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스크랩]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금보다 3배 먹었다.

마도러스 2006. 7. 1. 22:52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금보다 3배 먹었다.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한국고문서학회 지음.역사비평사.

서기(西紀) 23세기에 사는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살구꽃이 활짝 핀 18세기 조선의 평양. 오늘 밤 새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대동강에 십여 척 배를 띄우고 봄날의 밤을 즐긴다고 한다. 평양 주민들은 횃불을 들고 나와 뱃놀이를 구경하며 한바탕 축제를 벌일 것이다.
 

강변에 도착하니 이미 강 양안(兩岸)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 중에서 가까운 남쪽 강변에 있는 사람들 224명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청(靑)·황(黃)·홍(紅)·갈(褐)·흑(黑). 갖가지 색깔의 옷차림이다. 이를 보면 ‘백의(白衣)민족’이란 말은 아마도 19세기 이후에나 나온 말일 듯하다.

 

지체 높은 양반들만 나온 게 아니다. 효심 깊은 젊은 상민(常民) 부부는 노(老)부모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구경 나왔다. 젊은 남편은 맨 상투머리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 두건을 썼다. 저 멀리 아이를 업은 젊은 남자는 푸른색 저고리에 잠방이 바지를 입었다. 상민들은 주로 저고리를 입고 벙거지를 쓴 차림새다. 하지만 형편이 좀 나은 상민은 양반의 도포보다 소매가 좁은 겉옷(창옷)을 걸쳤다. 천민(賤民)들도 나왔겠지만 옷차림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양반은 도포를 입고 술띠(술이 달린 띠)를 매는 것으로 신분을 나타냈다. 갓은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횃불을 든 상민 홰꾼들도 갓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중인(中人)들은 도포와 비슷하지만 허리 아래 주름을 잡은 ‘철릭’을 입고 있다. 하지만 중인도 술띠를 매서 양반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옷차림만 보면 조선의 신분제는 ‘반(班)-상(常)’의 ‘2신분제’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롭게 뱃놀이 구경을 즐겼다. 정말 성대한 행사였다. 오죽하면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말이 있었겠나. 김홍도(金弘道)라는 화가는 이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후세에 전하겠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달밤에 배 띄우고 노는 그림)’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뭘 먹었는지도 궁금하다. 이곳을 비롯한 북쪽 사람들은 조밥을 주로 먹는다. 남쪽 사람들은 쌀밥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었다. ‘점심’이란 말은 낮에 먹는 밥이 아니라 아무 때나 형식을 갖추지 않고 먹는 것을 말한다. ‘미암일기’ ‘묵재일기’ ‘양용기’ 등 옛 문헌에 쓰여 있다.
 

대신 식사량이 엄청나다. 한끼에 2.1홉(420cc)을 먹는다. 21세기 사람들이 먹는 양의 세 배다. 19세기말 ‘조선교회사’를 지은 서양인 달레는 “조선 사람들의 가장 큰 결점은 대식(大食)”이라고 했다. 반찬은 냉이·달래·버섯·고사리 등 주로 채소들이고, 두부나 고기는 아주 귀하고 특별한 음식이다.
 

사는 집은 깔끔하고 아담하다. 집터를 잡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일 하나하나에 공간을 생각한 지혜를 담았다. 세입자도 있다 하니 사람 사는 모양은 언제어디나 비슷한 것 같다.

 

수도 한양은 기와집이 60%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시골집 대부분은 방이 두세 개 딸린 초가집이다. 1904년 호적안(戶籍案)에 따르면 경남 11개 군 4만5000호 가옥 중 3칸집이 52%, 2칸집이 37%, 4칸집이 8%였다. ‘초가삼간’이란 말은 그래서 생겼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 너무도 생생해서 내가 과거를 다녀온 것인지, 원래 조선에 살다가 이곳에 온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한수기자   입력 : 2006.04.1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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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글쓴이 : 난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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