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강태공(姜太公)은 배달(倍達) 민족의 자손이다.

마도러스 2006. 8. 7. 07:13

■ 강태공(姜太公)은 배달(倍達) 민족의 자손이다.

 

1. 배달국(倍達國)의 감독관이었던 강태공의 조상,소전(少典)   

 

강태공(姜太公. BC 12세기, 3,100년전)은 동방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교(神敎)의 도맥(道脈)을 중국의 한족(漢族)에게 전수한 사람이다.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강태공(姜太公)은 경농과 의학의 시조이며, 진주(晋州) (姜)씨의 시조인 신농(神農, BC 3,218-3,070)씨의 후손이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少典)은 배달국(倍達國) 8대 안부련 환웅(桓雄, BC 3,240년 즉위)의 명령으로 강수(姜水)에서 군병 감독관의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며, 약 5,280년 전의 사람이다. 소전(少典)의 아들인 신농(神農)은 5,250년 전의 사람으로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수(姜水)의 이름을 취하여 강(姜)씨라 하였다. 서양의 노아(Noah)의 홍수가 BC 2,348년경에 발생했다고 하니까,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람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노아(Noah) 홍수 때, 노아 가족 이외의 인류는 모두 멸망당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노아(Noah)의 홍수 때와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지구의 다른 지방에서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세계적으로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및 서적들에서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서양사람들이 그들의 시조로 믿고 있는 아담(Adam) 이브(eve)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6,000년 전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며, 서양에서는 최초로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족보(族譜)상 서양 사람들의 시조(始祖)가 되는 것이지, 그들이 인류의 최초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기(三聖記)를 보면, 인류의 시조는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이며,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은 천신(天神)의 가르침을 얻어 혼례를 이루니, 9환족(桓族)은 모두 그들의 후예들이다. 라고 적혀 있다. 물론,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이전에도 인류는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고고학의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다. 다만,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이 시조(始祖)라는 얘기는 최초로 이름을 사용했다는 족보상의 의미를 말하며,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고 문명이 구체화되면서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9환족(桓族)은 환국(桓國)의 9개 족속을 말하는데, 환국(桓國)의 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리스. 로마 문명을 낳았고, 다시 그리스. 로마 문명은 지금의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동양에서 최초로 이름을 취하여 이름의 시초가 된 사람은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이며, 적어도 9,200년 이전의 사람이다. 서양에서 이름의 시초가 된 아담 이브는 6,000년 전의 실존 인물이며, 이들 모두 역시 신석기 초기 시대의 인물인 것이다.

 

2. 동방 최초로 청동기 문화를 연 배달국의 치우(蚩尤) 천황  

 

중앙 아시아에서 신석기 문명을 바탕으로하는 인류 최초의 국가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환국(桓國, BC 7,199-3,898)이다. 환국(桓國)은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의 후예들이 이름을 얻고 문명을 얻은 후에 세운 국가이다. 동양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은 9,200년 이전의 사람이고, 서양 아담 이브는 6,000년 전의 사람이어서,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보다 앞서서 이름을 취했다. 환국(桓國)의 정통맥을 이은 나라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이고, 우리 민족은 배달국의 자손이어서 배달민족(倍達民族)이라고 부르고, 배달국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14대-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 지는데,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청구(靑邱)라고 했던 것은 청구 배달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의 정통맥을 이은 나라가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다.

 

청동기 문명이 배달국 중엽부터 나오고, 청구 배달국을 건설한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은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 머리에 무쇠 이마)의 투구를 하여 만주 일대를 석권하였다고 한다. 최근,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 문화 유적지에서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됨으로서,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BC 2,707-2,333) 시대 용산(龍山) 문화가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화로 학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중국의 청동기 유적은 하(夏, BC 2,205-1,766)나라가 처음이다. 배달국 이후에 나온 것이다.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의 청구(靑丘) 배달국(倍達國)에서 꽃핀 청동기 문화가 중국으로 전해져 하(夏, BC 2,205-1,766)나라의 청동기 유적을 낳았고, (夏)나라 다음으로 (殷, BC 1,600-1,046)과 (周, BC 1,046-771)에게 청동기 문화가 전해졌다. 강태공(姜太公)은 청동기 문화가 동북방의 배달국(倍達國)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어 토착화 되고 있던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때의 사람이다.

 

강태공의 조상은 배달국(倍達國) 8대 안부련 환웅(桓雄)의 명령으로 강수(姜水)에서 군병 감독관을 하였던 소전(少典)이다. 소전(少典)의 아들인 신농(神農, BC 3,218-3,070)씨가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취하여 강(姜)씨라 하였고, 신농(神農)씨의 자손이 바로 강태공(姜太公)인 것이다. 강태공의 선조가 서양의 노아 홍수에 해당하는 동양의 9년 홍수 때, 하(夏)나라에서 우(禹)임금(재위 BC 2205-2198)의 사악(四嶽, 제후의 장관)으로서 큰 공을 세웠으며, (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강상(姜尙)은 여상(呂尙)이라 불리어 졌다. 강상(姜尙)의 속칭으로 강태공(姜太公)으로 불려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치우 천황(蚩尤天皇)은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환웅으로서 이미 4,500년전에 일찍이 천하(天下)를 호령하고 신문명을 창조했던 위대한 배달민족의 영웅(英雄)이다.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 천황이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신족(神族)의 우두머리로 등장한다. 치우(蚩尤)천황이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도 전쟁의 신(神), 즉 군신(軍神)으로 추앙하였고, 큰 전쟁을 앞두고 반드시 치우(蚩尤)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명나라 때에는 북경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天亶)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삼신(三神)과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蚩尤) 천황을 모셨었다. 고조선의 국조 단군(檀君)도 부인되는 지금의 세태(世態) 속에서 고조선 이전 배달국(倍達國)의 14대 치우천황이 2002년 월드컵을 통하여 크게 알려졌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상징은 치우 천황의 모습인데, 모습은 도깨비의 상(像)이다. 치우(蚩尤) 천황의 모습이 도깨비의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치우(蚩尤) 천황을 도깨비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의 축구 응원팀 이름이 붉은 악마였는데, 배달민족으로서 배달국의 치우(蚩尤)천황의 명성을 되살리고, 고대사를 복원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었다.

 

3.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은(殷)나라를 무너뜨림

 

강태공(姜太公) (周) 문왕(文王. 서백)에 의해 등용되어 (周)나라의 기틀을 마련했고, (周) 문왕의 둘째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BC 1,600-1,046) 나라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주(紂)왕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齊, 산동성. 태산)나라에 봉함을 받아 (齊)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위수(渭水, 황하강의 상부 지류)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 전국 시대 때부터 한(漢) 시대 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제적 수완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능이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서백이 문왕(文王)에 즉위하기 전, 서백 큰 아들은 은(殷)나라 주(紂)왕에 의해 살해되었다. (殷)의 마지막 왕인 (紂)은 그가 유소(有蘇)를 정복했을 때, 항복의 표시로 바쳐진 미녀 달기(妲己)에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호화궁전을 짓고 향락을 일삼았다. 연못같은 욕조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마다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고, 거기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서로 쫓아 다니며 놀게 하여 유희를 즐겼고,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사치행각을 벌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간언하는 신하들을 숯불 위의 구리철판을 맨발로 걷게하여 죽이는 포락지형(炮烙之形)의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한편, 서백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殷) (紂)은 서백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서백의 큰 아들을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서백을 소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닐 것이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여 버려라.” 서백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을 했다.

 

이 때, 서백의 부하들은 서백을 구해내기 위해 주(紂)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 등을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을 석방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紂)왕을 대신하여 서쪽 지역의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서쪽 지역으로 간 서백(문왕)은 강태공을 책사로 기용하여 서쪽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周, BC 1,046-771) 나라를 세웠고, 국력 배양에 힘썼으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이 왕위를 이어 받았으며, 은(殷) 주(紂)왕이 원정을 나간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여 향락과 사치를 일삼는 은(殷) 주(紂)왕을 무너뜨렸다.

 

4.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 문화를 중국에 전해줌.

 

중국의 사서 사기(史記)의 주본기(周本紀) 의하면, 강태공은 은(殷, BC 1,600-1,046) 주(紂)왕을 무너뜨린 (周) 무왕(武王)에게 은(殷) 수도를 점령한 다음날, 아침 일찍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사단(社壇)에 올라가 맑은 물을 청수(淸水)로 모시고, 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렸다. 청수(淸水)를 올리고 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리는 제천 의식은 본래 동방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 문화의 원형에 해당된다. 강태공은 뿐만 아니라, 나중에 (齊) 나라 제후가 된 후에도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의 문화를 중국의 한족(漢族)에게 전수해 주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와 삼신관(三神觀)을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것의 증거로서 중국 (齊)나라의 팔신제(八神祭) 풍습이 있는데, 팔신제(八神祭)는 8신(八神)에게 제사지내는 제천 의식이다. 여기서, 8신(八神)은 삼신(三神.조화신. 교화신. 치화신), 치우(蚩尤) 천황(天皇), 천지일월(天地日月.하늘.땅.해.달)을 말한다. 중국 (齊)나라가 우리 배달국(倍達國)의 한 임금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의 봉선서와 진역유기(震域留記)에는 중국의 진(秦)나라 진시황(BC 259-210)과 한(漢)나라 유방(BC 247-195)의 시대까지도 팔신제(八神祭)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적어도 900년간 중국은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 문화와 배달국(倍達國)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의하면 “(周) 궁궐의 동남 쪽에 태일단(太一壇)을 설치해 놓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의 삼신(三神)을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강태공은 중국의 주(周)나라와 제(齊)나라에게 배달국(倍達國)의 삼신(三神) 신교(神敎) 문화를 뿌리 깊게 전수해 준 인물이다.

 

5. 귀신을 종처럼 부렸던 강태공의 도술(道術)

  

강태공은 주(周, BC 1,046-771) 문왕(文王)의 책사로서 그리고 무왕(武王)의 책사로서 폭군인 은(殷)나라 주(紂)왕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했는데, 명(明) 나라 때에 지어진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의하면, 은(殷)과 주(周)와의 전쟁은 인간들 간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트로이의 전쟁처럼 (殷)을 지지하는 (神)들과 (周)를 지지하는 (神)들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강태공은 신통한 도술(道術)로 은(殷)의 장군과 신들을 굴복시켰고, 마침내 주(周)의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어쨌든, 강태공은 (殷)을 멸망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워 (齊) 나라의 임금에 봉해진다. 강태공(姜太公)은 72후(候)를 써서 귀신을 종처럼 부렸고, 장자방(張子房)은 36계(計)를 써서 귀신을 친구처럼 부렸으며, 제갈량(諸葛亮)은 8진도(八陣圖)를 써서 귀신을 군사처럼 부렸느니라” (道典 4:115).

 

강태공은 1년을 72후(候)로 나눠(1후는 5일) 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 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節期)의 변화를 설명했고, 이것을 농사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을 마음대로 사역케 하는 신권(神權)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 설화 속에는 강태공이 신권(神權)을 부리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의하면, 강태공이 토둔(土遁) 수둔(水遁) 목둔(木遁) 등을 행하여 강태공의 몸을 감추어서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강태공은 도술(道術)에 능통하여 귀신도 능히 뜻대로 부리는 신권(神權)이 있었으며, 화둔(化遁)을 잘하여 자기 몸을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녔다고 한다.

 

그 후,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 처음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나중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게 살다가 죽었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고 했다. 강태공이 죽자, 그를 장(葬事) 지내려 하는데, 사체(死體)가 공중으로 사라지고 없어져서 장사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태공이 시해선(尸解仙)이 되어 천상에 올라갔다고 말하곤 했다.

 

6. 최고의 병법서인 '육도(六韜)삼략(三略)'과 강태공  

 

한편, 강태공은 상제(上帝)님의 가르침을 받아 내려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을 좌표로 삼았는데, 그의 저서인 “육도(六韜) 삼략(三略)”의 중심에는 동방 신교(神敎)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강태공이 직접 지은 병법서인 “육도(六韜)”는 다른 병법서와는 달리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 부터 인간학 조직학을 언급하고, 정치와 전쟁 및 인륜을 논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삼략(三略)”은 강태공의 병법과 전략 전술이 비밀리에 전해져 오다가 (秦)나라 시대의 황석공이 장량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강태공의 “육도(六韜)” 전법이 후세의 병법 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후대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위료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병법들이 모두 “육도.삼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유명한 병법가인 소진(蘇秦)은 강태공의 병법서를 접하고 나서,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경륜할 도를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강태공은 천문, 지리, 상학, 병학등 온갖 학문에 통달했던 희대의 천재였다. 그가 남긴 ‘육도(六韜)’라는 책은 문왕과의 대화를 통해 설명되는 내용을 취하고 있는데, 병법책이라기 보다는 철학서의 느낌을 받게한다. ‘육도(六韜)’는 문도. 무도. 호도. 용도. 표도. 견도를 말하며, 육도의 도(韜)’는 화살을 넣는 주머니를 주머니를 뜻한다.

 

7. 농촌의 디딜방아에 남겨진 강태공의 공덕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의 한 풍속으로 디딜방아를 짓고 나면, 흔히 디딜방아의 몸체에, 강태공이 태어났다고 하는 연월일시(年月日時)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姜太公) 조작(造作)이라고 쓴다. 이를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 방아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여 받는 재앙)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雜鬼)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우주변화 원리로 보면, 강한 금기(金氣)를 지닌 경금(庚金)과 신금(申金)으로써 목기(木氣)에 의한 동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금극목(金克木)의 상극(相克)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법술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은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경신년(庚申年) 모월(某月) 모일(某日)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解寃)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神明)이 강태공의 은혜를 보답하게 되리라. 강태공 10년 경영으로 3,600 개 낚시를 벌렸음이 어찌 한갓 (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니라.”

 

강태공이 80년 동안 가난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했고, 마음을 닦으며, 위수(渭水)에서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벌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후세에 천하사(天下事)를 하는 심법(心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강태공의 삶을 통해 새 문명과 새역사를 여는 우리들이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천하사(天下事)에 임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8. 험난했던 강태공의 삶과 말년의 성공  

 

강태공(姜太公)은 젊었을 때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행동이 민첩하면서 용감했다. 그렇지만, 강태공은 젊어서부터 공부에만 힘쓰고 집안 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상(姜尙)은 가슴속에는 큰 경륜 큰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를 크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가난했던 그의 집안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늘 그런 상태이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강태공의 아내인 마씨 부인은 늘 품팔이를 해서 글공부만 하는 무능한 강상(姜尙)을 먹여 살렸다. 

 

어느 날, 마씨 부인은 일을 나가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혹시 비가 오면 저기 멍석에 널어 놓은 보리가 젖지 않도록 들여 놓으시구려!”. 여느 때처럼 강상(姜尙)은 방 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건성으로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런데, 대낮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갔다. 저녁 때 아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멍석에 널어놓은 보리는 다 떠내려갔고 강상(姜尙)은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방 안에서 글만 읽고 있지 않은가? 마씨 부인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강상(姜尙)은 그 때 이렇게 말했다. “어허,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조금만 있으면 운이 트이는데, 그걸 못 참는가?” 그 후로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집을 떠났고, 강상(姜尙)은 혼자서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너무 가난해서 끼니조차 잇지 못할 형편이었다. 강상(姜尙)은 50살이 넘도록 여관에서 손님이나 맞이하는 심부름꾼 일을 했다. 그리고, 70살이 되도록 소백정 노릇을 하였는데,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70세가 되자, 강상(姜尙)은 위수(渭水)의 강가로 집을 옮겼다. 위수(渭水) 강변의 반계(蟠溪)라는 곳에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틈틈이 시간이 나면, 위수(渭水) 강변에 나가서 낚시질을 하곤 했다.

 

한편, 은(殷, BC 1,600-1,046) 주(紂)왕을 대신하여 서쪽 지역으로 파견되어 그 곳의 제후들을 다스리게 된 서백(문왕)은 점점 인망(人望)을 얻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새로운 인재를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서백은 어느 날 밤에 천제가 나타나 현인(賢人)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뜻대로 금방 쉽게 현인이 나타나질 않았다. 현인이 잘 찾아지지 않자, 서백(문왕)은 점()을 쳐 보았다. 점괘(占卦)는 대길(大吉)이었다. 위수(渭水) 근처로 사냥을 나가면, 현인을 찾을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교룡도, 범도 아니다. 얻는 것은 왕을 보좌할 인물이다. 서백(문왕.文王)은 내심 기뻐하며 이리저리 달리며 위수 근처로 수레를 타고 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이날 따라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수레는 위수(渭水) 강변의 반계(蟠溪)라는 곳에 다다르고 있었다. 멀리 바라 보니, 80세 노인이 홀로 앉아서 낚싯 줄을 던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못 본 척하고 낚시질만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서백(문왕.文王)은 그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어떻게 낚시는 잘되시오?” 그러자, 강상(姜尙)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고기는 미끼를 먹으려고 끌려오고, 사람은 녹을 먹으려고 임금에게 복종합니다. 천하(天下)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천하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이익을 같이 하는 사람은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이익을 독점하는 사람은 천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곁에 가서 말을 걸어보니, 누추한 옷을 입은 시골 늙은이지만 범상치 않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 노인은 70세부터 10년간 낚시질 해 온 80세 강태공(姜太公)이었다. 문왕은 바로 그 늙은이가 평생 자신의 스승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강상(姜尙)을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서 스승으로 모셨다.

 

서백(문왕)은 말했다. "나의 조부인 고공단보께서는 세상을 뜨기 전에,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도와 주족(周族)을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강상(姜尙)도 오랫동안 서백을 기다려 왔던 터인지라 곧바로 허락했다. 강상(姜尙)은 서백을 도와 (周)나라를 위하여 일했고, 마침내 주(周)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강상(姜尙)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려 졌으며, 그의 성이 강(姜)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불렀다.

 

강태공의 낚시질은 남 달리 2불지법(二不之法)을 썼으니, “2불(二不)”이란 첫째는 꼬부리지 않은 낚시를 쓴 것이며, 둘째는 낚시 줄에 고기 먹이를 꽂지 않은 것을 말한다. 남들이 보고 세상 할 일이 없어 그런 허무맹랑한 노릇을 하느냐고 비웃으면, 강태공은 “이제 보시오. 조만간 하늘의 뜻을 받은 이가 와서 걸리지 않는가.”라고 했다.

 

서백(문왕)이 강태공을 얻은 그해부터 서백은 (周)나라를 크게 부흥시키지만, 정책의 대부분은 책사 강태공의 정치 조언에 따라 나라가 다스려졌다. 결국 진정으로 천하를 거머쥔 자는 강태공이었다. 따라서, 강태공보다 낚시를 잘하는 자는 없었다. 강태공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10년간 낚시질을 하면서 세월을 낚았다. 강태공은 50살이 넘도록 여관에서 손님이나 맞이하는 심부름꾼 일을 했으며, 70살이 되도록 소백정 노릇을 하다가 10년간 낚시질하여 문왕(文王)을 만나서 (周)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80살에야 천자(天子)의 스승이 되고, (齊, 산동성. 태산)나라에 봉함을 받아 (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만약, 강태공이 문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저 걸식이나 하고 거지노릇을 하다가 들에서 말라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은(殷) 주(紂)왕은 포악한 정치로 민심을 잃고 있었으며, (周)나라의 문왕은 그를 토벌하고자 마음먹고 있었으나, 자기를 보좌해 줄만한 유능한 인물이 없어서 고심하고 있던 차에 강태공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강태공을 얻은 뒤부터 문왕(文王)은 더욱 정치를 공평하게 하였으며, 주위 제후들의 분란을 잘 조정하고, 주위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였으며, 문왕의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에 이르러 천하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강태공의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 때문이었다. 훗날, 용병술과 병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강태공을 그 시초로 여겼고, 존경하며 숭상했다.

 

9.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준 강태공(姜太公)

 

(周)나라가 세워진 후, 은(殷) 왕조를 멸망시키는데 공이 컸던 강태공은 나중에 "(齊)나라"의 땅에 봉함을 받아 제후가 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齊) 나라는 특히 강태공 고향이었으므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그의 마음은 기쁨과 착잡함이 함께 엇갈리고 있었다. 지난 날의 수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자신을 돌보다가 견디지 못해 달아난 마씨 부인에 대한 감정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이 무렵, 어려운 살림살이을 견디지 못하고 홧김에 나간 강태공의 전처(前妻)인 마씨 부인 가난한 막노동꾼과 재혼했고, 또다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강태공은 수레를 타고, 고향 땅으로 부임하면서 마씨 부인이 사는 마을 쪽을 경유하였다. 그 날따라 마씨 부인은 들에서 갱피를 훑고 있었다. 강태공은 시종을 시켜 마씨 부인을 불러오게 하였다. 마씨 부인은 지나날의 잘못을 사죄하면서 다시 합쳐지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강태공은 이미 운명의 길을 서로 달리가고 있는 몸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마씨 부인은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아내로 맞아 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눈을 지긋이 감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옛날의 자기 마누라였고, 옛날의 정감이 생각나기도 하였지만, 그 여인은 이미 새로운 남편이 있는 몸이었다. 강태공은 한참 후에 시종을 시켜  한 그릇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런 후 가져온 그릇의 물을 땅바닥에 쏟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땅위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만 있다면 다시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이하겠소. 그러나,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요. 우리의 끊어진 인연도 그와 마찬가지요!” 그녀는 울먹이며 서서히 단념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라는 속담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강태공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 마씨 부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 앉았다. 마씨 부인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수치심으로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이후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다. 그 후, 강태공은 옛날의 자기를 위해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주었던 마씨 부인에 대해 은혜를 갚고자 했다. 그래서, 강태공은 어렵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마씨 부인을 서낭신(城隍神)으로 만들어 주었다. 서낭신(城隍神)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厄運)을 막고 잡귀(雜鬼)를 막는 신이다. 동시에 마을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신이다. 강태공은 마씨 부인에 대한 지난날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주어 지금까지 약 3,100년이란 세월동안 각 고을의 성황당(城隍堂)에서 향화(香花)를 받도록 하였다.

 

“강태공(姜太公)”은 낚시꾼의 대명사로 불리어 진다. 물고기를 낚으려고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본래 목적은 물고기가 아니라 천하의 재상(宰相) 자리였다. 강태공은 곧은 낚싯대를 썼고, 잡힌 물고기는 놓아 주었다고 전한다. 한편, 강태공은 야속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아내와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더군다나 생계를 위해 노력해야 할 형편인데, 공부만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남들에게는 고매하게 보일지 모르나, 가정에서는 무능한 남편일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남편 때문에 겪는 가난 때문에 신물이 난 마씨 부인이 도망을 갔을 때, 강태공의 무능함과 무력감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강태공은 아내의 가출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뜻을 굳게 지켜 마침내는 출세를 하였다. 강태공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표본이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0. 강태공(姜太公)의 유명한 명언들

 

관리로서 공평하고 결백하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참된 관리가 아니다. 대인은 자기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기뻐하고, 소인은 눈앞의 이익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한다. 남의 참외밭 가장 자리에서 신을 고쳐 신지 않아야 하고, 오얏 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아야 한다. 

 

부지런한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이다. (善)한 것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보듯이 하고, 악(惡)한 것을 보거든 눈 먼 사람같이 하라. 어버이께 효도하면 자식이 또한 효도하고, 이 몸이 이미 효도하지 못했으면 자식이 어찌 효도하리요. 남을 저울질할 때 먼저 내가 그 저울에 달릴 것을 조심하라.

 

남을 상하게 하는 자는 먼저 그 자신을 상하게 된다.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여 남을 천하게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크다 하여 남의 작음을 비웃지 말며, 용맹만을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즐거움은 저절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재앙을 염려했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일은 모름지기 탐내야 하고 악한 일은 모름지기 즐겨하지 말라.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엎어 높은 항아리의 밑은 비추지 못하고, 뜻밖의 재앙도 조심하는 집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하며, 칼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은 베지 못한다.

 

11. 인류 최초의 성(性)씨인 강(姜)씨

 

원래, (風)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생겨난 성(性)씨이다. 풍(風)씨의 처음 시작은 5,500년 전, “주역”의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그려서 주역(周易)의 역철학을 체계화한 “태호(太昊) 복희(伏羲)”씨이다. 복희(伏羲, ?-B.C3,413)씨는 풍산(風山)에서 출생하여 풍(風)씨라고 하였다. 복희(伏羲)씨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3,512년 즉위)의 12번째 아들이며, 우사(雨師)직책을 수행했다. 음양오행과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려냈으며, 혼인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배달국의 녹도문자를 개량하여 새로운 문자인 용서(龍書)를 제정했으며,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을 만들었고 양잠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태호(太昊) 복희(伏羲)가 인류 문화의 첫 출발을 창시했고 신교(神敎)를 체계화 하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배달민족인 동이족(東夷族)을 비하하여 그의 모습을  사신인수(蛇身人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 풍(風)씨의 후손들은 15대 만에 자손이 끊어지는 바람에 결국 풍(風)씨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를 안타까워한 후세의 사람들은 "풍채 좋다. 풍신 좋다. 풍골 좋다"라는 표현을 남김으로써, 풍(風)씨를 기리고자 했다. ★ 5,500년 전에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 3,512년 즉위)의 12번째 아들인 태호(太昊) 복희(伏羲)가 주역(周易)을 처음 창시했고, 각종 문화 및 인륜 도덕을 내었다. BC 3,500-2,6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 BC 3,300년경부터 천단(지구랏 Ziggurat)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배달국의 신교(神敎) 문명이 전파 되어 창출된 것이며, 황하 문명(BC 3,000-2,500년경).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도 배달국의 신교(神敎) 문명에게서 나온 것이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배달국의 신교(神敎) 문명에게서 나온 것이다.

 

한편, 풍(風)씨 다음에 생긴 성(性)이 진주(晋州) (姜)이다. 강(姜)씨의 시조는 지금으로부터 5,300년 전에 살았던 신농(神農, BC 3,218-3,070)씨이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少典)은 배달국(倍達國) 8대 안부련 환웅(桓雄, BC 3,240년 즉위)의 명령으로 강수(姜水)에서 군병 감독관의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며, 약 5,280년 전의 사람이다. 소전(少典)의 아들인 신농(神農)은 5,250년 전의 사람으로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수(姜水)의 이름을 취하여 강(姜)씨라 하였다. ★ 신농(神農)씨 경농 의학의 시조이며, 시장제도를 최초로 만들었고, 농사짓는 법을 최초로 가르치신 분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배달민족인 동이족(東夷族)을 비하하여 그의 모습을 인신우수(人身牛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  강태공(姜太公) 배달민족인 신농(神農)씨의 후손이다. ★ “세상에 성(姓)으로 (風)가 먼저 났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사람의 몸에 들어 체상(體相)의 칭호로만 쓰이게 되어 풍신, 풍채, 풍골 등으로 일컫게 되었을 뿐이요. 그 다음에 (姜)가 났나니 '강(姜)씨가 곧 성(姓)의 원시'이니라!” (道典 2:37)

 

동북아시아에서 최초로 청동기 문명이 꽃핀 것은 청구(靑丘) 배달국(倍達國)의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 때였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夏, BC 2,205-1,766) 청동기 유적을 낳았고, 그런 다음 (殷, BC 1,600-1,046), (周, BC 1,046-771) 나라로 청동기 문화가 전해졌다. 그리고, 성(性)씨의 시초가 된 태호 복희(伏羲, ?-B C 3,413)와 신농(神農, BC 3,218-3,070)씨는 전부 신석기 말기 시대의 인물이다. ★ 동양에서 최초로 이름을 취하여 이름의 시초가 된 사람은 중앙 아시아의 동북부의 바이칼호(천해天海) 부근에 살았던 나반(那飯)과 아만(阿曼)인데, 적어도 9,200년 이전의 사람이며, 서양에서 이름의 시초가 된 아담 이브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6,000년 전에 살았던 실존 인물인데, 이들 모두 역시 신석기 초기 시대의 인물이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재위BC 2,357-2,258),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시대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요서 지방 홍산(紅山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유적지를 조사한 이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그 후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예를들면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에게 문명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한반도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 현재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홍산(紅山문화를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말엽 및 고조선(古朝鮮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중국의 건국(建國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문화'이다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단군(檀君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실제는 호족(.호랑이)과 웅족(.)을 배달(倍達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