시 일본 지방 신문의 사설이 공개된 것이다. 2008.12.22-23일, 한국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전쟁의 유적을 평화의 초석으로’라는 주제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공개됐다. 동북아 역사 재단과 창원대 경남학 연구센터가 공동주 최했다. 이노우에 가쓰오 일본 홋카이도 대학 명예교수는 2008.12.22일 발표에서 동학 농민 전쟁 당시 일본 가가와현에서 발행된 가가와(香川) 신보(新報)의 연재 사설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1894년 12월 20일자 1면 사설에서 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를 ‘조선 국민 중의 선각자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2008.12.23일자 1면 사설에서도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토벌’을 비판하고 있다. “어찌 원한(怨恨)을 후세에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0명이 죽으면 1000명이 원망(怨望)하고, 1000명이 쓰러져 죽으면 1만 명이 원망(怨望)한다. 아아! 어찌 우리의 덕(德)을 펼치는 일에 유리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또 이와 함께 신문은 당시 동학 농민군 학살을 진두지휘한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공사의 이름을 거명해 비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지난 10년 간 동학 농민 전쟁 연구에 매달려 온 일본 학자이다. 그는 일본군 인천 병참 본부의 ‘진중(陣中)일지’라는 사료를 발굴해 동학 농민군에 대한 조직적인 ‘살육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학계에 소개한 바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도 “일본 방위성에 보존돼 있는 ‘진중(陣中)일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군의 동학군 포위 섬멸작전이 놀랍게도 조선 현지의 일본군이 아니라,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총리 대신이나 참모 본부에 의해 입안됐다는 것이다.” 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에 나선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당시 일본군은 청.일 전쟁과 동학 농민 전쟁 보도에 엄격한 검열을 가했다.” 라고 말했으며, “전쟁의 진실이 매우 제한적으로 알려지는 상황에서 동학 농민군을 높이 평가한 신문 사설의 존재는 매우 귀중하다.” 라고 말했다. 이번 학술 대회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학자들이 모여 전쟁과 침략의 과거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평화의 21세기를 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이다.


기조 강연을 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동북아에 견실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발판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며, “유럽 등지에 존재하는 ‘국경을 넘는 평화 공원’과 같이 동북아 국가들에 흩어져 있는 전쟁 유적지들을 공통의 ‘평화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 제안했다. (중앙일보. 배노필 기자, 2008.12.24)

 

 세계 1차 대전으로 확산되는 동학 혁명 


동학 혁명군은 전주를 점령하였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한다. 이 때, 조선의 민씨 정권은 개혁을 들어줄 의사도 없었고,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도 없었기에 청(淸)에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청(淸)이 조선에 파병(1894.05.05)하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내세워 즉각 조선에 병력을 파견(1894.05.06)한다. 결국,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 전쟁(1894년-1895년)이 일어난다. 동학 혁명에서 발단된 청.일 전쟁(1894년-1895년)에서 일본은 승리하였다. 그 강화조약인 198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6일 뒤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이 개입(삼국 간섭)하자, 일본 정부는 “청.일 전쟁에서 전력을 소모한 현재로는 3국과 싸울 힘이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해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일본 국내에서는 관민 모두가 3국 특히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10년 후 러.일 전쟁(1904-1905년)에 대처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동안 중국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서양 제국주의는 삼국간섭 이후 중국의 이권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일본의 진출은 중단됐으나, 청 나라는 한층 더 큰 대가를 요구받게 되었다. 이 후, 극동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러시아는 ‘삼국 간섭’으로 얻는 중국의 여순. 대련을 전초 기지로 마침내 한반도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조선의 이권에 개입하였다. 결국 청.일 전쟁(1894년-1895년)은 러.일 전쟁(1904-1905년)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10년간 절치부심했던 일본과 러시아는 드디어 러.일 전쟁(1904-1905년)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 전쟁(1904-1905년)의 결과로 전쟁 초기에 비웃음을 받았던 일본은 그 지위가 세계적으로 격상되었고, 태평양뿐 아니라 유럽의 세력 균형도 흔들어 놓게 되었다. 이 때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방해함으로써 일본 승리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반면 극동 진출의 꿈이 좌절된 러시아는 발칸 반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러일 전쟁(1904-1905년) 이후 러시아의 영국에 대한 반감, 프랑스와의 불화, 독일과의 동맹 등으로 발전되어 세계 1차 대전(1914-1918년) 발발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