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스크랩] 이순신 장군 일대기와 거북선

마도러스 2006. 7. 1. 22:52

이순신 장군 일대기와 거북선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 (※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 (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 (異兆)가 있어 그대로명명)


병정놀이 :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 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충무공 이순신 (1545 - 1598)

 

: 휘(諱)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 , 본은 덕수(德水).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임.


증직 과 추증 : 선조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음.


 

# 이순신 장군 관직 생활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국경경비)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 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 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04.13, 임진왜란

         # 왜군은 먼저 선발대 700여 병선으로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로 진격

        # 당시 조선은 10만이상의 병력을 대비하고 있었다.

         # 일본군의 병력은 출동 병력 약 20만, 일본 총병력 30여 만명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

       # 왜군은 정유재란(1597)을 준비하면서 이순신 수군의 판옥선에 대응하는

          대형함선을 건조. 대형함선등을 합쳐 약 2000척의 함선을 준비.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5만명.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

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 역사적 교훈

 

충무공의 일생은 임진왜란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10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드디어 전국을 통일한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침략의 이유라 했으나 실상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봉건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조정에 자리잡은 양반들은 당파 싸움과 무사안일에 빠져 주변국의 정세 변화에 무지하였고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율곡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로 유비무환을 역설할 때, 조선의 지배층은 오히려 이를 배척하고 더욱더 당쟁에 몰두한 결과로 임진왜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침략의 동태를 살펴보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 논리에 밀려 사신들의 보고는 묻혀 버렸다. 오직 충무공만이 준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7년간의 처참했던 전란은 끝났으나 전쟁터였던 조선 땅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인명의 손상과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 탈취되고 사회질서의 붕괴와 도덕의 해이를 가져왔다.

 

한편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왜국은 임진왜란으로 국내 봉건제후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신흥 상업세력의 진출에 힘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등장으로 19세기 중엽까지 막부(幕府)시대가 이어졌다. 조선에서 잡아간 기술자와 탈취한 문화재가 그들의 농업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편 명나라는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한 결과 당시 만주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팽창해 가던 여진족(淸나라)에게 정복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이 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잠재적 역량 때문이었다. 무력했던 관군을 대신하여 신분의 귀천을 넘어서 전 민중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운 의병활동이 바로 이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조총에 밀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차츰 총포 (비격진천뢰, 천.지.현.황 총통) 의 위력과 새로운 전술개발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또한 거북선과 판옥선 등 함선의 성능은 왜군을 훨씬 능가하였다.


여기서 충무공이 남긴 발자취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충무공은 정신무장과 훈련을 중요시하였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굳은 애국심과 전투에 앞서 필승의 신념을 고취하였고 엄한 훈련을 반복하여 병사들의 전투능력을 높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지리적 조건과 함선의 기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전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전투 이외의 요소인 병참, 보급과 후방 공작, 그리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빈틈없는 전략과 전술, 필승의 신념과 유비무환의 정신, 이 모든 것이 충무공을 동서양에서 제일로 꼽는 명장으로 만든 이유라 할 것이다.


거북선 기술배경

 

거북선은 갑자기 만들어진 배가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축적된 기술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조선기술, 고려- 검선(劍船)화포기술,


조선초-판옥선(板屋船) 조선기술 및 수군의 역사(상세설명)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수군(水軍)은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되어 옴.


서기 372년 경에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 3국이 다투어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음.

- 9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중국(中國)의 신라방(新羅坊)을 중심으로 대규모 교역을 하고 있었고, 동남아 지역의 해적을 소탕함.


- 고려 조(1011년)에는 배 양측에 창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검선(劍船)이 출현하였고,1150년에는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로 전투 장비를 갖춘 전선(戰船)이 사용됨.


- 1377년에는 최무선(崔茂宣)이 대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화통도감을 만들어 18종의 화포류를 생산하였고, 1383년에는 화살 끝에 화약을 단 불화살(火箭)을 만들어 배를 불살라 침몰시키는 전술이 완성됨.

- 조선 조(1555년)에는 전투중에 노군(櫓軍)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판으로 배를 덮은 판옥선(板屋船)이 새로운 군선(軍船)으로 개발되었음.


- 우리나라는 조선기술이 발달하였고, 화포와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전술(火攻戰術)이 확립되었으며 철편(鐵片)을 붙임으로써 배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 상대방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돌격전술(突擊戰術)이 보편화되었음.



거북선 제작 일지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 선조 24년(1591년) 정읍현감 이순신은 전라좌수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을 만나 거북선을 만들 것을 결심 선소(현 여수시 시전동708번지 일대)에서 거북선 제작에 착수 이듬해인 1592년 3월 27일 시전리 앞바다에서 시운전(진수식)을 하였다.


○ 1592. 2.08(선조 25년) : 돛으로 쓸 범포를 받음

○ 1592. 3.27(선조 25년) : 거북선을 타고 포격연습

○ 1592. 4.11(선조 25년) : 돛을 만듦

○ 1592. 4.12(선조 25년) : 지자포와 현자포를 시험 발사

○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처음 등장 : 사천포해전

 

 

거북선 전투

 

임진왜란 해전에서 일본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측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었다. 특히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이나 지휘능력, 또한 거북선의 위력은 전승의 대행진이었으며, 그리고 일선해상에서 직접 실전을 수행한 수많은 수군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희생이 전쟁을 뒷받침하는 데 실제의 전화 못지 않은 겪었던 좌수영 관내 연해지역민의 활동상도 빼놓을 수 없다.

 

▶거북선 전투요원

화약(火藥)과 포탄(砲彈)을 장전하는 화포장(火砲匠), 포를 발사하는 포수(砲手),화전(火箭)과 대장군전(大將軍箭)등 활을 쏘는 사수(射手).

 

▶거북선 전투방법

전투원들은 화포와 함께 화살 끝에 화약을 달아 놓은 화전(火箭)을 쏘았음 (거북선 안에서 쉴세 없이 쏘아 대는 포탄과 불화살로 공격을 받은 배는 불에 타서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음) 전투원들은 거북선의 이동방향(移動方向), 상대방의 위치에 따라 사방에 설치된 포문으로 공격함.

 

▶ 거북선의 전투능력

전투능력 탑승인원 : 전투요원 45명, 노군(櫓軍) : 80명, 노(櫓)의 수(數) : 16척, 총포구(銃砲口) : 36~72개



거북선 화력

 

○ 거북선은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천(天),지(地),현(玄),황(黃),포(砲) 등으로 무장.


- 천자포(天字砲)는 직경 11.7cm의 둥근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대포였는데, 이 포의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300보(步)로서 500m가 넘는 장거리(長距離) 임.


- 지자포(地字砲)는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으며, 사정거리도 350m가 넘는 장거리임


※ 거북선은 상대방의 사정거리 밖에서 천자포와 지자포를 이용

하여 마음놓고 포탄 공격을 할 수 있었음)


- 대장군전, 화전 등을 쏘았던 현자포(玄字砲), 황자포 (黃字砲)의 사정거리는 약 300m임.


- 승자포(勝字砲) :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에는 화약이 달린 화살을 쏘는 승자포를 사용함.

무게가 가벼워 이동이 자유로웠던 승자포도 사정거리는 200m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함.



거북선의 기동성

 

○ 거북선의 노는 양쪽에 8개씩 도합 16척이 있었으며 80명의 노군(櫓軍)이 담당하였고, 각 노에는 1명의 조장(組長)과 4명의 노군이 배속되어 있었음.  평상시에는 노 하나에 노군 2명씩 교대로 노를 저었으며,  전투시에는 노 양쪽에 2명씩 4명 전원이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저음 (조장은 전투상황에 따라 전후좌우로 노 젓는 방법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음. 격렬한 전투 중에도 전진(前進)과 후진(後進),선회(旋回)와 정지(停止),가속(加速)과 감속(減速)이 자유자재로 조절될 수 있어 전투중 기동성이 더욱 뛰어났음).


□ 이순신 승전 보고서 기록


"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은 총구멍이 되고, 용머리 위, 아래에 각각 2개씩의 포문이 있었습니다. 뒤는 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등판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멍이 있었습니다. 또한 좌우 방패판에는 각각 22개씩 포구멍을 뚫었으며 문곁에도 각각 포구멍이 한 개씩 있고, 좌우 복판에도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습니다.”


○ 거북선의 노(櫓)는 선체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충돌 시에도 동요 되지않고 노를 저을 수 있다. 선체 밖으로 노가 나와 있는 상대방의 배는 충돌 시에 노가 부러져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충무공의 일화

 

▷ 할아버지의 도움

 

왜놈들이 자물질을 해서 조선의 군함 밑을 뚫고 있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놀고 있는 배를 보면서 문득 할아버지가 명심하라던 글귀를 생각해 냈다."伐木丁丁 山更幽요 毒龍潛處水偏淸 이라"는 글귀였다.

 

이순신이 부하들을 시켜 "저 건너 앞산에 나무 비는 소리가 나는구나 창을 갖고 배밑을 더듬어 봐라"라고 시켰다. 과연 배밑 양쪽을 찔러대니까 피가 나왔다. 이순신 할아버지가 일러준 글귀 덕분에 왜놈들을 없앨 수 있었다. 산에서 나무베는 소리가 쩡쩡 나는데 군함에 구멍을 뚫는 소리와 박자를 맞춰 소리를 냈다.

 

보통사람이 볼 때는 '초부가 나무벤다' 그랬을 것인데, 충무대감은 선견지명이 있어서"伐木丁丁 山更幽"란 고시가를 생각해 내서,산에서 나무 베는 놈도 잡고 배밑을 조사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어디를 가서 배를 정박해 놓고 있는데 물이 매우 잠잠했다. "毒龍潛處水偏淸"이란 한시를 생각하고 배를 옮기게 하여 몰살을 면했다. 우리 같으면 '물이 좋으니까 쉬어가자' 그랬을 것인데 "독륭이 잠긴 곳은 물이 평범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는 양반이다.


▷ 처녀 원혼과 장군

 

이순신이 열여덟살 때 활공부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다 목이 말라 처녀에게 물을 얻어 마셨다. 처녀가 그릇에다 나뭇잎을 따서 주었는데 이순신이 괘씸하게 여겨 처녀의 가슴에 활을 대었더니 물에 체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후에 패랭이 쓴 영감이 와서 그 처녀가 상사병이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이말을 듣고 초상을 치루는 곳에 갔다. 밤이면 처녀가 앞동을 서서 성공하고 안하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남해에서는 '실패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가서 이내기에서 이순신이 죽었다.

이순신이 죽으면서 '죽었다고 말고 적을 쫒아라'해서 노량서 왜놈들도 못살고 말았다.

 

이웃집 처녀가 이순신을 사모했는데 신분이 달라 혼사를 꺼내지 못하고 상사병이 들어 죽었다. 뒤에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하루저녁 부둥켜 안고 잤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투가 치열할 적에 꿈에 영혼이 나타나 울둘목에 진을치라고 현몽했다. 충무공이 울돌목에 가서 보고 정말 진을 칠 요새지라고 느꼈다. 거기서 배 열두척을 가지고 적함 삼백척을 무찔렀다.


▷ 이순신과 송구봉

 

이순신이 십이삼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연습을 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이순신이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방에 누워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물었더니 그 구멍이 사청목(巳聽目) 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 이장군의 계책1 

 

왜군이 다시 쳐들어 와 조선조정에서는 야단이 났다. 막을 사람이 누구냐고 원균에게 물으니 원균이 안된다고 하여 이순신장군이 나갔는데 거북선을 타고 큰 기를 달고 나갔다. "일본군이 조선으로 나와 일본이 비었으니 우리는 일본을 점령하자"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이 들고 나갔다. 그렇게 거제바다로 나갔더니 일본군이 그것을 보고 일본을 지키기 위해 절반이 돌아갔다. 그 때부터 이순신이 성공을 해서 한산도 싸움을 승리했다.

 

일본이 서울까지 함락하고 임금은 평양까지 달아나고 난리가 났는데 이순신 때문에 전라도는 무사했다.

무슬목의 지형이 쏙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이장군이 꾀를 썼다. 일본군한테 지도를 흘리기를 육지가 없고 탁 트인 것으로 해서 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쫒아 포위를 해서 들어오니까 일본군이 도망을 하다가 막혀 땅을 파서 배를 뒤쪽으로 뺄려고 했는데 그렇게 땅을 파다가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거기서 이장군의 계략에 걸려들어가지고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 이장군의 계책2

 

옛날에는 역의암까지 물이 들어 왔는데 거기서 이순신 장군이 묘계로 군인들에게 옷을 서너가지를 입혔다. 흰 옷을 입고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와서 노랑 옷을 입고 한바퀴를 돌고 해서 왜적들이 그걸 보게 했다. 그렇게 의복을 갈아 입혀서 전쟁을 한 곳이다해서 역의암이다. 그 역의 바구가 산꼭대기에 서있다. 우리가 호칭하기로는 매돌바구란 곳이다.

 

그 산을 처음에는 검은 옷을 입고 나중엔 붉은 옷, 푸른 옷을 입고 돌았다. 옷을 바꿔입고 그 바위를 돌았다해서 역의바구다. 덕양 뒷산에 있는데 저 묘도 바닥에서 보면 잘 보인다. 여의암 동쪽으로 바다다. 왜적들이 쳐들어 올 때 우리 군이 작으니까 부인들을 군복을 입혀 가지고 우리도 이만한 군사가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산꼭대기를 순회하게 했다. 그래서 여의암이라 한다.

 

이순신장군이 망마산에서 망도 보고 훈련도 시켰다. 훈련을 시킬 때 한 번은 빨간 옷을 입혀 한 바퀴 돌리고 또 한번은 흰 옷을 입혀 돌렸다. 군대가 많이 집결한 것처럼 해서 왜적들이 두려이 생각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상화도,하화도를 위꽃섬,아래꽃섬이라 한다. 임진왜란때 병사들에게 여자옷을 입혀 가지고 유인하면은 둔병도,조발도에서 기습해서 잡았다.

 

조선성에서 왜놈들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데 거기서 빨간 옷,파란 옷,색깔을 바꿔가며 돌았다. 색색으로 나오니까 수천명같이 보여 왜놈들이 당황횄다. 이순신장군이 군량이 없으니까 뽈록산의 나무를 전부 베어 버리고 날개를 이었다. 왜놈들이 그것을 보고 "저렇게 군량이 많이 있는가 보다"고 놀래서 도망을 갔다. 노적산이라고 한다.


신성포와 야죽불

 

신성포 야트막한 산 위에 있는 성은 한국에서 쌓아 놓은 것이었는데 우리 수군은 왜놈들에게 밀려서 거기를 뺐겼다. 그래서 왜놈들이 거기서 진을 친 것이었다. 그 때 이순신 장군은 하동의 대를 베어다가 짚을 펴놓고 짚 둥지 안에 대를 다발다발 넣어서 둥그렇게 묶어, 야죽불울 만들었다.

 

노량 바다쪽에서 신성포로 들어오며, 야죽불을 놓으니가, 대 매듭 튀는 소리가 총소리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다. 하나도 아니고 수십개가 불이 붙어서 튀니까 "조선도 이렇게 무기가 많구나 우리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 고 그것에 놀래서 그놈들이 다 달아나 버렸다. 그래 가지고 남해 노량강 거기서 빠져 나갈려고 할 때 이장군은 남해섬 저 건너 어디가 대기해 갖고 있었던가 적진으로 오다가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 이내기에서 죽었는데 남해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그 곳의 지명을 물었더니 이내기라고 했다. 이순신이 자기가 죽을자리라고 했다. 이내기에 들어가 갖고 "여기서 죽을 거다"고 했다. 망마산 가면 나무가 하나 서 있다. 이순신이 훈련하면서 쓰던 지휘봉이 그 때 저 나무다. 그 때 그 나무를 꼽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은 내가 살 것이고 만약에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고 했다. (망마산 건팽나무)

 

왜놈이 쳐들어 오는 길목에 철모를 놔두고 조선군인은 그것과 똑같이 생긴 바가지를 쓰고 다녔다. 왜놈들이 와서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전부 철모를 쓰고 다녔다. 길가에 철모가 있어 다섯,여섯이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한국 사람들은 한 사람씩 쓰고 다녔다. 조선 군대가 장사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일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사람의 형용을 만들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짚둥치를 해 놓고 왜놈들이 거기에다 활을 쏘면 화살을 빼어 갖고 되쏘고 했다. 의병들이 그런 전술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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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글쓴이 : 난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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