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조선이 세계 최고의 전략 미사일을 가졌었다!

마도러스 2008. 9. 6. 23:32

 

선이 세계 최고의 전략 미사일을 가졌었다!  

 

태종때 화약 개발 박차, 화차가 화통군 주력 무기로  

세종땐 휴대용 총통, "아이도 쏠 수 있을 정도"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신궁(神弓)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일반 활보다 세 배 이상 강한 활에다가 무거운 쇠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하면서도 백발백중이었다. 적까지도 끌어안는 넓은 포용력과 함께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였던 활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화약 총통(銃筒)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종은 즉위하던 첫 해에 고려 말 화약을 만든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감 주부(종6품)로 특채해 본격적으로 화약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7년이 되면 군기감 소속 화약장들이 만든 화약이 '맹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해온정(解穩亭)에 거둥하여 화차(火車) 쏘는 것을 구경하고 최해산에게 말 한 필을 하사했다. 또 포(布) 50필을 화통군(火筒軍)에게 주었다. 화차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해온정은 창덕궁 동북쪽에 있던 정자이다. 10년 가까이 최해산이 화약 개발에 전력을 쏟아 본격적인 결실을 거두었다. 화통군은 1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이 동원한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있던 군대편제였지만 화차가 화통군의 주력 무기로 채택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것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화차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 말은 고스란히 세종30년에 탄생했다는 신기전(神機箭)의 설명과 그대로 일치한다. 따라서, 세종의 신기전은 태종의 화차를 개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태종 시대를 거치며 최해산 등이 이룩한 화약 발전으로 인해 세종 때에는 휴대용 총통 시대가 열렸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22년(세종4년) 12월 북방 여진족 방어를 위해 떠나는 군사 중에서 강인한 자들을 선발해 총통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언급이 처음으로 나온다.


15년이 지난 세종19년(1437년) 군기감이 개발한 세총통(細銃筒) 150정을 실전에 배치한다. 세총통은 휴대와 사격이 용이해 "어린 아이와 여자라도 쏠 수 있다"고 돼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소총보다 조금 짧은 총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27년에는 총통위(銃筒衛)를 신설해 일반 군인들보다 뛰어난 장정들을 투입했다. 이때는 세자(훗날의 문종)가 대리청정을 할 때였기 때문에 어쩌면 세종보다는 문종이 총통위 설치 등을 통한 정예군 육성에 더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총통은 군국의 중대사"라는 언급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조선군에서 총통위가 차지했던 비중을 쉽게 알 수 있다. 2년 후가 되면 총통위 병사의 수는 2400명으로 늘어난다.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던 이때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때이기도 했다.


'격목(檄木.화약 다지는 일종의 나무망치)·철퇴(鐵槌.쇠탄환)·철전(鐵箭.쇠화살)·화약(火藥)·화심(火心)·양약요자(量藥凹子)·장화기(藏火器)' 총통위 군사 1인이 갖춰야 할 무장이다. 격목은 적과의 접근전에서 육박전이 벌어질 때 사용하는 무기이고 철퇴나 철전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총통에 장착해 발사했다.


화약과 화심은 필수이고, 양약요자란 말 그대로 일정한 양의 화약을 장착하기 위한 요(凹)자 모양의 계량기였고, 장화기는 말 그대로 화약을 장약할 때 쓰는 보조기구이다. 그러나 늘 총통을 만드는 데 쓰는 철과 화약을 만드는 염초의 부족이 세종을 괴롭혔다.


이런 가운데도 총통개량작업을 지속한 끝에 세종30년(1448년) 200보에서 500보에 불과하던 사거리를 400보에서 1500보로 개량하고 총통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그때 총통매뉴얼로 만든 것이 '총통등록(銃筒謄錄)'이다.


사실, 신기전은 팔전총통(八箭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장총통(長銃筒). 세총통(細銃筒)에 이어 맨 마지막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리 비중이 큰 무기는 아니었다. 태종 때 만든 화차를 이때 신기전이라 하여 총통등록에 추가한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세종30년에 신기전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온다고 하여 이때 신기전을 발명한 게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 막강한 총통위는 세조3년 폐지됐다. 반란의 우려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입력 : 2008.09.06)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환국(桓國)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다.' 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요(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